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SE (dts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송해성 감독, 이나영 외 출연 / 에이치비엔터테인먼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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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대학 다닐 때, 일주일에 한번은 학교 앞 서점에 꼭 들렀었다. 어떤 책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면 꿈 속에서도 서점에서 책을 뽑고 있었다. 다음 날 서점에 가보면 어느 귀퉁이 맨위 책꽂이 한가운데쯤 하는 식으로 쉽게 책을 찾은 적이 많았다. 항시 다닌 탓에 서점의 모든 책이 사진처럼 찍혔다가 꿈 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도 여러 사람들에게 꼭 보라는 얘기를 들은 영화다. 그러다가 이렇게 늦게 보게 된 것은 다 인연이다. 특히 [1분후의 삶]을 읽고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예전의 책찾기처럼 이제 이 영화를 찾아볼 때가 되었다고 무의식 중에 떠오른 것 같다.

[1분 후의 삶]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의 새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사형수란 언제나 유한한 인생을 가진 우리들의 상징이 아니던가! 영화를 보며 자꾸 눈시울을 적시게 되는 것은 윤수(강동원)나 유정(이나영)의 모습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2. 대학교 다닐 때 참으로 감명깊게 본 소설이 빅토르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이었다. 그때도 책 맨 마지막에 사형 제도 폐지를 역설할 때는 정말 가슴이 저며왔는데 지금은 오히려 서글프기도 한데 아직껏 사형제도가 남아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까닭이다.

가진 자가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드물다. 돈과 권력이 사형에 이르는 죄를 피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형은 대체로 없는 자들의 몫이고 이들은 법의 혜택도 별로 받지 못한다. 돈이 없기에 사형에 이르는 죄를 피할 수 없고, 정당한 변호를 받지못해 감면의 은사를 받기도 어렵다는 것은 참담한 현실이다.

3. 이 영화에서 내내 머리를 맴돌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유정(이나영)이 윤수(강동원)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지식인은 기층민을 이해할 수 있는가? 문득 군대때  만났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등병 때 상병이나 병장을 보면 부럽기 마련이다. 하물며 제대가 코앞인 말년 병장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옆 소대의 말년병장은 전역이 가까울 수록 더 우울해 보였다. 참고로, 그는 50킬로가 안되는 왜소한 체격과 볼품없는 얼굴이었다.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군대에 들어와서 이등병인 나보다도 나이가 적었다. 

그는 조금은 맹하고 실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폭언이나 폭력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이등병인 나하고도 친했다. 나는 그가 제대하기 얼마전 마침내 용기내어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되는데 왜 그렇게 슬프냐?" 고 물었었다. 그의 얘기는 조금 서글펐다.

"난 가난한 집에 태어난데다 힘이 없어서 내내 친구들한테 맞고 살았어. 중 고등학교 내내 쥐어터져서 지옥같았지. 그런데 졸업하니깐 이제 내가 돈을 벌어야 된거야. 난 머리도 나쁘고 힘도 없는데 할 것도 없쟎아. 미치겠드라구. 그래도 군대에서는 밥도 주고 상병 단후로는 쥐어터지지 않아서 얼마나 평온했는데, 또 사회로 돌아가려니 잠이 안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내게서 얼마나 멀리 있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영화처럼,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앵벌이로 먹고 살다가 끝내 동생을 잃기까지한 윤수를 유정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란 어디서 소통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걸까?

4. 그럼에도 윤수와 유정은 소통한다.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비밀로 하기'였는데 영화에서 '비밀로 하기'또는 '침묵 속에 가두기'는 양날의 칼이다. 유정의 상처를 들어주지 않았던 유정 어머니의 비밀로 하기는 유정을 죽음과도 같은 상처투성이의 길로 내몬 반면, 유정의 비밀을 죽음으로 안고 가겠다는 윤수의 비밀로 하기는 소통과 소생의 물고를 튼 셈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 같이 말하기 좋아하고 여기저기 옮기기 좋아하는 인간의 혀는 거의 살인적이다. 나는 새삼 침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침묵은 상대방의 상처를 감싸고 마음을 열게 하며 마침내 새로운 삶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친구보다도 차디찬 담벼락이 나을 때도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얄팍한 동정과 연민은 침묵의 위로에 짝할 수 없는 것이리라.

