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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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뜨거운 논란이 되는 책에 대해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 것인가?
간략한 줄거리 요약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점을 적으면 될 것이다.
구체적 논점이 없이 자신의 입장에 치우친 때이른 판단이 주된 내용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 이 책은 EBS에서 신설한 어학교육 프로그램(www.ebslang.co.kr)의 교재로
개발된 책이다. 따라서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도올 선생의 본지를 더욱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2. 서(intro)에서 우선 강조되는 점은 기독교가 조선후기 남인들의 주체적인
수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는 것이다. 이때 핵심이 되는 인물은 이벽, 이승훈,
권철신과 정양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였다. 즉, 이들 초기 수용자들은
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교리 탐구를 통해
조선이라는 폐쇄된 문명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따라서 우리의 기독교 수용은
주체적, 계몽적, 이성적이었으며 미래지향적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신을 배격하는 성리학자인 이들을 매혹했던 기독교의 힘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대부분 배교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 초기 수용자들의
처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기독교가 급격히 성장한 이유는 조선이 망하면서 성리학이 해체되면서 정신적
공백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에게는 민족해방이나 근대화의 열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민중의 입장에서는 인간 평등사상이 주는 해방감과
더불어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을 시작으로 200년이 넘은 지금, 기독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애환을 담은 우리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3. 도올 선생의 주장 중 또다른 쇼킹한 주장은 구약은 참고문헌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결국 신약에 한정된다
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민족신인 야훼간의 특정한 계약을 적은 것으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민족의 희망을 좌절시킨 역사다.'(37쪽)

다윗과 솔로몬은 사치와 부도덕으로 나라를 망친 질나쁜 왕으로 결코 칭송할만한
인간들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예수를 치사한 다윗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지만 율법에 사로잡힌 유대인이기를
거부하고 사랑의 종교를 세운 사람으로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도올 선생은 마가, 마태, 누가의 3 복음서는 다윗의 후손이자 민족적
구원자로서의 예수에 집착하여 구약과 이적에 속박되어 있는 반면, 요한 복음은
유대의 전통에서 벗어나 헬라이즘의 로고스론을 통해 구약의 속박을 벗어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신약 중에서도 요한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는 것이다. 

4. 이제 본격적인 요한 복음의 강해를 보자.
강해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복음이 이오니아의 에베소에서 AD 100년경에
성립했다고 할때 '말씀'즉, 로고스의 사상적 뿌리는 BC 500년 경 같은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찾을 수가 있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코스모스를 긍정하였으며, 우주의 법칙으로써의 로고스를
끊임없이 변화와 투쟁을 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불이라고 보았다. 

복잡한 내용은 직접 보아야 겠지만 최종결론은 이렇다. "로고스는 법칙으로서
우주에 내재하는 동시에 사유의 법칙으로서 우리 마음에,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이요 빛이었다."
(87쪽)

5.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사상을 긍정하는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 볼때
변화하는 코스모스를 현상계로 머리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계로
나누고 오직 관념만을 중시했던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개탄스러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플라톤을 거쳐 기독교에 반영되는 데 그 결과는
관념적 기독교, 세상과 분리된 상관없는 하느님이다
. "...그렇게 되면
당연히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는, 우주의 투쟁의 긴장 속에 내재하던
로고스로부터, 우주 밖의, 그러니까 시공을 벗어난 초월적인 로고스로 그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이데아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 성격이
완전히 추상되어버린 이성적 실체가 되어버린다."(92쪽)

그렇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인데 도올 선생은 기독교의 역사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코스모스의 긍정과 파르메니데스의 코스모스의 부정이 서로 뒤엉킨 채 진행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헬레니즘의 보편적 토양을 간과한다면 신약이나
요한복음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도올 선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분열과 융합은 요한복음의 끊임없는 주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분열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되고 융합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된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을 읽어나가는 묘미이다
."

6. 나는 이쯤해서 인터넷 강의에서 들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를 적고
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원래 내 리뷰의 의도는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서로 논쟁합시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였다.

사족을 달면, 도올 선생도 연세가 예순이시고 적어도 내 관점으로 봐서는
성의와 열성을 가진 좋은 학자이시다.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동네 강아지
취급하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두 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도올 선생이다.) 여하튼,
구체적인 논점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만이 도올 선생으로 부터 배우려는 사람도,
배척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부질없이 종교와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감정적인 대립하지 말고
"나는 여기까지는 파악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지 않냐? come and see!
Let's talk about it!"이런게 좋지 않나 싶다.   

5.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 마가, 마태, 누가 복음은 예수를 기술하는 방식이
비슷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데 예수는 공관복음 속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1) 시골인 갈릴리 지역에 주로 살았던 목수로 천민신분이었다.(최하층 20%)
2) 갈릴리의 시골, 나사렛의 예수가 소외된 계층에게 이적을 보이며 제자를 끌어모은다.
대중의 인기를 높아져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된후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러나 성전에서 동물을 몰아내고 환전상의 상을 뒤엎는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을 계기로
지배층에게 위험한 자로 미움을 사게되고, 결국 십자가 형을 받았으나 부활, 승천한다.
3) 결국, 예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일직선적인 상승곡선을 그린다.

