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좋다
나카자와 신이치 외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거장 소리를 듣는 일본의 두 지식인이 얼굴을 맞대고 불교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현란한 빛깔이 화살 날아가듯 머리를 시원하게 뚫고 지나간다. 이런 더운 여름에 짜릿하게 맛볼 수 있는 지적 쾌감이다.

나이가 지긋이 들었는데도 그들의 입담에서는 주름지고 늘어진 사고를 보기 힘들다. 가와이 하야오가 대가다운 넉넉함으로 놀이판을 자연스레 옮기거나 확장시키면, 나카자와 신이치는 유순하게 따라가면서도 팽팽한 활시위를 놓지 않는 패기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과녁을 맞춘다.  

첫 장 '불교로의 회귀'는 상당히 몰입도가 좋다. 불교에만 제한되지 않고 인문학 전반에 걸쳐 옹골찬 시선으로 짚는 빼어난 솜씨가 보인다. 그리고 평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불교와 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성에 대한 고뇌와 불교'에는 감각적인 재미마저 있다. 그것 뿐이던가? 바로 부록처럼 책 중간에 끼여 있는 팔리어를 번역한 '석존과 제자의 섹스 문답집'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에 대한 규정들이 노골적이지만 태연하게 적혀 있다. 이것만을 주제로 삼아 책을 만들어도  대단히 흥미로울 것 같다.

그리고 약간 잠잠한 기운이 든다. 연못에 놀던 개구리들도 숨었는지 활달한 풍경은 아니다. '불교와 부정', 여기서 두 학자는 유독 불교에 '부정'의 기운이 강하게 감돌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연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타당함도 느끼면서 약간 명쾌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인도 전통 철학을 고수하는 브라만 학자들이 '단정'하는 버릇이 있고, 이에 맞서는 불교에서는 '부정'의 테크닉이 발달했을 수 있다는 식이란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전통 사유도 가령 우파니샤드에서도 '네티 네티 neti neti'라는 부정 어법이 강한 편이다. 왜냐하면 (진리, 진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언어를 통해 꼭 집을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 책의 끄트머리에서 예상치 못한 번뜩임과 섬광이 팍팍 터지는걸 구경하게 된다. '대일여래의 한숨-과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이 붙은 장이다. 잠깐 핵심어(구절)를 골라 본다면, 양자론과 만다라, 가상의 레벨, 행렬, 매트릭스는 바로 만다라, 태장계, 금강계, 대일여래의 의도와 동시성syncronicity,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패러독스, 자궁과 뇌의 결합체-어머니와 아들의 결합체, 만다로 모양의 중공中空구조.. 등이다. 대충 어떤 풍경이 담겼을지 짐작은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간혹 인문학자들이 (개론적인 수준의) 현대물리학을 끌어다가 보기엔 멋드러진데, 알맹이 없는 것들을 내 놓는 일들을 많이 봐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특히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런 수준들보다 레벨이 높아 보인다. 만다라를 가상의 시공에서 끝없이 퍼져 나가는 숫자들의 연속적인 흐름(행렬, 매트릭스), 그 자체의 총체로 설명하는 양자론적 시각은 여태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된 지적인 향유로만 이어졌다면, 오히려 더한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간 이후에 약간 잠잠한 맛이 끝에 활달한 기운을 만나 기분좋게 솟는 느낌. 이것은 <불교가 좋다> 이 책이 가진 자연스러운 리듬감인데, 그 높고 낮음의 율동이 불교를 통해 한바탕 즐거운 두뇌춤을 추게 만들었다. 두 연주자의 솜씨는 물론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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