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1925년 작 <댈러웨이 부인>은 1차세계대전 이후의 런던의 중심부 웨스트민스터(버킹엄 궁전,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의 상류 지배층 사회를 배경으로 서술된다.

작가는 런던 상류층 사교계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50대의 중년 부인 클래리싸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남편 라처드 댈러웨이, 딸 엘리자베스, 식민지 인도에 파견된 제국의 관리인 피터 월쉬, 영국 왕실가문의 신사 휘트브래드, 클래리싸가 한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인 쌜리 시튼, 의사 브래드쇼 경, 브래드쇼 경의 환자 중 한 명이자 댈러웨이의 이웃 셉티머스 등)의 복잡한 관계를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시점을 변화해가며 단 하루만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어떤 한 사람의 시점(그것이 작가의 시점이든 캐릭터의 시점이든)에서 일관된 내러티브로 소설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 같은 시점의 변화가 시간적, 의식적 흐름을 흐트러뜨리며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당시 대영 제국이라 불리며 세계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크게 떨치고 있던 영제국의 남성적 계급적 식민적 지배담론이 클래리싸 댈러웨이 부인이 정성스레 준비한 디너 파티에서 대화적으로 서술되고 그 속에서 지배 언술의 모순과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재밌는 점은 지배 언술의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파티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성적 타자인 클래리싸를 포함한 파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제국의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종전 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어느 날, 평화로워 보이는 런던 시내를 거닐며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안락함에 젖어 디너 파티를 준비하면서 클래리싸는 뭔가 이상한 불안을 감지한다.

개인적으로 그 정체불명의 불안감은 아마도 소설 도입부에서 우연히 마주친 셉타머스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제국적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했던 셉티머스(영국의 문명과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하층 계급으로서 전쟁의 참혹성과 인간 존재의 무의미, 인간성의 파멸 등을 목도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인물)는 제국의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자살은 제국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에 클래리싸는 처음에 거슬렸지만 셉티머스의 행동에 공감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크게 동요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어떻게 초래됐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이내 안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죽음은 하나의 가십으로서 스쳐 지나갈뿐이며,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그 위기를 드러낸) 제국과 문명의 질서를 계속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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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 <디 아워스>(원작 소설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국내에서는 <세월>로 번염됨)는 클래리싸의 불안감을 서구 사회의 젠더 규범과 중산층 사회 여성(그리고 성적 소수자)의 성적, 경제적 억압에서 오는 비극을 예감하는 것으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다 좋았지만 소설 결말에서 클래리싸의 태도, 행동에 대한 영화의 해석, 타인의 죽음을 통한 나의 삶의 긍정,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게 하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윤리적 함의도)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 점을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과 연결시킴으로써 울프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메세지 역시 내겐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명언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는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아니 누구나 좋아하는 명배우 메릴 스트립의 클래리싸 연기도 정말 멋지고 리처드/셉티머스로 분한 에드 해리스와 로라 역의 줄리앤 무어의 소름 돋는 섬세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여자로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영화 속 로라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의 선택 아닌 선택이 가슴 아팠다. 클래리싸의 딸이 그녀를 두고 리처드를 파멸로 몰고간 `괴물`이라고 말하지만, 끔찍하게도 평범했던 그 날, 자살 대신 가족을 떠나기로 한 것은 그래도, 모성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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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5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comi 2015-04-15 07:35   좋아요 0 | URL
ㅎㅎ클래리사라고 써야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국내 번역은 그렇게 된 것 같네요. 클래라씨 자꾸 발음하니 웃기네요.

수이 2015-04-15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 부인 좋아하는 소설인데_ 영화는 어릴 때 좋아하는 배우들 연기 보는 맛에 의미도 모르고 봤어요. 다시 읽고 다시 보고싶게 만드셨어요.

cocomi 2015-04-15 07:57   좋아요 0 | URL
워낙 좋은 작품이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델러웨이 부인을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뭇했어요. 엄청 아끼는 소설이라서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기억이 안나서 다시 뒤적거리며 적었네요. 전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잘 안보는데 이 영화는 또 보고 싶어요.

AgalmA 2015-04-15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댈러웨이 부인-세월-디 아워스 다 봤는데, 디 아워스가 제일 좋았어요. 문제에 대해 가장 이 시대 당면성으로 다가와서 그랬던 거 같아요. cocomi님 말씀처럼, 세 사람의 죽음의 기로와 그 선택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 쉬운 보편적 삶의 의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대 속 소외자로서 자신의 실존 자체(하지만 그들의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죠)를 가장 앓고 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었죠. 우리가 세월호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듯이.
<디 아워스> 필립 그래스 음악까지 완벽했지요^^

cocomi 2015-04-15 14:36   좋아요 1 | URL
음 전 영화가 세 사람의 죽음 또는 자살 시도를 (시대적 문제는 약간씩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생을 긍정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썼다는 면에서 동일선 상에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전 그런 점이 맘에 안들었고) 아갈마님 말씀 듣고 보니 제가 영화를 너무 단순화시킨 걸 수도 있겠네요. 네 세월호의 죽음 역시 우리의 생을 긍정하는 것으로 또는 잠깐 흔들어놓고 지나가는 것으로 스쳐가면 안되는 거죠.
부끄럽지만 영화 음악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영화랑 잘 어울렸다는 기억만ㅜ) 유툽으로 들어봐야겠네요~ 또 한 번 감사감사^^

cyrus 2015-04-15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은 대흥과 참빛나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두 권 다 절판이에요. 솔출판사가 버지니아 울프 전집을 만들고 있어서 좋은데 <세월>을 번역 안 하는지 의문이 들어요. ^^;;

cocomi 2015-04-16 00:43   좋아요 0 | URL
울프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져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등대로>가 가장 유명하니까..민음사도 2권밖에 없더라고요. 펭귄클래식코리아는 <자기만의 방> 하나밖에 없고요. 다른 모더니즘 작품처럼 울프 소설도 유명세에 비해서 많이 안읽히는 것 같아요.

transient-guest 2015-04-16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는 관심은 계속 갖고 있지만 저에게는 좀 어려운 작가같아요. 예전에 영화 The Hours도 잘 이해못하고 봤습니다. -_-:

cocomi 2015-04-16 13:32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경험, 관심과 취향이 다르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여성 작가들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