요한복음은 이와는 다른 혁신적인 복음서이다.
1) 예수는 지상의 출생과 관계없이 로고스의 화신이다.
2) 태초부터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존재이다. 신이며 인간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증언이나 이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3)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직선적인 구도가 없다.
4) 국제도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개방적이고 지적인 존재이다.

6. 끝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인 로고스 기독론적인 요소는 예수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로고스 기독론(영지주의)이라는 이야기의 큰 틀을 미리 내세움으로써
유대민족의 혈통이나 이적의 과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결과, 신화적인 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인 예수가 드러나게 된다.
 

로고스론이라는 신화적 장치가 인간 예수를 드러내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추가 리뷰 ( 5월 25일)****

인터넷 강의가 3단계에 접어들고 [요한복음 강해]를 3번째 읽고 있다. [강해]를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 부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강해]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크게 3군데인데 (1) '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에서 중반 이후의 논리적 연결 (2) 로고스 기독론 (3) 종말론의 현재화 이다. (2)는 철학 및 역사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고 (3) 신학적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므로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1)인데 책을 나름대로 정독했다고 생각하지만 유득공의 [발해고] 부분이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부분이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은 것이 곤혹스럽다. 

또 이 부분을 달리 보면, 블루비니님의 리뷰에서 보듯이 '밥맛없는 민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감정적인 거부감을 덜고 [강해]를 호의적으로 본다면 이 밥맛없는 민족주의 부분이 도올 선생의 전체 논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여하튼 도올 선생의 논지는 조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고 논리상으로도 엉성해서 거부감을 들게 하지만, 거부감을 넘어  저자가 의도한 논지를 확연히 파악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선 이런 부분이 도올 선생의 영감에 의한 원고지 채우기형 글쓰기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영감에 의한 글쓰기는 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실존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힘은 있지만 앞뒤가 모순되기도 하고 논리적인 구성이 엉성해지는 부분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글쓰기 속에 상당한 감정을 담아 길게 적은 부분이 있다면 도올 선생의 의식세계 속에 중요하게 자리잡은 생각이라는 걸 나타내므로 적절한 논리적인 연관을 찾아내어 핵심적인 주장으로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강해]의 처음을 이끄는 '서'부분의 핵심적 주장은 제목 그래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이다. 이승훈 이벽 등에 의해 기독교가 주체적으로 수용되는 역사를 그리다가 도올 선생은 '기독교가 조선 문명의 주축으로 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1) 내부의 동질적 요소 : 풍류지도, 신바람 (2)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 : 인간 평등의 이상 (3) 구원 또는 율법 부정의 실존적 절실성 : 유교문화의 신분주의적이고 의례적인 질곡에서의 해방 (4) 역사적 상황의 동질성 : 식민지 상황의 이스라엘과 조선 이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펼쳐지는데 그들의 역사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고생한 역사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 이전에도 부패한 지배층과 강대국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듯 고생하던 유태인들은 예수 사후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시까지 무려 18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게 된다. 이들은 신과의 계약을 어긴 결과 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결과 고향을 잃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찾았다.  이것을 설명하는 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시련을 통해 참회한다는 것 또는 하느님이 어리석은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시련을 내리시고 충분히 성숙했을 때 다시 해방하신다는 것이다. 시련의 끝은 고향으로의 되돌아옴이다.

조선의 기독교가 팽창하던 시기의 조선은 어떠하였던가? 조선 역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음을 저질렀던가?  이스라엘의 후회스런 역사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어리석은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민족적 고향인 만주 벌판의 포기 : 신라의 삼국통일, 유득공의 [발해고]에서의 통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2) 깨어있는 민족적 선각자의 박해 : 묘청, 최영, 이이, 김덕령, 이순신, 소현세자 등.

굳이 단순화 한다면 만주는 예루살렘이오, 최영이나 이순신은 예수가 될 것이다. 예수를 죽여 1800년을 떠돈 유대인과 최영을 죽여 만주를 잃고 이순신을 죽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은 처지가 비슷하다. 민족의 역사의 고향을 버리고 협소한 한반도에 갇혀살며 넓은 세계로 가자고 선도하는 선지자를 죽인 역사, 그래서 끝내 이민족의 식민지가 된 역사가 우리의 역사이다.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깨인 민족이 되어 우리의 민족적인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런 구구한 이야기를 통해 도올선생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민족의 초기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읽으면서 자기민족의 역사를 반성할 줄 알았고, 그리고 좌절과 패배와 낭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으려 했다는 것이다."(56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다. 절박한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죄악을 반성하고, 나 일신의 편안함이나 세속적 영욕에서 벗어나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공동체로서의 기독교!"(58쪽)

도올 선생의 이런 진지한 고백을 의미있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의 병립이 도올 선생의 의도만큼 석연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거지의 개연성 정도로 보여진다. 우선 TV를 장식하는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현실을 우리 민족이 품고 살 필요는 없지 않는가?  또, 만주 회복을 의미하는 듯한 위와 같은 도식은 식민지 시대에 유효할 지언정 국경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금에 합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도올 선생의 이런 거북한 이야기는 결국 이런 식으로 변형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 만주벌판의 회복이란 민족적인 정체성과 주체성 찾기일 수 밖에 없다. 이때 민족적 정체성이란 국경으로 갈라지는 국가의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정신세계의 깨임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민족적 선각자라는 문제는 깨인 개인들에 의한 리더쉽의 구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 역시 문화적인 부흥, 실존적인 자각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여진다.

