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보다 속도가 줄긴 했지만, 요새도 라캉이나 들뢰즈, 그리고 지젝의 책들이 꾸준히 나온다. 아마 이들이 주는 (지적) 흥미유발이 다소 어렵지만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꽤 여러 권의 책이 걸려들었다. 우선 눈에 띄는 책은 지젝의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와 <코키토와 무의식>이다. 둘 다 출판사 인간사랑에서 나왔는데, 예전에 여기서 나온 번역본들이 약간 문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많이 나아진 분위기다. <코키토와 무의식>은 지젝과 여러 학자들이 라캉에 초점을 맞추고 쓴 글들이다. 자기가 원하는 부분만 따로 읽어도 좋을 듯 싶다.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는 '라캉과 헤겔의 중첩'을 표방하는 책이다. 하지만 지젝이 라캉을 부를 때, 혹은 헤겔의 (혼돈스런) 밤으로 들어갈 때마다 이 둘은 은연중에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지젝의 진정한 대상은 헤겔 아니겠는가? 라캉을 지그시 눌러, 거기서 나오는 현란한 빛깔을 즐기지만 결국 소용돌이 치며 끌어당기는 최종 구멍은 헤겔에 맞닿아 있다. 앞으로 노골적으로 헤겔과 노는 지젝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학자의 글이 담긴 <지젝 라캉 영화>도 눈에 띈다. 지금 조금씩 보고 있는데, 단순히 지젝이나 라캉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가 소화한 그 무언가를 품고 있다. 저자의 역량 안에서 자신이 곱씹은 내용물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대니 노부스의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의 제목을 보고 나지오의 책들이 떠올랐다. 지젝이나 핑크 같은 유명한 사람들 말고도 라캉에 접근하는 이들은 많다. 아까 말한 장 다비드 나지오나 마단 시럽, 질베르 디아트킨 등.. 그리고 이들의 글에서 뜻밖의 수확을 거두기도 하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거기다 일종의 종합선물 성격인데, 대니 노부스 외에도 브루스 핑크, 딜런 에번스, 지젝 등이 참여하고 있다. 라캉을 섬세하게 주무르는 그들만의 솜씨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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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 비해 들뢰즈의 책은 요새 좀 한가한 모양이다.
<소진된 인간> 정도만이 보일 정도다. 그나마 이 책은 베케트에 관한 책이기도 해서 내 흥미를 돋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릴 모라나의 <에술철학>은 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의 미학을 다룬 책인데, 이런 책은 내 구미에 맞는다. 곧 구해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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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지젝의 책 몇 권이 남았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다시 나왔다. 이미 읽은 책인데, 이렇게 수정된 번역본으로 등장하면 반가우면서도 뭔가 좀 씁쓸하다. 번역자는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 책도 다시 손에 들어야 하겠지..
<예수는 괴물이다>는 제목이 좀 세다. 우리나라 독자를 끌기 위해 일부러 원서 제목을 자극적으로 바꾼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젝의 짓궂음이 묻어 있는 제목이지 않을까? 그런데, 지젝이 처음부터 저렇게 나온다면, 결국엔 지젝스럽게 '긍정'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면 될 것 같다. 즉 예수를 괴물로 전락시키지 않고 저편에서 새로운 가치, 긍정의 테두리로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젝은 기독교를 우리가 아는 익숙한(세속적)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는 대중들이 아는 기독교와는 차이가 생긴다. 어떤 것에서 훌륭한 엑기스만 뽑아내어, 이것이라면 괜찮다라는 식은 현실에 와닿기 힘들다. 그것은 다른 사상, 종교에서도 가능한 이상적인 설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견디고서도 더 많은 긍정의 가치들이 남은 그 무엇에서, 그러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합리적, 비판적 철학에 머리를 담그더라도, 개인적 취향 앞에선 무기력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