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dts 1disc) - [할인행사]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데니스 퀘이드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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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난 영화를 고른다면 어떤 점이 중요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볼거리가 풍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로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드라마가 흥미진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번째로 재난이란게 결국은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숙명같은 거란 걸 생각해보면 삶과 죽음을 돌이켜 보게 되는 성찰의 의미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1) 볼거리 : 빙산이 녹아 해류가 바뀌면서 엄청난 눈보라가 전세계를 강타하는 모습을 멋지게 담아내었습니다. 새들이 떼지어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이동하는 모습, 호박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모습, 토네이도로 자동차들이 신문지처럼 날리는 모습, 해일이 뉴욕을 강타하는 모습... 이 영화는 엄청난 규모의 재난을 실감나게 잘 담아 놓았습니다. 재난 영화로는 최고의 볼거리를 가진 영화입니다.

2) 드라마 : 이 영화의 기본은 일에 치어 사느라 가족을 돌볼수 없었던 아버지가 눈보라에 갇힌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들 샘은 뉴욕에서 열린 전국고등학생 퀴즈대회에 친구들과 함께 참가합니다. 퀴즈에는 관심이 없지만 좋아하는 로라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간절합니다. 그런데 퀴즈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해일과 눈보라로 도서관에 갇혀버리고 말지요. 이러 저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두 남녀는 사랑을 키워갑니다. 아들을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찾아오는 아버지와,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사랑을 일궈가며 아버지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아들!

엄청난 재난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친구가 지적하자 아들 샘은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꼭 오실거야."라고 답하죠. 반면 아들을 구하러 오는 아버지는 수십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친구까지 희생시켜가며 뉴욕에 다다릅니다. 자신의 혈육이 남보다는 훨씬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경제적이진 않지만 두 부자의 선택이 보여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서로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무릎쓸 수 있다는 도덕성이겠죠.

따라서 소설책이라기 보다는 도덕 교과서에 가까운 영화가 이 영화입니다. 드라마는 조금 떨어집니다.

3) 되돌아봄 : 두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무척 종교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아들을 찾기위해 눈보라를 해맵니다. 고립된 아들은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가집니다. 헌신과 믿음의 근거를 단지 부자간의 혈연관계로 볼수 있을까요? 혈연관계에 기독교적인 구원론이 겹쳐졌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아들의 외침에도 굳이 도서관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다 얼어죽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를 비웃던 이웃들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눈보라 속에 파묻히고 말았던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추위와 싸우는 와중에 도서관의 책을 태우는 장면은 인상 깊습니다. 책이 주는 정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책을 태우면서 나오는 열로 생명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책을 태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퍽 근사한 상징인 거 같습니다. 샘의 친구 로라는 이렇게 모든 지식이란게 쓸모없는 때가 닥쳐오는데 앞만 보며 달려왔던 자신을 후회합니다. 성찰로 깊어지지 않는 제국주의적 지식이란 얼마나 헛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구텐베르크 인쇄본 성경을 끝까지 지키는 서사의 이유도 걸작입니다.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야. 하지만 이 책은 인쇄술을 통해 이성의 시대를 열었어. 우리 문명이라는 것도 이 책에서 시작된거라구."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미국 전역이 얼어붙으면서 미국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세계 최대강국의 자존심으로 타 국민을 무시했던 그들이 영화 속에서 나마 겸손을 말하는 모습은 멋졌습니다. 반면 총을 맞아가면서도 오늘도 국경을 넘고 있을 멕시코 민중에게 미국이란 무엇이며, 현존하는 재앙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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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쉬즘 - 마광수 아포리즘
마광수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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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선생님은 외설 작가로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셨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한다. 외설 잡지 [허슬러]의 사장 래리 프린트가 떠오른다. 그는 휠체어에서 소리쳤다. "전 쓰레기같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미국이라면 저를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저 같은 놈이 대접을 받을 때만이 미국에 있는 어떤 불우한 처지의 인간이라도 자기 말 하면서 떳떳하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멀쩡하게 잘 사는 것이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잘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그런 의도의 말이었던 것 같다.)