5. 사람들은 사형수의 삶이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에서는 요즘 매일 2,3명의 환자가 돌아가신다. 사형수가 자신의 순번을 공포에 떨며 기다리듯이 자꾸 비어가는 옆 병상에 공포를 느끼는  노인들의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실토하건대, 이 분들의 슬픔에서 나는 다시 한번 좌절감을 느낀다. 나같은 놈이 지하 장례식장에서 매일 장례차가 나가는 것을 우울하게 보는 80순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한 노인은 저멀리 가는 차를 보며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산천초목으로 나는 가네."하고 노래를 하고 계셨다.

어제는 선물로 받은 감을 독한 감기로 비쩍 마른 101살 할머니 입에 조금씩 넣어드렸는데 할머니는 자꾸 자기는 껍질을 먹을 테니 속살은 나더러 먹으라고 하신다.그렇게 배고프다고 하시던 분이! 결국 옆에 계신 할머니에게 남은 감을 먹여드리고 돌아서니 새삼 할머니도 아주 먼 곳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겠다. 

이 곳은 오래 사시라고도 일찍 가시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곳이다. 여하튼, 영화처럼 이곳도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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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총총 2008-01-0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란 무엇이 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공간을 기꺼이 창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소통이란 공간만 생기면 저절로 되는 거라고 저는 믿어요.. 저절로 안되는 게 더 어려운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석위의 철가루들이 저절로 배열하듯이 종이위의 플라스틱만 걷어내면 되는 것.. 소통!
 
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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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읽으니 셸 실버스타인의 [다락방의 불빛]이 떠오른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글과 재치있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 책이었다. 

2. 중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면 온통 깜깜하게 느껴진다. 폭력적이고 지루했다. 우리 아이들은 문맹이어도 좋으니 그런 학교는 안다녔으면 좋겠다. 답답했던 나는 시험기간처럼 오전으로 학교가 끝나는 날엔 종일 모르는 골목을 걷다가 서점에 들러 셸 실버스타인을 읽곤 했다. 그런 낙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3. 이 책[끌림]의 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지방 사는 친척의 결혼식에 부모님 대신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눈 내리는 날이었다. 그때 내 안주머니엔 축의금 봉투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목적지에 내려서도 결혼식장으로 가질 않고 눈 오는 길을 걷고 또 걷다가 다시 기차를 탔다. 일주일 동안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이었고, 단독이었던 나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죽을 것처럼 두들겨 맞았지만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epilogue)

4. 학창시절 선생님은 우리에게 묻곤 했다. "장래의 희망이 무엇인가?" 나는 어제까지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문득 희망이 생겼다. 내 대답은 이거다."마음을 끄는 길을 걷다가 이름없는 골목길에 머물고 싶어요."

5. 언젠가 빈민들이 사는 마을에 산 적이 있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그 냄새나는 골목에서 옆집은 아이스께끼통을 끌고 행사장을 찾아다니는 아저씨집이었다. 어느 날 아저씨는 교통사고로 몸저 누웠다. 그래도 그 집 담장에는 통조림통을 집삼은 채송화가 피어있어 슬프지 않았다.

그때 나는 눈물이 핑돌아 멍하니 담장 위의 채송화를 보았었다.그렇다! 내가 살고 싶은 골목은 이름없음이 지극한 희망과 심미성의 뿌리가 되는 삶이다.

6.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을 펼쳐도 된다. 아마도 당신은 첫장을 펼치자마자 울고말지도 모르는데 이런 글귀가 당신을 마중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7.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음악이 들려왔다. 신해원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였다. 동병상련! 사람은 결국 모두 다르나 아주 다르지는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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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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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이 책은 실화이다. 글쓴이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12명의 사람을 만나 꼼꼼하게 인터뷰를 한 후에 드라마틱하게 재현해 낸 책이다.

2. 사람의 매 순간은 그 동안의 모든 인생을 담고 있다고 한다. 나무 줄기를 베면 나이테 안에 모든 잎사귀로 가는 길이 드러나듯이! 그렇지만 그런 사실은 평소엔 느끼기 어렵다. 다만 인생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운명의 순간에 그 사실을 직시할 뿐.

