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굿 윌 헌팅 - [할인행사]
구스 반 산트 감독, 로빈 윌리암스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1. 2년 전에 아내가 권해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참 심드렁한 영화에 불과했다. 로빈 윌리엄스도 조금은 식상했던 것 같고, 영화 도입부의 천재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거슬렸다.
2. 그런데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왜 전에는 저런 멋진 장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이 멋진 영화로 들어가 보자.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MIT의 응용수학과 교수인 랭보는 누군가 풀기를 기대하며 어려운 수학문제를 벽에 걸린 칠판에 적어놓는다. 그런데 막상 문제를 푼 것은 뛰어난 그의 제자들이 아니라 말썽꾸러기 청소부 윌 헌팅이었다.
윌 헌팅은 폭력성이 다분하며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고뭉치로 하루하루 그의 재능은 잠식당하고 있었다. 랭보교수는 그의 천재성을 이용하기 위해 친구인 정신과 의사 숀을 부르는데 이 때부터 숀과 윌 헌팅과의 소통을 위한 전쟁이 펼쳐진다.
3. 이 영화는 뛰어난 천재 윌 헌팅의 기상천외의 행적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핵심은 이거다. 사람은 능력을 인정받을 때보다 한명의 인간으로서 신뢰를 받을 때 진정 행복하다는 것! 아무리 손오공처럼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 행복이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자연을 벗삼으며 낚시나 등산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나?
4. 오히려 내 관심은 '천재가 무얼까?'하는 점이었다. 만약 어떤 특정한 영역을 위주로 보았을 때 분명 천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 2년 만에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전자오락실에서 최고 득점을 올리는 전자오락 매니아와 얼마나 다른걸까? 그래서 이렇게 다른 사람과 벽을 높이 쌓는 천재 개념을 폐기하고 달인 개념 또는 거장 개념으로 옮겨갈 때 조금더 건실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된다. 천재보다는 달인이 만인에게 개방된 개념이며, 천재보다는 거장이 인생을 통해 축적해가는 개념이다.
분명 이른 성공이 인생 전반의 성공은 아니지 않는가? 전무후무한 권투의 귀재인 마이크 타이슨이 결국 패가망신한 놈으로 남았듯이, 남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푼다는 걸로 성취를 가름하는 자는 저주가 있으라!
5. 또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끈 점은, '전혀 다른 사람이 과연 어떻게 소통을 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영화 [우행시]에서는 '비밀을 전제로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소통의 시작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정신과 의사 숀은 다른 상담가들이 기법에 충실할 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서로 공감하게 되는 순간까지 기다린다. 숀은 '신뢰가 없으면 소통은 없다'고 말한다.
이건 그럴싸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대가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해서 며칠 굶어볼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의 처지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와 같이 될 때만 서로 소통할 수 있다면, 소통이라는 것의 건널 수 없는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소통이 많이 있을 수 있는 신뢰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그러나 신뢰가 있다고 물높이가 같은 컵처럼 쨍하고 공명음이 난다고 믿는 것은 너무 소박하다.
내가 너가 될 수 없으니, 기껏 남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라는 신뢰관계이다. 그리고? 너나 나나 각기 인생을 사는 것이다. 소통은 공명처럼 행운이고 축복이다. 그것은 감사의 대상이지 요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엄마 젖을 빨듯이 언제나 공감받고 공명 받을 수 없다.
그런 헛된 희망은 피로와 소외 감정을 만들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소통은 순간적이고 상황적이며 지속되기 어렵다! 다만 소통이 준 마치 깨달음과도 같은 공명하는 인식의 지평이 인생을 변화시킬 뿐인 것이다.
6. 그럼 윌 헌팅과 숀은 소통에 성공했는가? 성공했다. 어떻게 성공했는가? 숀이 좋은 사람이고 윌 헌팅같은 꼴통이어서 성공했다.
내 생각은 이점이 중요한데 소통은 숀이 윌 헌팅하고 같은 처지인 '천재적 꼴통'이어서 이루어 진게 아니다. 숀은 자신도 윌 헌팅도 꼴통-어리석고 상처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환자를 치료하는 우월한 위치에 두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숀은 윌 헌팅을 다만 연민을 가지고 만났던 것이다. 그 역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상처는 또는 고통은 소통의 필요조건이다. 상처와 고통이 야기한 고독이 아니고서야 누가 소통을 원하겠는가?
결국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윌 헌팅이고 그 힘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신뢰인 것이다. 그럼 숀은? 다만 너무 초조하지 말라고 기다려주고 다독거렸던 것이다.
7. 영화 제목을 보며 무슨 뜻인지 그 때도 지금도 궁금했었다.
윌 헌팅과 숀의 전쟁같은 소통은 끝내 끝날 것 같지 않은 "It's not your fault!(괞찮아! 네 잘못아냐!)'로 일단락을 맺는다. 제목까지 쓰면 "괜찮아. 넌 '좋은'-good- 사람이야." 정도 되겠다.(You, Will Hunting are a Good Kid! Please,Trust yourself! Love yourself! Live yourself!)
너무 똑똑한 것도 죄 아니고, 공부 못하는 것도 죄 아니다.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려면 누군가 믿을 사람은 있어야 하고, 부족하지만 언제나 -있는 그대로-' 좋은' 자신을 믿어야하며,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두렵지만 뛰어들기도 해야하는 거다!
실패했다고 상처받았다고 내리 자학하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자기 가슴에 영원히 '나쁜 놈'이라고 낙인을 찍을 필요 없다. 그래서 예수도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나? " 네 거적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라!"
마음의 상처를 감내할 수 있을 때 우린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 그러니 소통은 상처입은 자에게는 치유의 결과요 다가가는 자에게는 성숙과 겸손의 결과다.
8. 숀은 정신분석의 끝에서 "괜찮아. 넌 좋은 사람이야."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다하는 날까지 변함없는 진실이다.그 순간 그는 상담가도 의사도 아니다. 그는 같은 사람이요, 같은 길을 가는 친구로서 절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절절한 진실마저 서로 나누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숀이 윌 헌팅에게 너무도 절절하게 들려주는- 그토록 끝없이 되풀이되는 'It's not your fault!'는 반야심경이나 주기도문을 외듯 외워야하는 만트라가 아닐까? 이해할 수 없지만 공명의 신통은 있는 기도가 아닐까?
친구들이여! 힘들때는 삶의 만트라를 외우자! "괜찮아! 너는(또는 난) 좋은 사람이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