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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 남자, 맥스의 머릿속은 기억들을 되먹임하며 해변을 걷는 붓이 하나 들어 있는 듯 하다.
독자는 그래서 처음부터 회화적 빛이 감도는 수 많은 언어들(붓놀림)이 그의 과거를 향해 발산하고 산란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순전히 유희라고 하기에는 지독한 일관성이 있다.
맥스는 최근에 아내를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어릴 적 살던 바닷가로 잠시 돌아온다. 이 곳에서 그는 현실에서 갑자기 사라진 결핍, 그 시린 틈 안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거기엔 아버지가 떠나고 늘 생활고에 지친 엄마와 단둘이 사는 보잘것 없는 소년 맥스가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소년 앞에 마치 신들처럼 부티나는 그레이스가 사람들이 내려온다(나타난다). 소년은 처음엔 여신?(그레이스 부인)을 동경하다가 한순간에 그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뜻밖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여신을 바라보던 열정은 그냥 덧없이 사라지지 않고 곧바로 여신의 딸인 클로이에게로 향한다.
클로이... 아마 이 소설에서 맥스의 과거를 다시 맥박뛰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억의 입자는 이 여자일 것이다. 클로이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맥스가 찾은 이 바닷가는 그냥 (차가운 물의) 회색빛 밀려듬일 테고, 그는 정말로 거기에 자신의 죽음의 빛깔을 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인물인 클로이는 처음부터 눈에 띄게 묘사되거나 다루어지지 않는다. 둘이 입맞춤을 하고 짧게 사귀긴 했지만, 여느 소년, 소녀들의 만남과는 사뭇 달랐다. 맥스는 자신의 기억 안에서 클로이의 몸은 잘 더듬는다-자태가 이쁜 소녀로.. 그러나 그 여자의 성격과 내면에 대해선 흐릿한 덧칠의 흔적만을 찾아 낸다.-그렇게 착하지는 않았던 거 같고, 동생의 장난을 귀찮아 했으며, 변덕을 잘 부리던 소녀-. 둘이 서로 교감이 없었던 탓이리라. 그래서 클로이는 맥스의 막 시작하는 사랑이었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이었고, 늘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서 있는 여자였다.
소설이 중간으로 넘어가면서, 클로이에 대한 기억과 최근에 잃은 아내, 애너의 기억이 서로 교차하면서 맥스의 머리속을 맴돈다. 두 여자가 중첩되는 것이다. 그럼 이 중첩이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일까?
화가 보나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다.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가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그림인 <욕조의 누드>가 있다. 보나르는 60살에 가까운 아내를 젊은 여인의 알몸으로 그렸다. 이 욕조 안에서 마르트는 하나의 실물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이 욕실의 이국적인 벽과 모양, 그리고 묘한 빛덩이들과 어우러져 다시 보나르의 머릿속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거기엔 보나르의 기억과 빛으로 구성된 마르트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이 보나르의 욕조가 어쩌면 맥스에게는 바로 바닷가가 아닐까? 여기서 어떤 타당한 이유 없이 (여신이 되고도 남을) 아름다운 클로이는 점점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멀리서 아주 작은 점이 되어 결국 맥스에게도 그 여자의 가족들에게도 영영 사라지고 만다. 이 사라짐의 기운, 그 분위기는 바로 맥스의 아내 애너의 죽음(의 기억)과도 이어진다. 이 바닷가가 바로 두 여자의 소멸, 현재(애너)와 과거(클로이)가 중첩되는 또다른 보나르의 욕조가 된 듯이 말이다(맥스는 바닷가를 스크린 삼아 자신의 기억들을 모아 하나의 영화로 흡수해서 감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女神이 사라지는 소멸의 점! 여기서 한 장의 커다란 해변 그림 같은 이 소설의 긴 호흡이 멎는다. 나머지는 작은 파도의 출렁임 같은 여운... 왜 앞서 이 소설에서 유희의 지독한 일관성을 느꼈다고 했는지 이제는 어렴픗이 알 것이다. 이 소설은 맥스의 기억을 끊임 없이 건드리며 산란하는 (보나르풍의) 빛과 색조들이 그려진 회화와 같단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소설에 쓰인 단어들도 그러한 산란을 겪어야 했고, 마치 언어의 유희가 지속되는 것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 그림에서 그 빛이-이 소설에서 그 기억이- 멈추지 않았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맥스의 기억이 저 소실점으로 끌려 가 투명하게 사라질때까지...
그래야 이 해변의 그림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