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있다. 꼭 나쁜 뜻으로 지루하다고 한 건 아니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어려운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불친절하게 섞이고, 그 미로 같은 회로를 통해 기억이 어쨌다더라와 같은 영화 설명은 잠시 제끼자. 오늘 신간 <에크리>를 읽다가, 갑자기 마리앙바드라는 장소를 신비한 눈으로 한 번 쳐다보게 되었다. 물론 마리앙바드는 이 지상에 정말 존재하는 곳인지 나에겐 불명확한 장소이기도 하다.

에크리에 대한 기본적인 예비 입문서로 보이는 <에크리>는 전에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을 번역했던 김석 씨의 책이다. 반 정도 보고 있는데, 라캉의 다른 책들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인 반복 학습의 기회를 제공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에서는 마리앙바드를 마리엔바트(Marienbad)라 표기하는데, 이 곳에서 1936년 개최된 IPA 회의에서 라캉이 처음으로 '거울 단계에 대한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발표를 다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는 자리를 떠난다.    지금에서 보자면, 이 장소에서 벌어진 '발표의 미완성(결여)'은 라캉 이론의 연쇄적 발전을 부채질 하는 원동력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그의 이론처럼 구멍은 마지막 전복이나 끝맺음이 아니라 흐름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알렝 레네의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도 '흐름'은 기묘하다. 단단한 석고상처럼 고정되고 충만한 순간을 찾기 어렵다('코기토의 주체'가 달라붙을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주체의 시선이 편안하게 쉴 장소는 이 영화 안에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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