그럼 이러한 결론의 귀결로서, 우리 사회의 부흥이나 깨임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야 할 것인가? 아마도 진실 또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이다. 기독교의 이해가 성서의 바른 이해에 달려 있듯이 우리 문화와 개인의 성숙이 고전에 대한 바른 이해에 달려있다고 하면 맞는 말일까? 여하튼 내 생각으로는 바른 이해라는 것은 복잡한 현상의 해체를 통한 근원에의 접근과 관계가 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로고스인지 하느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논지가 뒤섞여서 참 석연치 않은 글이다.  

** 배암발 : [기독교 성서의 이해]는 노란색, [요한복음강해]는 검정색이다. 아마도 빛과 어둠의 대비일 것이다. 몽매한 코스모스에 비치는 복음의 밝은 빛,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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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7-03-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페이퍼에 있는 나귀님의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8) : 도올과 허혁'은 내용도 재미있고 읽을만 합니다. 은혜 공동체 강연과 나귀님의 페이퍼가 ‚I찮은 보조 자료가 되니까 [요한 복음 강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하늘연못 2007-03-07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마이페이퍼를 써도 등록이 안되므로 은혜 공동체 강연 중에서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을 보는 관점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이하 발췌한 부분)

*** 이 강연 전문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발췌문을 게재하는 이유는 도올 선생 옹호의 뜻이 아니라 [요한복음 강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실한 이해가 있고나서야 옹호든 반박이든 가능합니다. 이 강연이 저에게 중요해보이는 이유는, 강연이 두 책이 탈고된 직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도올 선생이 정말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핵심을 밝히고 있지 않겠느냐는 점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교와 기독교가 다르다.
예수교는 정말로 3년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3년이 진짜 예수교다.
그 다음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사도들의 모임을 ‘기독교’라고 부른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믿음의 종교다.

예수교와 기독교는 엄밀하게 다르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예수교적인 기독교다. 그런데 313년 로마황제에게 공인 받은 뒤엔 황제교적 기독교가 됐다. 나는 그것을 못 믿겠다. 그 이후 기독교는 문제가 있다. 예수교장로회이면 예수교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자.

요한복음 17장에 21절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믿게 한 것을 아옵소서”라고 했다.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다. 예수가 만약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열매가 여러분이다. 나무 전체가 교회라는 영적인 생명 공동체다.
내 안에 거하라.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기독교가 이런 것을 상실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할 땐 내 안에서 거하라. 동시에 상호적인 것이다. 나도 너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가 하나님 속에 거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러한 거함에 의해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서 거한다.

기독교는 요한복음 메시지를 밀고 들어가면 불교도 설 자리가 없이 과격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이런 요한복음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런 속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데 하나님이 뭐하러 가치가 있느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인간의 관계를 떠난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민족과의 계약 관계에서만 하나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줬다는 것 때문에 야훼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 예수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게 ‘항상 하나님과 내가 서로 하나된 것처럼 그의 생명에 매달린 열매, 너희들도 서로 하나가 되라’

하늘연못 2007-03-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음은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신대 명예교수이신 김경재 선생의 인터뷰기사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분이어서 그런지 주장도 유연하고 도올 선생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시네요. 참고바랍니다.****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하늘연못 2007-05-2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의 신학자들과의 대토론회도 감동적이었지만 3월의 개신교 목사이자 교회사학 박사인 이국헌 선생과의 서신 논쟁이 더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신문기사와 이국헌 선생의 마지막 편지를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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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이국헌 목사와 공개신학 논쟁
이국헌 목사 “도올 지적 아픈 채찍…그래도 종교는 초월적 영역 설명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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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21 선교센터’ 소장이자 기독교회사 박사인 이국헌 목사가 개신교 온오프라인 신문인 〈뉴스앤조이〉에 지난 9일과 12일 띄운 글을 통해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자, 도올이 15일 “사람들이 저서인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도 읽지 않고 편견만을 펴는 반면 시간을 내 깊게 읽고 사회적 담론을 창출해내는 데 감동을 받았다”며 답글을 올린 것이다.

