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도르의 <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1>이라는 책을 뒤늦게 발견했다. 홍준기 씨가 밀고 있는? 라캉주의 정신분석가인데, 지젝이나 브루스 핑크 이외의 걸죽한 라캉 전달자를 만나고 싶다면 한 번 접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조엘 도르는 자신만의 (학자적인) 내공을 갖춘 걸로 보인다. 그리고 특색이라면, 팔루스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다만, 설명이 한 가지 톤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라, 지젝같이 독자를 들었다 놨다하는 재미는 덜하다. 그렇다고 그리 쉬운 편도 아니다. 그러나 지젝이나 핑크에 기울어진 라캉 독서 상황을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색다른 분위기를 얻을 수 있다.

 

 

 

 

 

아난케 출판사에서 나오는 <아난케 정신분석 총서>도 묵직하니 볼 만한 책들이 많다. 아카데믹한 느낌이 많지만, 진중하게 공부하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어쨌든 다시 브루스 핑크로 건너 가서, 그의 책 <에크리 읽기>를 잠깐 언급해야 겠다. 내가 읽은 라캉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충실한 내용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감상문을 쓴다고 해놓고 이미 망각의 시간을 건너, 때를 놓쳤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다시 이 책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이다. 특히 이 책에는 아주 오래 전 소칼 등에 의해 저질어진, 프랑스 사유를 잠시 우습게 만든 지적 헤프닝에 대한 훌륭한 반격이 포함되어 있다.   

 

 

 

 

 

우노 구니이치의 <유동의 철학>을 읽다가 스피노자 설명에서 미립자의 교착이라는 흥미로운 부분을 봤다. 신체, 몸과 관련해서 나온 말인데, 이 미립자가 더 미세해지고 힘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의 차원에 육박해 들어가면, 그것을 차라리 氣라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유물론으로서의 기철학과 내통할 수 있는 묘한 순간을 포착한 느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보다 말다 했는데, 개정판이 나왔다길래, 그것마저 멈췄다. 들뢰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철학자이니 시간을 내서 그와의 만남을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다. 뭐 그런 사람이 스피노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겐, 프루스트 역시 중요하니까.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도 읽다가 멈춘 상태다. 너무 양이 많다. 그런데, 제임스 조이스에 비해서 프루스트의 번역에 대해선 우리나라는 참 조용하단 생각이 든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만화로도 있어 혹했는데, 너무 얇다. 열 권을 읽든, 한 권으로 정리된 것을 읽든간에, 프루스트도 지나치지 못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니체는 늘 새로운 활자에 찍혀서 독자들에게 영원회귀하듯 돌아온다. 전에 나온 책도 새롭게 단장해서 나오기까지 하니 말이다. 먼저, 앨피에서 나온 <가치의 입법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입문서라고 보기에는 사뭇 다른 시각들을 제공하는 신선함을 갖춘 책이다. 저자가 최근의 지적 흐름에도 민감한지, 늘 있어왔던 고리타분한 접근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은 아까 스피노자의 <에티카>란 책과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이 책을 <니체, 철학의 주사위>로 처음 만났다. 영문을 번역한 책이기도 하고, 철학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역자의 탓인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다만 프랑스판에 없는 들뢰즈의 서문이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미심쩍게 보다가, 프랑스판을 번역한 책이 나와서 구했는데, 게으른 독서방법으로 슬금슬금 보게 되었다. 그래서 반 정도 읽었나? 이 책에도 약간 번역에 문제가 있었는지, 같은 역자, 같은 제목으로 얼마 있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새로 번역한 책을 읽을 생각으로, 이 책도 결국 읽다 멈추고 말았다.  

뭐 결국은 게으른 독서을 변명하는 꼴이지만!  

그런데, 중요한 건, 왜 '니체의 철학'이 아니고 '니체 철학'인가? 여기에 꽤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에게 니체는 스피노자나 베르그송 등하고는 또다른 지위가 있는데, 아까 말한 책 <유동의 철학>에서 보자면, 니체만이 들뢰즈 등 뒤에 출몰하는 자로 묘사한다. 아주 노골적인 표현까지 나오는데, 그 상스러움 안에서도 니체와 들뢰즈는 묘한 힘으로 겹쳐진다. 그 부분에서 데리다가 말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모습도 연상되니 재미가 있다.  

왜 '의'가 아니고 '와'인가는 쏙 빼고 딴 애기만 한 거 같다. 딴 애기를 하면서 이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변덕은 느닷없이 나온것이라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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