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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7년 2월
평점 :
이렇게 뜨거운 논란이 되는 책에 대해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 것인가?
간략한 줄거리 요약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점을 적으면 될 것이다.
구체적 논점이 없이 자신의 입장에 치우친 때이른 판단이 주된 내용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 이 책은 EBS에서 신설한 어학교육 프로그램(www.ebslang.co.kr)의 교재로
개발된 책이다. 따라서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도올 선생의 본지를 더욱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2. 서(intro)에서 우선 강조되는 점은 기독교가 조선후기 남인들의 주체적인
수용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핵심이 되는 인물은 이벽, 이승훈,
권철신과 정양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였다. 즉, 이들 초기 수용자들은
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교리 탐구를 통해
조선이라는 폐쇄된 문명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따라서 우리의 기독교 수용은
주체적, 계몽적, 이성적이었으며 미래지향적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신을 배격하는 성리학자인 이들을 매혹했던 기독교의 힘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대부분 배교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 초기 수용자들의
처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기독교가 급격히 성장한 이유는 조선이 망하면서 성리학이 해체되면서 정신적
공백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에게는 민족해방이나 근대화의 열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민중의 입장에서는 인간 평등사상이 주는 해방감과
더불어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을 시작으로 200년이 넘은 지금, 기독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애환을 담은 우리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3. 도올 선생의 주장 중 또다른 쇼킹한 주장은 구약은 참고문헌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결국 신약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민족신인 야훼간의 특정한 계약을 적은 것으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민족의 희망을 좌절시킨 역사다.'(37쪽)
다윗과 솔로몬은 사치와 부도덕으로 나라를 망친 질나쁜 왕으로 결코 칭송할만한
인간들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예수를 치사한 다윗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지만 율법에 사로잡힌 유대인이기를
거부하고 사랑의 종교를 세운 사람으로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도올 선생은 마가, 마태, 누가의 3 복음서는 다윗의 후손이자 민족적
구원자로서의 예수에 집착하여 구약과 이적에 속박되어 있는 반면, 요한 복음은
유대의 전통에서 벗어나 헬라이즘의 로고스론을 통해 구약의 속박을 벗어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신약 중에서도 요한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이제 본격적인 요한 복음의 강해를 보자.
강해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복음이 이오니아의 에베소에서 AD 100년경에
성립했다고 할때 '말씀'즉, 로고스의 사상적 뿌리는 BC 500년 경 같은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찾을 수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코스모스를 긍정하였으며, 우주의 법칙으로써의 로고스를
끊임없이 변화와 투쟁을 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불이라고 보았다.
복잡한 내용은 직접 보아야 겠지만 최종결론은 이렇다. "로고스는 법칙으로서
우주에 내재하는 동시에 사유의 법칙으로서 우리 마음에,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이요 빛이었다."(87쪽)
5.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사상을 긍정하는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 볼때
변화하는 코스모스를 현상계로 머리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계로
나누고 오직 관념만을 중시했던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개탄스러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플라톤을 거쳐 기독교에 반영되는 데 그 결과는
관념적 기독교, 세상과 분리된 상관없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는, 우주의 투쟁의 긴장 속에 내재하던
로고스로부터, 우주 밖의, 그러니까 시공을 벗어난 초월적인 로고스로 그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이데아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 성격이
완전히 추상되어버린 이성적 실체가 되어버린다."(92쪽)
그렇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인데 도올 선생은 기독교의 역사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코스모스의 긍정과 파르메니데스의 코스모스의 부정이 서로 뒤엉킨 채 진행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헬레니즘의 보편적 토양을 간과한다면 신약이나
요한복음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도올 선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분열과 융합은 요한복음의 끊임없는 주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분열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되고 융합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된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을 읽어나가는 묘미이다."
6. 나는 이쯤해서 인터넷 강의에서 들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를 적고
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원래 내 리뷰의 의도는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서로 논쟁합시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였다.
사족을 달면, 도올 선생도 연세가 예순이시고 적어도 내 관점으로 봐서는
성의와 열성을 가진 좋은 학자이시다.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동네 강아지
취급하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두 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도올 선생이다.) 여하튼,
구체적인 논점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만이 도올 선생으로 부터 배우려는 사람도,
배척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부질없이 종교와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감정적인 대립하지 말고
"나는 여기까지는 파악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지 않냐? come and see!
Let's talk about it!"이런게 좋지 않나 싶다.
5.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 마가, 마태, 누가 복음은 예수를 기술하는 방식이
비슷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데 예수는 공관복음 속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1) 시골인 갈릴리 지역에 주로 살았던 목수로 천민신분이었다.(최하층 20%)
2) 갈릴리의 시골, 나사렛의 예수가 소외된 계층에게 이적을 보이며 제자를 끌어모은다.
대중의 인기를 높아져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된후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러나 성전에서 동물을 몰아내고 환전상의 상을 뒤엎는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을 계기로
지배층에게 위험한 자로 미움을 사게되고, 결국 십자가 형을 받았으나 부활, 승천한다.
3) 결국, 예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일직선적인 상승곡선을 그린다.
요한복음은 이와는 다른 혁신적인 복음서이다.
1) 예수는 지상의 출생과 관계없이 로고스의 화신이다.
2) 태초부터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존재이다. 신이며 인간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증언이나 이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3)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직선적인 구도가 없다.
4) 국제도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개방적이고 지적인 존재이다.
6. 끝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인 로고스 기독론적인 요소는 예수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로고스 기독론(영지주의)이라는 이야기의 큰 틀을 미리 내세움으로써
유대민족의 혈통이나 이적의 과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결과, 신화적인 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인 예수가 드러나게 된다.