마광수 선생님은 소설인 [즐거운 사라]때문에 감옥엘 갔다. 마 선생님은 래리 프린트보다는 훨씬 윤리적이고 고상한 분인데 말이다. 원조교제를 밥먹듯하는 특권층은 대로를 활보하는데 자신의 욕망과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끌려갔다. 이런게 민주주의일까? 그때가 1992년이니 87년 6월을 지나 진정한 시민사회의 도래를 자축하던 때였다. 문화적 편협성은 정치의 후진성보다 더 단단한 것인가?

그럼 이쯤해서 마광수 선생님을 만났다 치고 물어보자. 선생님, 그 놈의 야한 정신이라는 게 뭡니까?

"나는 계속 '야한 정신'을 주장해왔다. 야한 정신이란, '정신보다는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국수주의보다는 세계적인 보편성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질서보다는 자유에, 관념보다는 감성에, 명분보다는 실리에, 획일적 교조주의보다는 자유분망한 다원주의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을 말한다."(13쪽)

"야한 것은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것이다. '야하다'를 나는 '동물적 본능에 정직하다'로 정의한다."(19쪽)

그러면 야한 정신에 의해 입각한 [즐거운 사라]사태를 본인은 어떻게 보십니까?

"소설 [즐거운 사라](1992)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외설 작가 구속'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을 당했다. 권력과 법의 횡포로 인해 금쪽같은 40대를 우울증으로 보내야 했다."(13쪽)

"[즐거운 사라]의 '사라'는 1992년에 혼전 순결의 자진 파괴, 동성애, 카섹스, 오랄섹스, 비디오 섹스(?), 교수와의 정사, 트리플 섹스 등의 이유로 걸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싱겁디싱거운 것들이다."(22쪽)

"[즐거운 사라] 재판 때 검찰측 감정인으로 나온 서강대 이태동 교수는 [즐거운 사라]의 '사라'가 끝까지 반성(자신의 '프리 섹스'에 대한)을 안 한다고 펄펄 뛰고 있다.....[즐거운 사라]의 '사라'는 마지막 대목에서 전혀 반성하거나 파멸하지 않는다. 그녀의 프리섹스가 계속 '즐겁다'. 그래서 제목이 [즐거운 사라]이다."(18쪽) 

"내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것은 '통념'에 대한 저항이 될 것이다. '저항'이란 말이 너무 상투적으로 들린다면, 그것을 '반란'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바꿔놓아도 좋다. 하지만 내가 한 '반란'은 쿠데타적 성격을 가진 폭력적 반란이 아니라, 문학을 통한 '즐거운 반란'이었다. 내가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 제목을 만들어낸 것도 '즐거운'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이나 진한 사랑 얘기만 나오면 모두 우울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끝내며 작가의 '음란성'을 변명하는 게 나는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즐겁게' 야하고, '즐겁게' 통념에 반항하는 '즐거운' 여자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47쪽)

이쯤해서 이렇게 영민하고 합리적이신 마광수 선생님께서 성욕과 섹스를 중시 여기시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성욕이 왜 그렇게 중요한겁니까?

"참된 민주주의가 자유와 다원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인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성적 자유는 더 이상 그저 동물적이고 시시한 욕구 충족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대의 배꼽 아래가 원하는 것을 부정하지 말라. 그것이 곧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촉매제로 발화할 것이니, 그대의 성욕이야말로 참된 정치의 원동력이 되는 게 아니냐!"(27쪽)

"관능적 쾌락을 철저히 배격했던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비겁한 병영국가, 후세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하잘것 없는 사회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유의 억압과 개성의 말살은 권위주의적 독재권력에 의해서만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도덕문화가 억압적일 때도 자유는 질식되고 만다. 정치투쟁이 격화되고 관념 우월주의가 팽배할 때 '인성의 황폐' '인권 경시' '개성 억압'의 풍토가 생겨나는 데, 이럴 때 유미적 쾌락주의는 근본적 해열제 구실을 해줄 수 있다."(29쪽) 

*** 끝으로 이 글의 끝을 장식하는 멋진 글귀를 찾아냈다. 그리고 부탁하건대, 지금까지의 인터뷰에 공감하셨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아주 경쾌하고 재미있는 글이다.

"나는 섹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핥고 빤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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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6-11-13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므핫. 마지막 문구가 정말 압권입니다. 이거 보고 싶군요. 추천.

