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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1disc) - 할인행사
조엘 슈마허 감독, 에미 로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1. 살다보면 축복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난 언제나 서투르고 이기적인 사람인데도 친구들로부터 몇년만에 연락이 오기도 한다. 올초엔 어쩌면 상황이 달랐다면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를 친구들로 부터 몇 년만에 연락이 왔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었지만 묘하게도 결혼하기 직전 2년동안 갑자기 천사같은 친구들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양다리를 걸친 채로 2년이 갔다. 물론 그런 상황이란 것이 거짓된 연극처럼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 떠나가기 전에 한 명이 또 나타나고 그가 또 떠날 즈음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식으로 2년이 갔다. 스스로에게 조금은 실망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은 왜 순수한 마음으로 단 한명만을 좋아하고 상황을 명료하게 만들지 못하느냐하는 그런 점이었다. 왜 초상집에서 조문하는 아가씨에 눈독을 들이는 그런 기분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그 시점에서 여관방을 전전했다는 것도 아니고 뒤늦게 학생식당에서 밥이나 한끼 할까를 기다리고 밤에 받는 메시지에 기뻐했던 그 시점에 그런 충만감을 저버리기를 주저한 것도 사실이다. 얼빠진 변명을 하면, 나는 무슨 단물을 빼먹으려고 그러고 있었다기 보다는 외로웠다. 그렇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여하튼 그런 나에게 상처받아 떠난 친구도 있었고 그런 것은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무척 쓰기 공포스러운데 이 리뷰는 아내도, 묘한 관계의 친구들도 보고 있기 때문인데 나는 이혼을 당할 수도 있고^^ 그나마 오랫만에 재개된 우호관계가 드디어 종말을 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데 왜 이런 잡다한 이야기를?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 속에 언제나 괴로웠던 이 문제가 스물스물 움직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과 자유가 충만한 공간을 선사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때도 지금도 생각한다. 나도 그런 걸 꿈꿨다. 그렇지만 자신의 충동과 집착으로 내 스타일의 삶을 강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인격을 그의 삶의 모든 가능성을 잠식하는 유령같은 존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2. 이 영화를 보면서 이번 주 내내 생각해온 소통의 문제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혔다. 소통의 문제는 결국 -마음 속의 상처를 가진 자가 꿈꾸는- 사랑에 대한 문제이다. 신체적인 결함으로 상징되는- 상처받은 자인 유령은 크리스틴을 사랑한다.
우리들 사랑의 상황이 사실 그러하다. '이렇게 부족한- 이렇게 상처받은-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해도 되나요? 과분한 그녀는 결국 또다른 상처만을 남긴채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을까요?'하는 질문을 많이 하지않나? 그런데 자신이 가진 상처가 너무 과도할 때, 모처럼 다가온 사랑이 흩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증폭되면 스스로 개지랄을 해서 파토를 내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인형처럼 소유하고자 하는 멍청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들의 새해인사 메시지에도 흔들리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해보건데, 사랑하려면 자신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랑이란 소통이고, 소통이란 상처가 야기한 외로움이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상처가 너무 크면 자신의 소리만이 증폭될 뿐이요,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랑이란 상대방의 삶을 잠식하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상처에 묶어두는 삶! 그것은 아무리 화려해도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상처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그늘에서 사랑이 사육되지만 공연히 불안하며 뜬금없는 무상감이 함께 한다. 이게 바로 유령의 사랑이다!
3. 내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렸을 적 이웃집 갓난 아기를 보다가 볼을 물어뜯겨서 깊은 이빨자국이 생기고 말았다. 여대생이 되어 강남의 성형외과에 가기까지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한 동생의 노력은 대단했다. 사실은 예쁜 얼굴이고 그 상처는 약간의 흠이 될 뿐으로 여고생이 될 때 즈음엔 거의 희미했었다. 그러나 동생은 그 상처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척 우울해졌고 성적이 곤두박질 쳤었다. 동생은 자신은 두들겨맞아야 마땅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흔이 다된 지금도 동생은 아직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내가 가끔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예쁘고 명랑하고 당시에는 부반장을 꿈꾸었던 그 인격체가 그런 조그만 상처 때문에 인생이 그렇게 망가뜨려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양말에 돌멩이가 들어가면 걸을 때마다 괴롭다. 바닥이 울퉁불퉁하면 더 괴롭다. 이 때는 잠시 멈춰서 양말을 벗고 돌멩이를 빼야 한다. 우리가 사는 삶이 간혹 돌멩이를 빼지 못하는 바보짓일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사는 거다. 그런데 그게 삐걱 거리면 자꾸 외형적인 상처나 남을 탓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양말 속의 돌멩이다. 자기 안의 상처다. 상대방이 야기했다고 여겨지는 감정의 격분 뒤에는 아직도 자라지 못한 상처받은 아이, 갓난 아이에게 물어뜯겨 울부짖는 내 여동생이 그 시간 그대로 박제된 채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축복처럼 다가오지만 성숙과 더불어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 만이 사랑을 자유와 생명으로 충만한 삶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삼 영화를 보며 좋은 연인도 ,그렇다고 노력하는 연인도 아니었던 나를 다시 한번 책망할 수 밖에 없었다.