로고스론이라는 신화적 장치가 인간 예수를 드러내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추가 리뷰 ( 5월 25일)****
인터넷 강의가 3단계에 접어들고 [요한복음 강해]를 3번째 읽고 있다. [강해]를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 부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강해]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크게 3군데인데 (1) '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에서 중반 이후의 논리적 연결 (2) 로고스 기독론 (3) 종말론의 현재화 이다. (2)는 철학 및 역사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고 (3) 신학적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므로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1)인데 책을 나름대로 정독했다고 생각하지만 유득공의 [발해고] 부분이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부분이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은 것이 곤혹스럽다.
또 이 부분을 달리 보면, 블루비니님의 리뷰에서 보듯이 '밥맛없는 민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감정적인 거부감을 덜고 [강해]를 호의적으로 본다면 이 밥맛없는 민족주의 부분이 도올 선생의 전체 논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여하튼 도올 선생의 논지는 조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고 논리상으로도 엉성해서 거부감을 들게 하지만, 거부감을 넘어 저자가 의도한 논지를 확연히 파악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선 이런 부분이 도올 선생의 영감에 의한 원고지 채우기형 글쓰기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영감에 의한 글쓰기는 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실존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힘은 있지만 앞뒤가 모순되기도 하고 논리적인 구성이 엉성해지는 부분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글쓰기 속에 상당한 감정을 담아 길게 적은 부분이 있다면 도올 선생의 의식세계 속에 중요하게 자리잡은 생각이라는 걸 나타내므로 적절한 논리적인 연관을 찾아내어 핵심적인 주장으로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강해]의 처음을 이끄는 '서'부분의 핵심적 주장은 제목 그래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이다. 이승훈 이벽 등에 의해 기독교가 주체적으로 수용되는 역사를 그리다가 도올 선생은 '기독교가 조선 문명의 주축으로 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1) 내부의 동질적 요소 : 풍류지도, 신바람 (2)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 : 인간 평등의 이상 (3) 구원 또는 율법 부정의 실존적 절실성 : 유교문화의 신분주의적이고 의례적인 질곡에서의 해방 (4) 역사적 상황의 동질성 : 식민지 상황의 이스라엘과 조선 이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펼쳐지는데 그들의 역사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고생한 역사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 이전에도 부패한 지배층과 강대국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듯 고생하던 유태인들은 예수 사후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시까지 무려 18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게 된다. 이들은 신과의 계약을 어긴 결과 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결과 고향을 잃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찾았다. 이것을 설명하는 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시련을 통해 참회한다는 것 또는 하느님이 어리석은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시련을 내리시고 충분히 성숙했을 때 다시 해방하신다는 것이다. 시련의 끝은 고향으로의 되돌아옴이다.
조선의 기독교가 팽창하던 시기의 조선은 어떠하였던가? 조선 역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음을 저질렀던가? 이스라엘의 후회스런 역사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어리석은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민족적 고향인 만주 벌판의 포기 : 신라의 삼국통일, 유득공의 [발해고]에서의 통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2) 깨어있는 민족적 선각자의 박해 : 묘청, 최영, 이이, 김덕령, 이순신, 소현세자 등.
굳이 단순화 한다면 만주는 예루살렘이오, 최영이나 이순신은 예수가 될 것이다. 예수를 죽여 1800년을 떠돈 유대인과 최영을 죽여 만주를 잃고 이순신을 죽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은 처지가 비슷하다. 민족의 역사의 고향을 버리고 협소한 한반도에 갇혀살며 넓은 세계로 가자고 선도하는 선지자를 죽인 역사, 그래서 끝내 이민족의 식민지가 된 역사가 우리의 역사이다.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깨인 민족이 되어 우리의 민족적인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런 구구한 이야기를 통해 도올선생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민족의 초기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읽으면서 자기민족의 역사를 반성할 줄 알았고, 그리고 좌절과 패배와 낭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으려 했다는 것이다."(56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다. 절박한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죄악을 반성하고, 나 일신의 편안함이나 세속적 영욕에서 벗어나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공동체로서의 기독교!"(58쪽)
도올 선생의 이런 진지한 고백을 의미있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의 병립이 도올 선생의 의도만큼 석연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거지의 개연성 정도로 보여진다. 우선 TV를 장식하는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현실을 우리 민족이 품고 살 필요는 없지 않는가? 또, 만주 회복을 의미하는 듯한 위와 같은 도식은 식민지 시대에 유효할 지언정 국경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금에 합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도올 선생의 이런 거북한 이야기는 결국 이런 식으로 변형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 만주벌판의 회복이란 민족적인 정체성과 주체성 찾기일 수 밖에 없다. 이때 민족적 정체성이란 국경으로 갈라지는 국가의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정신세계의 깨임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민족적 선각자라는 문제는 깨인 개인들에 의한 리더쉽의 구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 역시 문화적인 부흥, 실존적인 자각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여진다.
그럼 이러한 결론의 귀결로서, 우리 사회의 부흥이나 깨임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야 할 것인가? 아마도 진실 또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이다. 기독교의 이해가 성서의 바른 이해에 달려 있듯이 우리 문화와 개인의 성숙이 고전에 대한 바른 이해에 달려있다고 하면 맞는 말일까? 여하튼 내 생각으로는 바른 이해라는 것은 복잡한 현상의 해체를 통한 근원에의 접근과 관계가 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로고스인지 하느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논지가 뒤섞여서 참 석연치 않은 글이다.
** 배암발 : [기독교 성서의 이해]는 노란색, [요한복음강해]는 검정색이다. 아마도 빛과 어둠의 대비일 것이다. 몽매한 코스모스에 비치는 복음의 밝은 빛,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