하늘연못 2006-11-24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과 김용옥](강준만 저)을 보니 204쪽에 마광수 선생님의 인터뷰 내용이 나오네요. 그 중 두 가지를 참고로 인용합니다. 질문으로 하면 선생님은 소설을 왜 그렇게 상스럽게 쓰셨습니까? 정도 되겠습니다.
(1) 우리 나라 지식인들은 '가벼움'을 '경박함'으로 그릇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경박하다고 해도 그것이 '의도된 경박성'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소설 문장에 사용되는 단어가 일상어 또는 비속어일 경우 흔히들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다.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한문을 숭상하고 우리말을 폄하해서 보는 습관이 지식층에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핥았다','빨았다' 등 순 우리말을 구사한 표현은 쉽사리 조악하고 경박한 표현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성희 묘사의 경우 대체로 빙둘러 변죽을 울리고 한자어를 많이 쓰는 문장이 더 품위있는 문장으로 간주되고, 직설적인 구어체의 문장은 상스럽고 천박한 문장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2) "내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천박하게 표현했어요. 이유없이 그렇게 썼겠어요. 문학의 품위주의, 양반주의, 훈민주의 이런 것에 대한 반발이지. 우리 나라에선 아무리 야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어법이나 전체적 틀은 경건주의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꼭 결론에가서 권선징악적으로 맺는다거나 반성을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글을 맺잖아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한 반발로 사라를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우리 나라 소설에 사라 같은 여자가 있나요. 다 자살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러지."

하늘연못 2006-11-2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 선생님은 언젠가 [교수님들,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글에 부끄럽지 않게 교수 생활을 하신 듯 한데요. 책[이문열과 강준만]210쪽에는 마 선생님을 지켜본 이야기가 쓰여있는데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흔히 교수라고 하면 떠올리는 단아한 학자풍은 아니지만,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치열한 연구자의 모습을 대하는 것이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옛말이 여지없이 빗나가는 풍경에 당황하는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길을 다니다가 인사하는 학생에게조차 항상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곤 하는 그의 인사에 당황을 넘어선 황송스러움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이 연구실에서는 그의 연구나 집필에 방해되는 시간만 아니면 학생들은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그는 연구실을 방문하는 항생 모두에게 항상 친절하다. 손님이 있거나 바쁜 작업이 있어 문 앞에서 돌려보내야 할 때조차도 한결같은 미안함을 최대한 표현한다."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
유태우 지음 / 삼성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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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법 사상을 연구하던 선생님께서 노자를 가르치시면서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여보게. 자네들은 비싼 수강료를 낸 강의가 좋은 강의고 배우는게 많다고 하지? 그런데 말일세. 내가 생각해 보니까 비싼 강의는 그때는 좋을지언정 자신의 삶이 바뀌는 건 별로 없다네. 되도록 싼 강의, 되도록 돈이 들지 않는 강의, 아예 돈이 필요없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습관이 변하고 삶이 변한다네. 그래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 강의가 참 강의라네."

느닷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시겠지만, 이 책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책은 비싼 다이어트 음식을 먹으라고 하지도 않고, 헬스 크럽 회원권을 사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적게 먹으라고 이야기 한다. 많이 먹는 습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다이어트는 성공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은 이거다. " 잘 먹어야 잘 산다에서 덜 먹어야 잘 산다로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당장 반만 먹어라." 6개월만 반만 먹는 반식에 성공한다면 위가 줄어들어 더 먹으려고 해도 부담스러워진다. 그날까지 참아라.

