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기 쉬운 자크 라깡 - 백의신서 31
마단 시럽 지음 / 백의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좋은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영양가가 골고루 들어 있어 우리 몸에 이롭다. 영양이 한쪽으로 과한 것보다 적당히 여러가지가 야문게 낫다.
우리는 라캉에 관한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입문서로 좁혀 본다 해도 그렇다. 그리고 번역도 그 안에서 되먹임 효과가 있었는지 전보다 매끄럽게 나온다. 이젠 라캉에서 자주 나오는 '왜상 (anamorphosis) 효과'를 원하지도 않던 번역서(글)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경우는 어느 정도 줄어든 셈이다.
그런데, 나는 덜 매끄러운 번역서 한 권을 골랐다. 이때는 라캉이 라깡으로 불렸나 보다. <알기 쉬운 자끄 라깡>. 10년의 시간이 우리나라에선 이 남자 이름에서 'ㅋ'이 'ㄲ'를 억압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젠 그의 유령을 부르는 주문에서 '라캉'이 더 효과적인 기표의 자리를 차지했다.
마단 사럽(Madan Sarup)의 이 책(Jacques Lacan, 1992)은 우리나라에서 1994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그래서 그 당시에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지금보다 더 불리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선 조금 불편하고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 용어를 융통성 있게 유의해서 본다면, 그리 험난한 독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용어 세트를 주의하면 좋을 것 같다.
욕망(desire), 욕구(need), 요구(demand)
요새는 위와 같이 대개 번역되는데, 이 책에선 'need'를 '필요'라고 번역했다. '필요'라고 나오면 그것을 '욕구'로 대체해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필요 -> 욕구(need)
그리고 또 라캉에게서 중요한 '(소파의) 누빔점, 고정점(points de capiton)'은 이 책에선 '닻 내리는 지점'이라고 나온다. 더 문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쓰이는 걸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주이상스(jouissance)는 '희열'로 번역했다. 여태 향유, 향락 등으로 어쩔 수 없는 미끄러짐을 겪었는데, 그냥 '주이상스'로 하는 게 무방해 보인다.
이 책은 라캉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기보다, 라캉이 등장하기 전 사회의 사상적 배경으로 좀 더 넓은 맥락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시 클로즈업해서 개인 라캉에게 영향을 준 여러 인물들도 단계적으로 탐색해 들어간다. 즉 (원격)거리조절을 통해서 라캉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매만진다. 그리고 수평적인 이동도 여러 단계를 거친다. 기본적으로 시간적 순서를 따르긴 하지만, 프로이트-초현실주의-철학-언어(학)를 통과하고, 주요 배경이자 인물인 라캉에게 심도(딥 포커스)를 준다. 그의 대표 저작인 <에크리>와 핵심 개념이 담긴 트라이 앵글-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수평 이동은 계속 되는데 풍경이 좀 더 다채로워진다. 성 사랑 페미니즘-영화-문학으로 이어지면서 라캉에 대한 입체적인 스펙트럼은 한껏 뽐냄을 멈춘다.
프로이트 부분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블룸스버리 그룹),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영향 관계-로제 카이유와(동물의 의태 관련), 달리, 앙드레 브르통, 철학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문학에서 햄릿과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독회 참석 일화 등은 흥미로운 것들이다. 라캉의 핵(核)에 비유적 이미지로 다가갈 장치 중에 하나인 매듭-고르디우스, 보로미안과 뫼비우스 띠에 대한 부분도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그렇게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담긴 내용이 알차고 잘 꾸며졌다. 요새 세련된 표지로 나오는 책들에 비해 좀 알뜰한 모양새의 책이지만, 라캉 입문에서 한 수 크게 배울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이 책은 원서로도 구하기가 힘들다(아마존에서도 아마 새책 재고는 없는 걸로 안다). 이렇게 우리말 번역서로 만날 수 있다는 건 한편 다행이란 생각을 해본다. 번역이 약간 매끄럽지 않지만, 그 가치가 높기에 이 책에 대한 나의 평점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