이 목사는 ‘도올에게 기독교 종말론을 묻다’라는 첫 글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상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틀을 제공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학문적 활동은 기독교 신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채찍이 되고 있다”며 “그러나 그 사상이 정말로 기독교 사상을 보편적 진리의 틀로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한 것은 어느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며 조목조목 반격했다. 이 목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3차원의 시공 속에서 존재의 한계에 부딪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저들에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지 현재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희망이 되며, 구원의 진리가 되겠느냐”며 “죽음은 불가항력적이고 초월적 경험이기에 종교는 경험 너머까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또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라는 두 번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시며(니케아 신경), 따라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신앙 고백에 의거해 기독교 신학은 논쟁과 정립을 거듭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고백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진리를 벗어난 잘못된 신앙 고백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역사적 관점에선 그런 지적은 어느 정도는 수용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런 신앙 고백적 정식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기독교 신학적 본질이 있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이어 “기독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사람은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선생님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사상의 한 큰 흐름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 없고,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며 “그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흘러온 사상적 지류 중 하나로, 하나의 옵션인데, 그것이 절대적 대안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도올은 답글에서 “근본적으로 목사님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종말론과 묵시론을 이원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순수하게 방편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일반적 성향이나, 한국인의 영성적 내면에 지나치게 묵시론적 기대가 강렬하게, 미신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광정해야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도올은 또 “초대교회운동사에서도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없이는 공동체 형성 자체가 불가능했다”며 “그것을 순수하게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자각과 미지의 미래에 대한 건강하고 밝은 희망으로서 해석한다면 저는 단지 그 희망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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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헌 목사가 김용옥 교수에게 보낸 서신
2007년 03월 16일 (금) 10: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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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도올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뉴스앤조이>를 통해서 제기한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신문의 기사로는 적지 않는 내용이었고, 매우 축약적인 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단숨에 이해하셔서 선생님의 혜안과 그 이해를 바탕으로 기꺼이 답신을 보내주신 격조 높은 인격에 우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께서 기독교계를 향해서 담론을 요구하신 것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한 진실한 제안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런 진실담론들을 통해서 발전되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뜻을 새삼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교회에 중요한 신학적 성찰의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또 한 번 공감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아우르고 있는 기독교의 묵시론적 종말론이 기독교 희망론으로서 거듭났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기독교 종말론의 한 유형이 된다는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특별히 그 희망의 신학이 현재적 삶의 혁명과 연관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미래 희망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기독교 종말론이 단지 미래의 카타스트로피적 종말만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후기 유대 문학서에서 발전했던 묵시론적 종말론의 폐해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 폐해가 결국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비본질적 종교운동을 낳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은 종말론의 현재적 의미를 함께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론과는 신학적 장르로서 크게 연관이 없을 것 같기도 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실제로는 기독교 종말론의 의미를 매우 구체화시켜주고 역사화시켜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정치신학화 되지 않는 범위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및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현재에 기독교인들이 삶 속에서, 예수를 믿는 실존적 신앙적 결단 속에서, 그리고 미래에 예수의 파루시아를 통해서 완성되는 나라에서, 포괄적으로 실현되는 나라 즉 과거·현재·미래라는 모든 역사적 지평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종말론은 과거와 미래의 이중적 개념과 더불어 현재적 종말론의 의미를 모두 강조할 때 가장 구체화된 종말론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 종말론적 희망과 현재 실존적 결단에 의한 현재적 종말론이 공존할 수 있다는 선생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특별히 선생님께서는 이런 이중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묵시론과 종말론의 신학적 긴장감이 있음을 이해하시면서도, 기독교 종말론의 실존적 지평,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 신학적 중심을 잡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말씀에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인식의 불균형과 그로 인한 교회적 폐해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신학적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거의 전무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선생님의 의지가 너무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한국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잘못된 묵시론적 기대와 미신적 종말운동에 대한 신학적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묵시론과 종말론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현재적 종말론의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는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그 신학적 지도가 가능하겠기에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했다는 선생님의 의도를 잘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학자로서 저희 역시 미래적 종말론에 나타난 파루시아와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잘 정리하고 다듬어서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 나라의 미래를 바르게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작은 영역에서 영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의미 있는 대화를 통해 더 큰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진실담론을 위한 개인적 헌신을 재 다짐하면서, 앞으로 새로운 관계로 지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독교의 진리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틀로 만드는 일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며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겠습니다.

2007년 3월 15일
이국헌 드림

하늘연못 2007-05-2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은 5월 11일의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있었던 도올 선생과 신학자들과의 대토론회 내용********************
"21세기에는 믿음의 강요보다 이해가 필요하다"
도올 김경재·김광식·김은규·김준우 교수와 공개토론

도올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한국조직신학회(회장 이정배)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에 나섰다. 한국조직신학회는 논란이 되고 있는 도올의 주장에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다며, 이제는 이를 인정하고 논의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도올의 '불편한 진실'에 공감하고, 오해를 풀면서도 그의 성서이해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지적했다.