국민 3명중 1명이 비만이라고 한다. 얼마 후에는 지구를 지배한다는 비만인이 되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고 활동량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통해 섭취한 칼로리는 그날그날 운동과 활동으로 다쓰지 못하면 고스란히 지방으로 우리의 배와 피부 밑, 혈관에 쌓이게 된다. 참고로, 채식만 하더라도 많이 먹으면 비만인이 되는 것은 그 큰 소나 코끼리가 풀만 먹고도 엄청난 덩치가 된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술을 먹으면 비만인이 되기가 더 쉽다. 밥 한 공기가 300Kcal인데 소주 1병은  660Kcal, 맥주는 240Kcal, 양주는 2000Kcal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별다른 활동없이 잠을 자기때문에 체지방이 부쩍 오른다.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다면 무려 8시간을 마시는 것인데 10000Kcal 즉 밥 33공기에 해당하는 칼로리를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주일에 2번만 술을 마셔도 왠만한 운동광이 아니고서는 아랫배의 살을 빼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1시간 동안 계속 달릴 때 600Kcal가 소모되는데,결국 소주 1병의 칼로리를 태우기 힘든 셈이다. 따라서 술꾼은 비만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 한 아무리 운동을 해도 비만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칼로리를 먹고 적게 칼로리를 태우기 때문에 비만이 되지만, 운동을 해서 많이 태우기는 힘들기 때문에 적게 먹기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먹는 커피 한잔에 비스켓 2개, 포카리 스웨트에 빵 하나, 배고파서 먹은 밥 한그릇, 맥주 한잔에 땅콩 몇 개는 모두 300칼로리를 훌쩍 넘는다. 30분동안 쉬지않고 달린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유태우 다이어트의 핵심은 반식, 즉 그대로 먹되 모든 것은 다 반만 먹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밥 한 공기와 깍두기 두개를 먹었다면 오늘부터는 밥 반 공기와 깍두기 한개만 먹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석달후부터는 걷기등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다시 석달을 보내면 위장이 줄어들어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이 다이어트의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볼수 있는데, 몸무게가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지 말고, 위장이 줄은 것을 다이어트의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무게는 줄여봤자 위장이 그대로 식습관을 유지하는 한 요요현상에 시달리게 된다. 위장이 줄어들어 먹을려고 해도 거북해야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다.

참고로 유태우 다이어트에서 반식만으로 체중이 충분히 줄지 않는 사람을 위해 권장하는 운동을 적어본다.이 역시 돈 안드는 다이어트여서 좋은 느낌이 든다. 돈은 들지 않지만 노력과 땀을 요구하는 방법인데 헬스클럽 같은 특정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습관을 바꿔나가자는 것이다.

1.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기회만 되면 걷는다.

2.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가깝다면 걸어 다닌다.

3. 5층 이하는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한다.

4. TV드라마를 보면서 러닝머신,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펴기 등의 운동을 한다.

5. 고층 아파트에 산다면 계단 내려오기를 생활화한다.

6. 외출시 버스를 탈 때는 한 정류장 미리 걷고 타거나 미리 내려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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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필호 달라이 라마를 만나다
황필호 지음 / 운주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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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함양에 있는 실상사에 다녀왔다. 기분좋게 시꺼먼 쇠 부처님의  나무 손을 잡고 비벼대고 나오니 기념품 전시장이 보여 이 책을 샀다. 원로 종교철학자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다니, 도대체 어떤 질문을 던질것인가 ? 얼마전 읽은 도올선생님의 책은 패기가 있었다. 불교란게 무언지 달라이 라마 당신이 누군지 마구 질문의 칼을 휘둘렀었다. 수필가이자 해박한 종교철학자인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할 것인가?적어도 도올 선생님의 달라이라마와의  만남과 비교해서 보면 달라이 라마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사소한 이야길 먼저 하면, 이 책은 운주사에서 나온 것인데, 내겐 호감이 있는 출판사이다. 운주사 덕분에 고비고비마다 실마리가 되는 책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찜찜하다. 이 책에는 달라이 라마의 손을 잡고 황 선생님이 펑펑 울고있는 사진이 표시에 실려있다. 그 모습은 이산가족 상봉같은 리얼한 느낌을 주는데, 달라이 라마의 큰 사진 밑에 조그마하게 붙어 있어 불교의 포교를 위한 사진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달라이 라마의 도력 앞에 평생 학문을 한 원로 철학자가 굴복하고 있다!- 이런 의도인가?  