3. 전쟁 또는 재난의 사실을 담은 사진이 너무 사치스러울 때 우린 사진을 찍은 자를 저주하게 된다. 이 책의 글은 화려하다 할만큼 뛰어나다.그러나,누구도 지은이를 욕하지 않을 것이다. 

얼음 무지개라고 해야할까? 죽음의 순간에 피어오른 생동하는 삶의 의지, 마지막 순간에 더 진하게 다가오는 이 세상의 색깔은,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

4. 책에도 나오듯,

생의 감각은 빛나고, 정원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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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ing 2008-01-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억해 두겠습니다. 일분 후의 삶.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보석같은 평론들 뜸뜸히 챙겨보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속도입니다. ^^

하늘연못 2008-01-04 20:14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복으세요.^^ 연말연시에 더 새롭게 다가오는 책인 것 같아서 조금 서둘러 올렸습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지금처럼 간절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은 연말에 무리하다가 며칠 앓아누은 시간에 만났던 책이었습니다.그런데도 이때다 싶어서 머리가 아픈 중에 무리해서 독서를 해서인지 눈에 핏줄이 터져 구미호눈처럼 되었답니다.여하튼, 그때 만났던 다섯 권 중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올해엔 제 자신의 문제를 리뷰를 통해 풀어가고 싶습니다.가능하면 비교와 통합을 통해 입체적이고 창조적인 리뷰를 쓰고 싶습니다. 어느 종교학자의 말처럼 '하나만 알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올해의 화두입니다.
끝으로 egoing님의 답방을 기념해서 좋아하는 구절을 적어봅니다.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드물다. 그러니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성전 스님)*** ('후회 없이 그러나 담백하게사랑할 수 있다면!')

하늘연못 2008-01-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가 오락가락 해요. 댓글이 지워졌다가 다시 떴다가 하네요. 사실 위 댓글은 두번째 쓰는 겁니다. 그런데 저장을 시키자마자 지워졌던 첫번째 댓글이 되살아나는 군요.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고 싶네요. 하여튼 올해는 느긋하게 살고 싶어요. 편한 리뷰 쓸겁니다.
 
중독
박영훈 감독, 이미연 외 출연 / 씨넥서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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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비오는 새벽에 이 영화를 본다. 빗소리가 잘 어울리는 영화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부대에 있는 웅적사라는 절에서 주말마다 목탁을 치며 법회를 진행하는 주말 군종병이었다. 우스운 것은 나는 군대가기 전엔 절에 간 적도 없고 당연히 염불을 할 줄도 몰랐다는 거다. 그렇지만 군대란 시키면 해야 하는 곳이 아닌가?

어느 날 잘 아는 상병이 휴가에서 좀 일찍 복귀했다. 그는 수송부 정비병으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행정반에서 묘한 전보가 도착했다. -"여동생 사망. 귀가조치 바람"- 전보의 당사자는 방금 즐겁게 돌아온 그 상병이었다. 행정반에서 나오니 그는 말없이 땅바닥만 보고있었다. 옷을 갈아입던 그는 아마도 전화 같은 걸로 이미 연락을 받은 듯 했다. 그가 중얼거리던 말이 아직도 선하다. "아침에 같이 라면을 먹었었는데..."

그가 돌아가고 묘하게 그 친구의 그림자가 따뜻한 햇살 속에 춥게 느껴졌다. 답답해서 주중에는 들르지도 않던 법당에 들어갔다. 나는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은주'라는 이름을 주인없는 연등에 붙이고 나만의 49제를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목탁을 치다가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져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내가 미친 놈이지. 이런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런데 그 순간에 연등에 달린 종이가 나풀거리며 떨어지더니 내 가슴 위에 앉았다. 나는 아주 짧은 사이에 환상처럼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녀는 웃으며 "오빠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그런 시간은 곧 잊혀졌다. 그럴 수도 있고 나 같이 심약한 놈은 헛 것도 본다고 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잊혀졌던 그 짧은 시간이 떠오른다.