5월 11일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중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7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계단이나 바닥에 앉아 토론회를 경청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인사한 유동식 전 교수(연세대)는 "평생 신학회를 다녔지만 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신학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 봤다. 진지한 토의를 통해 우리 신학과 민족에 토대를 쌓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날 토론회는 △ 구약무용론을 주장한 도올 선생의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반론 △ 도올 식의 기독교 성서 이해에 대하여(성경의 정경화 과정에 대한 이해)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신학적(탈구약적) 의중의 편파성 여부 △아타나시우스 대신 아리우스 주의에서 기독교를 재구성하는 도올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 등의 주제를 다뤘다. 토론회에는 김은규 교수(성공회대)·김경재 교수(한신대)·김광식 교수(연세대)·김준우(감신대)가 참가했다. 토론회의 사회는 이정배 교수(감신대)가 맡았으며, 토론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도올이 응답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구약 무용론에 대하여
김은규 : 교계에서 회자되는 구약폐기론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올이 의도하고 있는 것을 봐야한다. 그는 지배이념과 권위가 된 신학을 거부하고 성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신학계의 교리주의와 배타성·폐쇄성을 꼬집고 있다. 그러나 토라·오경·십계명에 들어 있는 법에는 사회안전망과 정의실현 등 창조와 해방의 의식이 담겨 있고, 구약의 사상에는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이 담겨 있다. 올바른 사상과 지혜가 담긴 구약은 신약과 균형을 맞춰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김준우 : 율법이 아닌 율법주의를 거부했고, 구약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니 오해가 풀렸다. 그렇다면 책 제목을 '기독교 성서의 이해'에서 '신약성서의 이해'로 바꿀 의향이 있는가? 또 책 속에 율법의 부정이라는 구절을 율법주의의 부정이라고 수정을 할 것인가?

도올 : 포괄적이고 정확한 지적이다.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하겠다.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구약을 뺐다는 것은 내가 히브리어를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자적 양심에서 볼때 원전을 다루지 않고 맘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구약의 이해가 모자랄 수 있다. 히브리어도 공부할 용의가 있다.

다만 굽힐 수 없는 주장도 있다. 신약에 없는 십일조를 신자들에게 왜 강요하냐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 조직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나도 인정하겠다. 그런데 하나님말씀이라고 하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구절을 설교의 근거로 활용하면 좋은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하나님 말씀처럼 말한다. 이런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

김경재 : 동양의 유교·불교·노장사상의 터 위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이것이 앞선 사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기독교가 어떤 것이기에 한국에 공헌할 것으로 판단했는가?

도올 : 우리 민족은 구한말 정신사적 유산이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다. 특히 우리는 백인 선교사의 선교를 통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서 받아들였다. 특히 성서가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유교의 율법주의의 해방 논리를 제공해 정착했다. 오늘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김광식 : 두 권의 책을 통해 신학자들이 들춰보지 않을 것을 봐줘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글의 내용에서 현재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전승이 근원으로부터 동떨어져서 돌아가야 하며, 비본래적인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27권의 신약 중 요한복음 1장 1절만 가지고 모든 주장을 펼친다. 조직신학은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창세기 1장 1절만 가지고도 독재 이데올로기와 해방 이데올로기를 만들 수 있다. 조직신학 교리를 긍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는 없는가?

도올 : 앞으로 조직신학을 더 공부하겠다. 훌륭한 조직신학을 읽지 못해서 교리의 세계에 대한 깊이를 갖지 못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 글은 해체나 환원의 단순한 방법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나는 세계적인 고전학자다. 내가 닦은 엄밀한 훈련이 있다. 핵심적인 의제를 사회에 던지기 위해 전략을 쓴 것이다.

신약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올 식의 성서이해)

김광식 :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신학자들의 대답은 다 다르다. 선생은 두 권의 책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말하지만 내용을 보면 정치적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보편적인 가치가 구현된 이상적인 시민사회 정신의 구현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도올 선생의 복음의 이해다. 선생이 주장하는 것은 짝퉁이고, 동의하지 않은 부분을 싹둑 자른 싹둑복음이다. 총체적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도올 선생은 역사적 예수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

도올 : 나는 복음을 시민사회 정신을 등으로 고집하고 있지 않다. 지금 나를 싹둑복음이라는 흉악한 말로 규정하고 있다. 비판하려면 원로답게 정당하게 비판해라.

김준우 : 성서자체와 복음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과 등식화 될 수 없다는 지적. 성경 자체가 오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신학자들이 하기에는 위험한 주장인데 그 주장을 하신 것은 찬동한다. 그러나 선생은 책에서 민족적 기개를 문제 삼고, 역사의식을 문제 삼았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가 없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명도 개인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이며, 비사회적인 각도로만 접근했다.

김은규 : 성서가 정경이 되기 전에는 구약시대 공동체 시대에 맞게 내려오다가 제국과 교황의 의도가 들어가 정경이 되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정경화 과정이 있어서 서민들이 기독교를 알 수 있고, 기독교에 적을 둘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올 : 어느정도는 민주적 과정이었다고 본다. 누가 독단적으로 정경을 결정했다고 초대교회 역사를 단순화 할 생각은 없다. 성서의 문헌을 보면 드라마가 많다.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면 해결이 안 될 문제가 많다. 나처럼 상식 있는 사람을 기독교가 죽이려고 하는데 나정도만 수용해도 굉장한 것이다.

어머니에게 신앙을 받고 대한민국 기독교가 잘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싹둑복음을 말했다. 4복음서는 탁월하다. 나는 복음서를 유치한 영지복음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4복음서는 성서편찬자의 최후의 양심이라고 본다. 내용이 서로가 다름에도 예수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줘서 토론이 가능해졌다. 신학자가 아닌 내가 하나님나라를 말했을때 예수의 실존적 의미나 토론이 사라질 위험이 있어서 언급을 피했다.