 물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이 사진을 좀 더 좋은 느낌으로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70이 넘으신 분들이 이렇게 웃고 이렇게 울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라리 이 사진을 2면 정도에 넣던지 표지 전면에 넣던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달라이 라마는 동등한 인간으로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했는데 책은 왜 압도적인 인간인양 편집을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 책을 펼치고 나서 놀란 점은 황필호선생님의 수척한 사진이었다. 전립선암 3기의 투병생활 속에서 달라이 라마를 꼭 만나야 하는지를 자문하는 모습이 애처로왔다. 사실 선생님은 이 만남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 육성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이제 더 이상 선지식을 찾아 이곳저곳을 방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진리를 모르고 있지 않다. 단지 실천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나는 조만간 죽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나 아프리카나 티베트를 향해 또 방황의 길을 떠나야 하는가."(16쪽)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허약한 육체를 이끌고 13시간에 걸친 침대칸 열차를 타면서,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달람살라까지 가는 고생을 해야 하는가. 더구나 나는 이른바 평생 종교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아닌가. 그런 내가 이 나이에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고 무슨 굉장한 일이 생기겠는가."(19쪽)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70이 넘고 죽음에 가까워진 한 노학자가 피를 토하듯 쓴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겉멋도 오만도 없다. 지식을 자랑하려는 욕망도 없다. 선생님은 얼마남지 않은 인생을 쥐어짜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그 만남을 절실한 질문으로 채우고 자신의 사색으로 거듭 서술한다.

비폭력주의자로 평생을 살았던 선생님이 달라이 라마에게 처음한 질문은 영성과 웃음사이의 관계였다. 진실된 웃음은 천진난만하게 터져나오는 웃음이다. 또한 수행자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웃음은 개인적이면서도 영적이다. 왜 선생님은 달라이 라마를 만나 맨처음에 웃음에 대해 질문했을까? 종교에 의한 수많은 살상과 투쟁을 생각하신 것일까?

대학교때 읽었던 [종교학 서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 그러나 그대들은 정말 조심조심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발밑에는 비록 초라할지라도 비록 그대들과 다를지라도 같은 인간으로 살았던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 사는 사람들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들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여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싸우고 거짓된 믿음을 타파한답시고 서로를 해치는 것이 참된 종교일까? 차라리 종교의 끝은 지혜롭고 솔직한 웃음이 아닐까?

이 밖에 불교는 무신론인가 라는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이라는 점, 다른 종교로의 개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 개념이므로 가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점 등은 매우 감명깊은 대화였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살아있는 보살 즉, 보살의 환생인가 라는 질문이랄지, 수행의 정상에 다다랐는가 하는 질문 역시 감명깊었다. 잠시 변죽만 울리면 달라이 라마는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라고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행자로서 자신만의 삶을 살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2시간 20분의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 시간이 되어, 달라이 라마의 손을 잡고 선생님은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그걸 '영혼의 떨림'즉, 인간의 영혼과 영혼이 만나 예상치 않게 벌어진 감동으로 적고 있다.

나는 몇년 전 읽은 정신과 책의 콤플렉스 항목이 떠올랐다. 무의식에서 빚어지는 정서적인 과잉현상이었던가? 그러면 그 무의식의 구조는 무엇일까? 갑자기 아득해 지는 느낌이다.다시 본문에 나오는 흑백 사진을 바라보니 선생님은 마치 부모가 돌아가시기나 한 듯 울고 있다. 적어도 선생님은 외롭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것이다. 그 눈물은 아마도 인생의 회한을 담은 눈물이었으리라.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는 깨달음을 향한 방황을 할 수 없다는, 이것이 현생의 마지막 도정임을 절감한,  유한한 생명의 절규였으리라.

"폭포수 눈물, 그것은 내 평생에 처음 경험한 눈물이며 아마 앞으로도 그런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이렇게 펑펑 울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이 라마 성하를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분 앞에서 흘렸던 폭포수 눈물은 앞으로도 나의 삶을 인도해 줄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영력과 같이."(170쪽)

나는 여기서 문득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사쿠라 꽃이 날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죽음은, 여정의 끝은 어쩌면 처절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선생님의 눈물은 벚꽃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영화 속의 장군처럼 선생님도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평온을 얻었을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눈물과 웃음이 없는 게 무슨 종교고 무슨 인생이랴? 달라이 라마의 웃음과 더불어 선생님의 눈물 역시 삶의 등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는가? 선생님의 눈물은 달라이 라마의 말보다도 달라이 라마의 맑은 눈, 웃음, 마주잡은 손으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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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6-11-0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얼마남지 않은 여생을 쥐어짠 글에 내가 무슨 비평의 글을 더하겠는가?