4. 리뷰를 쓰면서 들곤하는 생각이 '어디까지 써야하는가?'이다. 특히 영화나 소설의 경우엔 결말을 암시한다는 것은 범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다음은 영화보신 분만 읽으시라.
맨 마지막 크리스틴이 유령을 저주하면서도 문득 마음을 돌려 절절한 키스를 보내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순간은 내 여동생이 잠시 울음을 멈추는 때고, 나같은 어리석은 자가 잠시 위로를 받는 때다. 양말 속에 돌멩이가 있는 데도 내몰리는 심정이 된 자는 계속 걷다가 발을 온통 상하게된다. 진정한 사랑과 깨우침은, 내몰리는 자에게 잠시의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받은 오페라의 유령은, 자신이 크리스틴을 향한 욕망에 묶인 까닭은, 자신의 콤플렉스, -추악한 외모 탓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거라는 절망감, 소외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크리스틴의 키스가 진정한 사랑은 이 덧없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까닭이다. 크리스틴은 오페라의 유령의 얼굴을 보았지만, 소유욕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보았지만, 열렬한 키스로 그에게 신적인 용기를, 진정한 다가섬을 보여주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 때문에 잠시 쉬었다. 그리고 크게 공명했다. 크리스틴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It's not your Fault! You're a Good Person!"(당신 탓이 아니예요. 그리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예요.)-이 부분은 내가 직전에 쓴 [굿 윌 헌팅]리뷰와 함께 보시기를 바란다. 솔직히 내가 어떻게 이 두편의 영화를 동일한 시기에 보게되었고 소통이라는 주제로 결합을 시키게 되었는지는 신기할 따름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그 짧은 순간 엄청난 삶의 에너지와 영감에 충만했다. 그는 사랑하는 크리스틴을 떠나보낼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을 평생 가두어두었던 원숭이 인형을 떠날 수 있었으며 거울을 깨부술 수 있었다. 그는 사랑과 자유를 쟁취했던 것이다.
5. 이 영화는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가 충만한 작품으로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유령이 크리스틴을 떠나보낼 때에도, 유령이 거울을 통쾌하게 부셔버릴 때에도 나는 감정에 북받쳤다. 어리석은 나와 어리석은 내 동생을 떠올리며 울고 싶었다.
크리스틴의 묘지에 놓여있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장미를 보며, 나를 떠났지만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런 축복과 사랑은 오페라의 유령이 가면을 벗어던지는 성숙과 용기를 -크리스틴이 보여준 신적인 용기와 포용을 - 내가 본받을 때 살아있는 관계로 남을 것이다. 나도 뒤늦게라도 그들, 가면을 벗지못한 유령인 나를 축복하는 나의 크리스틴에게 진심어린 장미꽃 한송이를 보내고 싶다.
6. 그런데 여기서 잠시 크리스틴이 왜 유령에게 진심어린 키스를 보낼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크리스틴은 유령을 아버지가 보내준 음악의 천사로 생각하고 순종했다. 천애고아인 상처받은 한 아이는 유령의 진심과 열정을 먹고 컸다.
정말 외롭고 버림받았다고 크리스틴이 흐느꼈을 그 길고 깊은 밤, 더 깊은 상처를 지닌 영혼이었던 유령이 변함없이 지켜주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린 자의 삶도 삶이고 어리석은 자의 사랑도 사랑이다. 중생심이 보리심이고 초발심 없는 구경열반도 없다.