김광식 : 싹둑복음은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것뿐이다. 나는 단지 선생이 성경을 너그러운 눈으로 보셨으면 한다. 성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도를 찾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본분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설교자는 교인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게 해야 하지 않나?"

도올 : 오해는 풀렸다. 저도 신앙인으로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적합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도 내 책을 그대로 설교에 쓰라고 하지 않는다. 김 교수님은 칸트에서 시작해서 이제 와서 자유주의 신앙에 머물렀으며, 칼바르트 같은 종합성도 없다고 했다.

질문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교수님과 같은 그런 태도가 교회를 망쳤다고 본다. 교수님의 신학체계가 너무 나이브하다. 한국교회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교회 건물이나 짓고 공동화되어가고 있다. 믿음을 가진 공동체주의는 충분하다. 아무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그런 공동체는 유지가 되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신앙을 강요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해시켜야 한다. 과학적 세계관에 노출되고, 억압의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이해보다 믿음을 추구하면 목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탈구약적 편파성에 대하여

김준우 : 선생의 해석에는 깨달음이 강조 된다. 기독교에서 부족했던 각해 차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맥락자체가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예수 공동체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 것이며,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말씀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지혜의 교사 각도에서 해석할 때 사회적 약자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말씀이 육신으로 내려온 (미륵하생과 같은) 부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

김경재 : 한국기독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신이 33년간 인간으로 둔갑해 살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는 수준으로 로고스를 이해한다. 고대의 비슷한 신화가 많은데 그것을 반복하려고 요한복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예수가 로고스의 화육이라면 나도 원론적으로 로고스의 화육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로고스의 화육이지만 나머지는 안 된다고 말하면 거리감을 느낀다. 성서는 너가 곧 로고스의 화육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왜 요한복음을 좋아하는가?

도올 : 오늘 이 자리는 배우러 나온 곳이다. 김준우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은 앞으로 많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김경재 교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을 좋아하는 이유'는 추상적 해석의 자유가 있어서 그렇다. 나도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와 인간은 차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겸손해져야 할 인간이 건방져지고,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양심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 된다. 불교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신학 하는 사람들이 로고스론을 안 읽는다. 볼트만 같은 책을 나만큼도 안 읽었다.

아리우스주의를 선호했던 탈 전통적 입장에 대한 평가

김경재 : 논쟁의 결과로 하나는 정통, 하나는 이단이 된 기독교의 비극이었다. 둘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진리의 한 측면이지 하나는 정통이고,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의도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김광식 : 누구는 틀리고 누구는 옳은 것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권력으로 관철시켰다지만 아리우스도 역시 그랬다. 똑같다. 나는 삼위일체 기독론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 저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옳고 그른 것은 하나님이 밝혀주실 것이다. 제 입장에서 아리우스를 택하지 않고 아타나시우스를 택했고, 약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다. 다르게 믿는 신앙을 참아주고 견뎌 내고 아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인이고 목사다보니 부처에게 빌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도올 : 이 논쟁이 현재에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리우스에 대한 논의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논의가 유치하다고 본다.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신앙의 본질적인 얘기를 어떻게 하나. 아리우스의 입장도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 정통이고 이단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폭넓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국내 신학자들이 사해문서는 열렬히 연구하면서 나그함마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 중 몇 개는 4복음서와 겹치는 것이 30%고, 80%이상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서를 이해하는 문서가 될 것이다. 이런 것에 신학도들이 관심을 더 가졌으면 한다.

하늘연못 2007-05-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도올 선생과 토론을 벌인 한국 조직신학회는 한국의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간판급의 학회이다. 참고로 조직신학(systemetic theology)은 원래 성서 무오류설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의 전체를 systemetic하게 이론화하려는 학문적 시도이다. 결국 가장 거시적으로 기독교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를 본 이정배 회장이 학회의 이름으로 도올선생의 두 저작에 대해 지적한 부분은 매우 관심이 간다. (이하는 한겨레 신문의 조연현 기자의 정리 내용) *****

“예수에 대한 뭇 해석에 열려진 태도 필요”
‘도올 성서 이해‘ 토론회를 열면서(한국 조직신학 회장 이정배)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오늘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험난한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도올 선생과의 대화자체를 불필요하게 생각했고 이런 자리를 계획한 저희 조직신학회에 차가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토론자를 모시는 일에서부터 장소사용 문제에 이르기 까지 쉬운 일은 없었습니다. 평소 반기독교적 사상가로 호가 나있던 도올 선생께서 신학을 말하고 성서를 가르치는 일 자체가 싫었던 것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도 금번 출간된 두 책,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를 한 동양 철학자의 어설픈 작품으로 폄하했고 심지어 전통 기독교 해석을 뒤엎는 이단자로 배척한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음은 있되 대답 없는, 역으로 박제화된 답만 있는 교회현실