하늘연못 2006-11-07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라이 라마는 보살의 화신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사족을 달면,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아주 가까이서 두번 뵈었다. 한번은 인터뷰를 겸한 세미나 때 였고, 한번은 추기경께서 운영하는 공부방 교사로서 였다. 어느날 한 학생이 "추기경님은 하느님을 만나보았나요?"라는 당돌한 질문을 했다. 그때 한참동안 망설이시다가 하셨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삶의 고비 때마다 혼신을 다해 기도하고나면 어느새 밤이 지나 동이 트듯 결정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같이 계시다고 여겨왔습니다."
 
숙명가야금연주단 5집 - Lovely Gayageum
숙명가야금연주단 연주 / Kakao Entertainment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이슬기 2집을 듣고 무척 고무되어 산 앨범이 3장인데 숙명가야금 연주단의 [Best] [Lovely Gayagum]과 김수철의 [가야금 산조]이다. (김수철의 앨범은 알라딘에서는 구할수 없고 신나라에서 구할 수 있다.)

[Best]는 숙명가야금 연주단의 곡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비틀즈의 곡과 클래식(비발디의사계, 캐논변주곡),남미음악(키싸스 키싸스 키싸스), 국악 (아리랑, 도라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야금으로 이런걸 연주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남미음악이 가장 좋았다. 생각해보니 클래식은 가야금을 하프처럼 튕긴것이 답답한 감이 있었고 국악은 전통의 멋을 우려내는데 2%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가 남미의 민중가요의 리듬이 가야금의 음색과 조화를 이룬 남미음악에 이르러서야 흥취가 절로 일어난 셈이다.

[Lovely Gayagum]은 25현 가야금과 해금이 조화를 이루는 모차르트 연주이다. 드팀전 님이 평했듯 '달아달아' '자장가'가 듣기 좋은데 사실 이 음반에서 주인공이 아니다. 당장 앨범 이름부터가 모차르트가 주인공이라는 걸 말해준다. 굳이 선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달빛과 아기가 주제가 되는 앨범으로 평온하고 애상적인 음악이라고 할까? 전반의 모차르트 연주와 후반의 우리음악을 짝을 이루어 국악에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모짜르트로 귀를 열게 하고, 후반에 이르러 우리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음반이다.

솔직히 이 음반에서 가장 좋은 연주를 들려주는 사람은 초빙된 해금 연주자 강은일이라고 생각된다.(강은일은 [오래된 미래]라는 좋은 음반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못 들었다.) 반면 주인공인 가야금 연주를 생각하면 '숙명 가야금 연주단 너희는 어디로 가는거니?'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연 가야금인가 하프인가? 이슬기의 연주에는 가야금의 가락이라도 살아 있었다. 그런데 숙명에 이르러서는 버터바른 가야금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후반에 가서 전통의 깊이를 보여준 것도 아니다. 과연 내가 가야금을 거문고로 착각해서 이런 평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악평도 사실 너무 심한 일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Best]와 [Lovely..]는 젊은 연주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살아있는 좋은 음반이기 때문이다. 왠만한 팝이나 재즈보다 틀어놓고 일하고 생각하기엔 더 좋다.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아마도 나무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월드 음악으로 본다면 시크릿 가든보다는 더 낫다고 보고 싶다. 시대가 달라졌고 이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고있지도 않을텐데, 김해숙 선생이나 황병기 선생의 내밀한 가락이나 여백의 미를 요구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바보다. 그래도 드팀전 님처럼 나도 서운하고 아쉬운 감이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국악과 클래식의 클로스 오버로는 이 음반이 가장 좋다. 국악과 재즈의 클로스 오버로는 이슬기 2집 [In the Green Cafe]가 더 좋다.  그런데 이걸 아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들은 국악인이 아닐지 모른다. 가슴 속엔 모차르트가 살아있고 아리랑은 무늬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게 말하건대, 국악을 들으려면 차라리 김수철의 [기타산조]나 신중현의 [기타산조]를 들어보라. 전자기타가 꽹가리와 장구, 가야금이나 거문고로 변해버린 치열한 모색을 볼 수가 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피워올린 한국인의 소리가 들어있다. 그에 비하면 숙명, 넌 너무 약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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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6-11-05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하게 썼지만 이 앨범 정말 괜찮은 음반입니다. 아마도 명반으로 남을 거 같습니다.

이잘코군 2006-11-05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숙명연주단거 하나 있어요. 캐넌변주곡 들어있는거요 앨범 다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