맹목적인 첫사랑의 설레임이 없이 어찌 성숙한 사랑의 꿈을 꾸랴! 부족하니까 사랑하지못한다구? 사랑하면서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아니 그게 사랑이다. 삶의 신비이다. 유령의 사랑은 크리스틴을 지켜주었고 그 진심은 결국 자신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삶은 매순간 불타올라야 하는 무엇이다.
그렇다! 유령의 헌신은 크리스틴을 성숙시켰고 크리스틴은 맨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 유령에게 깊은 감사와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고귀한 소통의 순간을 창조해낸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 "괜찮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예요." 라는 크리스틴의 마음이 유령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 소통의 순간은 짧았으며 그 순간은 아쉽게도 유령과 크리스틴의 이별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와 생명으로 가득한 저마다의 삶으로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쨍그렁!" 거울은 이렇게 깨어졌다. 울부짖으며 왜곡된 자아상을 상징하는 거울을 부수는 오페라의 유령은 홀가분하면서도 가슴 저민- 외로운 뒷모습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가 울부짖을수 밖에 없는 것은, 상처뿐인 삶을 벗기 위해, 끝내 부숴야만 하는 거울에 그토록 열렬히 매달리고 집착했던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도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 크리스틴이여! 이제 그대를 진정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었는데 작별의 순간이라니!'
7.아! 끝내 나를 격동시킨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노래 때문이었다.
" 우린 거친 황무지에서 태어나 무상하게 흩어질 존재지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외롭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되죠.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삶을 함께 할 유일한 동반자를 구하지만..... 알쟎아요. 사는 것은 그런 게 아니죠. 우리는 결국 외로움 속에서 웃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삶이란 결국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Child of Wilderness, Born into emtiness,
Learn to be Lonely, Learn to find your way in Darkness,
Who will be there for you?, Comfort and care for you?,
Learn to be Lonely, Learn to be your one companion,
Never dreamed Out in the world, There are arms to hold you,
You've always known, Your Heart was on its own,
So laugh in your Loneliness,Child of the Wilderness,
Learn to be lonely, Learn how to love life that is lived alone,
Learn to be Lonely,
Life can be Lived, Life can be Loved,...Alone.
가면을 벗어던진 유령의 삶이 그러했을 것이다. 두렵지만 가면을 버리고 맨얼굴을 드러내놓기를 선택했던 어제의 유령은 오늘 외로움 속에서 웃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그의 앞길에는 수많은 장미꽃이 놓여있을지니! 나같은 자들,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그의 삶이 빛으로 화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8. 배암발 : [오페라의 유령]은 원래 프랑스 작가인 가스통 르루의 유명한 추리소설이라고 한다. 1925년부터 영화화되었으나 세계적인 작품이 된것은 영국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로 재창조한 이후였다. 소설을 못읽어서 확신할 수는 없으나, 소설은 범죄 스릴러였던데 비해, 뮤지컬은 상처받은 사람이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있어 전세계적인 걸작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뮤지컬[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1948년생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캐츠]를 히트시키고 최상의 기량을 뽑내고 있을 때였다. 광고일지도 모르지만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오페라의 유령]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걸작 뮤지컬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가 60이 다 되어 자신의 걸작을 재해석해서 직접 만든 영화가 이 영화이다. 아마도 그의 생애가 투영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러니 오페라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배부른 이야기이다. 적어도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오페라의 유령]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극작가 자신이 20년 세월을 다시 숙성시켜 다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마지막 노래가 무척 중요하다. 영화의 모든 것을 녹여낸 메시지일 수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노래는 무척 히피스러운 반기독교 정서가 물씬 나는 노래라는 점이다. 적어도 내 주변의 오페라 선호층은 기독교인들인데 그들은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물론 나는 이 노래 역시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거라고 보는 사람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홀로 걷는 길이란 결국 신과 함께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발길에 닿는 돌멩이와 들풀조차 늘 새롭고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또한 영화의 별난 재미는, 그 동안 논리적 비약일 수 밖에 없었던 유령의 어린 시절 같은 것이 삽입되었다는 것 이다. 이런 부분을 유년기의 트라우마라는 식으로 정신분석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상투적이다. 나는 단지 억압의 상징으로 읽고 싶다. 이 역시 상투적인 해석이지만 많은 선택항을 품고있기에 특정한 선택을 강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