그러나 본 토론회가 신문 기사화된며칠간 토론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여준 백여 명의 기독교평신도들의 전화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는 도올 선생이 내건 신학적 화두에 흑백논리로 접근한 기성 교회의 시각에 평신도들이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물음은 있되 대답이 없는, 역으로 박제화된 답이 있어 물음 자체를 허락 않는 교회현실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금번 토론회를 위해 물심양면의 격려를 준 목회자들이 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진실이 담겨있다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진실 담겨있다면 들어야


아울러 도올 선생의 기독교 및 성서이해의 한계와 문제점을 밝혀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전화를 준 뭇 평신도분들과 지적 성실성을 지닌 목회자분들의 뜻으로 본 토론회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믿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공동체 토론을 원했던 도올 선생과 편치 않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토론자로 응해주신 두분 원로 조직신학자이신 김광식, 김경재 박사님 그리고 역사적 예수 전문 번역가인 김준우 박사님 그리고 토론자를 청하기 가장 힘들었던 분야인 구약성서학자 김은규 교수님들께도 머리숙여 고마운 마음을 표합니다.


▶지금까지의 논쟁점


한겨레 조연현 종교담담 전문기자 역할 커


주지하듯 EBS 방송을 통해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강해”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그 서언격으로 집필된 “기독교성서의 이해”가 출판되면서 신문지상과 온라인상에는 도올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의견표명이 줄잇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영성가를 소개하고 있는 한겨레 종교담당 전문기자인 조연현 선생의 역할이 컸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훼손 음모론’과 ‘국외자의 지적 오만’ 반론


사회자로서 본인은 지금까지의 논쟁점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 토론회의 입장을 천명하고자 합니다. 크게보아 종래의 비판은 목회적 차원의 감정적 비판과 이단으로 정죄한 신학적 비판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화 없는 일방적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두 입장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목회적 차원에서 교회를 훼손하는 음모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정통적 신앙노선을 손상시켜 신앙인을 더욱 혼동으로 치닫게 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의 지적 오만의 문제 역시 도올 선생에게 집중된 비판이었습니다. 이천년 지속된 전문 신학의 영역을 국외자가 함부로 칩입했다는 것이지요.


구약성서 부정적 이해가 교회 자극 기폭제


신학적 차원의 비판은 도올의 기독교 이해에 대한 이단 정죄로 이어져 있습니다. 교회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는 학자였다면 출교처분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전통을 뒤짚어 본 도올의 시각은 관용을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로부터도 상당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구약성서의 부정적 이해가 기독교교회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신구약을 예언과 성취의 구도로 읽는 기존시각과 복음과 믿음을 율법적으로 해석해온 목회적 현실에서 구약무용론이 마르시오니즘과 동일시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편협함 넘어 이단으로 평가


예언자적 시각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습니다. 이런 비판은 요한복음을 헬라적으로 이해하는 도올의 입장과 잇대어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육화된 로고스 예수를 인간 모두를 신으로 부르는 위대한 영성의 시발점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는 인간과 신의 하나 됨을 목적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도올 선생은 이것을 영지주의와 싸우면서도 그와 닮아간 요한복음의 본질로 여기나 성서학자들은 이를 구약성서로부터 기독교가 탈맥락화된 결과라고 거부합니다. 무엇보다 정경화 과정 자체에 대한 도올 선생의 비판적 이해는 신학자만의 학문세계를 세간에 불편한 진실로서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경들과 최근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속에서 초기 기독교 해석의 다양한 모습(열려진 정경)을 보며 이후 폐쇄적 정경화 과정을 로마의 정치적 맥락과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정통 기독교 신학의 시원으로 알려진 니케아 칼케돈 신조를 아리우스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뒤집는 도올선생의 입장은 요한복음강해와 맥을 같이하나 정통 교리신학자들의 눈에 편협함을 넘어 이단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대한 강한 긍정도 도마 올라


하지만 선생은 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을 상당히 수용하면서도 역사적 예수 상에 만족치 않고 신앙의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정통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성서 자체가 역사적 문서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서슴치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중도하차된 것에 대한 학자적 불만도 적지 않게 토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다른 차원의 비판입니다 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영지주의 세계관에 대한 강한 긍정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토론에 들어가며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간략하게나마 회자되고 있는 논쟁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세간의 논의는 이단 시비로까지 확장되어 선한 의도로 본 논쟁에 참여하고픈 사람들의 의지를 묶어 놓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균형잡힌 시각들이 생겨나고 있긴 하나 여전히 부족한 실상입니다. 이에 본 토론회는 도올 선생이 제시한 ‘불편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의도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먼저는 본 토론회의 근본 의도를 말씀드리고 이어 토론회의 진행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도올 선생의 진리탐구 진정성과 진면목 인정


토론자들의 준비모임에서 의견을 나눴듯이 우리는 요한복음 강해를 대중적 매체를 통해 전달한 도올 선생의 수고와 진정성을 인정합니다. 물론 신앙적 동기에서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서구의 텍스트 중에서 성서, 그중에서 요한복음을 택하여 그 의미와 주요성을 풀어낸 것은 분명 기독교를 흔들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탐구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책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물론 그와 관계하려는 실존적 계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신대학교 1학년 시절 청년부 헌신예배 설교자로 기록된 옛 주보를 지금껏 간직한 사실과 그것을 책에 삽입한 것을 보면서 뭇 사상을 넘나들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올 지점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한신대 1학년 시절 헌신예배 설교자 기록 주보 간직