2. 영화를 쭉 이어 보지 못하게 된 것이 꽤 된다. 그러니 운 좋으면 한 두번에 보지만 대부분은 대 여섯 번에 본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처럼 아니면 영화를 조각조각 옴니버스처럼 보게 된다. 그래선지 나에겐 순간 순간 몰입할 수 있는 영화가 편하다. 차분하게 꼼꼼한 장면을 내놓는 영화가 좋아진다. 이 영화가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는 어찌보면 반전이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 나 같은 나눠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두편짜리 영화로 느껴진다. 논리적인 역전에서 오는 충격이 온다기보다는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산다' 또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외국어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공부방 자원봉사를 하다가 좋아하게된 여선생님께 편지를 썼는데 한달 후에 친한 선생님과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말이 없었던 그 선생님은 평소 형처럼 알고 지내던 선생님과 미래를 약속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겪고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만남이 되짚어 다시 읽히기 마련이다. '아! 그 이야기가 그런 말이었구나!'이런 느낌을 얼마나 많이 겪게 되던가!

그런 면에서 반전 영화는 삶의 중층성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이런 영화는 퍼즐처럼 분해하고 재결합하는 무엇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애환으로 느껴진다. 전에는 배신감을 느꼈다면 이제는 품고 같이 아픔을 공감하고 싶다.  

3.  이 영화는 '빙의'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다는 이 요상한 현상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나눠질 수 있는 것일까? 불교의 윤회도 기독교의 영혼론도 이런 분리를 전제로 하고 전설의 고향에서도 육신을 벗어난 귀신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이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갑자기 동양적인 것인지 서양적인 것인지 조차 헷갈리는 '빙의'가 궁금해진다. (아마도 '빙의'란, 우리가 지닌 개념 속의 빙의란 무척 서양적인 심신 이원론적인 무엇일 것 같다.)    

여하튼 빙의라는 것이 일어난다면-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정신 분석가인 에리히 프롬의 [희망의 혁명]을 보면, 정신 분석가들은 빙의라는 현상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 육체와 영혼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것일까? 영혼이라는 것이 육체의 반복적인 습관과 기억에서 유발된 모종의 현상이라면 또한 어떨 것인가?

4. 대진(이병헌)에게서  호진(이얼)을 발견하게된 인수(이미연)가 이병헌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는 결국 이병헌의 말에 있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새겨있는 기억들...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았던 증거라구.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이 대사는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는데, 모든 사물들에 기억할 만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라는 나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에서도 이병헌은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이병헌은 빛난다. 맵시좋은 이미연은 이병헌과 아주 좋은 호흡을 보여주어서 영화 내내 나는 무척 즐거웠다. 이쯤해서 리뷰를 마쳐야 겠는데, 나는 일부러 핵심적인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마지막에 나오는 이병헌의 명대사를 보시길 바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찌 이병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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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 [dts]
류승완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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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년의 계획은 춘천 마라톤 완주와 유도복을 다시 입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세상이 좋다. 거친 숨소리와 역한 땀에 절은 운동복...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에게 미안한 것은 나이만큼 성숙한 주름살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이 영화를 보면서 류승완 감독이 역시 움직이는 배우를 잡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투 장면을 오랫동안 잡는 것은 무척 힘들다고 생각이 된다. 지루한 성룡의 마지막 격투 장면 같은걸 떠올리면 스트레이트와 잽, 어퍼컷과 훅, 크린치 등의 몇 가지 조합만으로 액션을 만들고 그런 것을 실감나게 찍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그런 걸 그럴싸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새삼 우리나라의 영화는 세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3. 그리고 이 영화의 매력은 퇴물복서 강태식과 범행자 류상환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신인왕전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마흔 넷의 강태식이나 스무살 류상환이나 결국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마당에서는 신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새롭게 맞이하는 시작은 헐거워진 운동화를 질끈 동여메고 글러브를 꽉 쥐는 그런 선택일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선택은 진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선택은 진실한 것이다.

4. 강태식은 다만 그 링의 마지막까지 서 있을 수 있기만을 바라지만 류상환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승리를 쟁취하길 바란다. 나는 어느새 마지막 까지 서 있고 싶다는 소박한 강태식을 더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란 무얼까? 나는 누군가를 꺾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나는 절망 속에 주저앉아 어제와 같은 또하루를 반복하고 싶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5. 마라톤 연습을 할때나 다시 격투기를 시작하는 그 시점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안의 절망이나 한계를 잊고 그것 자체에 몰입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몰입의 끝에 아마도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나의 열망을 명쾌하게 비춰 주었다. 오늘 이 순간은 새로운 시작을 하기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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