물론 그가 돌아온다면 오늘의 가시적 기독교는 아니겠지요. 요한적으로 이해된 기독교, 그것은 ‘플레타르키아(민본)’의 종교, 곧 동아시아적으로 이해된 신앙의 그리스도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주제는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 과제로 이어져도 좋을 듯싶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본 책속에서 저자 가슴속에 남아있는 엄마, 그가 지닌 신앙적 에토스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말걸음은 폄하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신학 학문세계와 목회 현장 괴리 너무 큰 것은 불행


또한 두 책속에 언급된 무수한 신학적 논의들은 교회 현장에서는 낯선 이론이겠으나 신학자들 세계 안에서는 한번쯤 격렬하게 토의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의 학문 세계와 목회현장간의 괴리가 너무 큰 것은 서로를 위해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면서도 교회의 방향을 이끌 책임이 있는 학문입니다. 물론 신학자들 역시도 저마다 자신의 관점을 갖고 특정 입장을 대변하기에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구라도 비판과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홀로 완전한 사상과 이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도올 선생의 편파적 자료사용 내지 특정 관점의 과다 부각 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철학·철학·동서양 아우르는 기독교 이해 ‘추종 불허’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성서 무오설과 경전 절대주의에 입각한 한국 교회 및 목회적 현실에 대한 선생의 비판은 신학자가 해야 될 몫이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는 여전히 도올 선생의 신학적 아마츄어리즘에 대해 조소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성서와 역사 그리고 철학 나아가 동서양을 아우르며 기독교를 이해하는 도올 선생의 사상적 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도 눈에 띠지 않습니다. 도올 선생과 같이 동서사상과 언어에 능통한 평신도 기독교 사상가가 나온 것을 너무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의 생각과 사상 역시 일리(一理)를 지녔다고 볼 만한 아량과 관용은 한국 교회현실에서 아직 요원한 일인지요?


그 때문에 교회가 휘둘린다면 되레 우리 교회 바탕 되물어야


제 신학적 이론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나 이단 시비는 성숙한 기독교의 모습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 없이는 신학이 불가능하지만 예수에 대한 뭇 해석에 대해서는 열려진 태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 그가 던진 ‘불편한 진실’은 논의될 주제이지 피해 갈 주제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한국 교회가 휘둘린다면 오히려 우리 교회가 반석위에 터 닦여진 것인가를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기독교 신학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조직신학자들의 모임에서 신학 대토론회가 논의되고 준비되어 오늘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을 조직신학회 회장으로서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뭘 토론할까


이런 의도 하에 본 토론회는 다음의 주제를 따라 적당한 시간을 할당하여 3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신구약성서 관계에 대한 차이나 입장 조율


첫째는 도올 선생으로부터 두 책을 쓰신 동기와 계기, 신학적 문제의식,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말씀을 청해 듣겠습니다. 이 글과 함께 자료집에 담겨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네 분의 토론자 분들을 중심으로 신구약성서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통해 도올 선생과의 차이 내지는 입장의 조율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구약 무용론을 주장한 도올 선생의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반론이 제시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부정적 시각 검토


셋째로는 신약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킬 것입니다. 도올 식의 기독교 성서 이해에 대한 토론자들의 찬반 토론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이에 더하여 정경화 과정에 대한 이해 역시 비판적 대화의 주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넷째로 성서중에서 요한복음을 중시한 도올 선생의 의도를 듣고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신학적(탈구약적) 의중의 편파성 여부를 집중 토론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영지주의와의 관계 역시 중요한 토론거리이며 로고스 기독론의 빛에서 동양적 신학,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까지도 생각해 보고 싶은 자리입니다. 아울러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도올 선생의 부정적 시각 역시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는 탈정통적 입장 평가


마지막으로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타나시우스 대신 아리우스 주의를 선호하며 그 빛에서 기독교를 재구성하는 도올 선생의 입장에 대한 토론자들의 평가를 듣고자 합니다.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적 중요성을 인정하되 로고스 기독론에 근거 이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는 도올 선생의 탈정통적 입장에 대한 긍/부정적 평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신(靈)중심적 기독교 신학이 말해지는 지금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의 의미를 현대적 차원에서 재검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끝으로 취재하는 언론에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의 토론회를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여 흥미위주로 기사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 조직신학회가 한국 교회를 향한 도올 선생의 진정성을 보았기에 그리고 선생께서 참된 토론의 장을 원하였기에 원로 신학자들이 기꺼이 참여하신 장인 것을 숙지하셔서 오늘의 토론회가 한국 교회 앞날에 유익함이 되는 자리였음을 널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멀리 가까이에서 이런 바램을 갖고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계획된 주제 모두가 정해진 시간 내 토론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본 모임을 진행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정배 교수(사회·한국 조직신학회 회장)




2011-04-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페이지 즐겨찾기 해두고 요한복음강해 읽을 때 두고두고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