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낀 서양 스님처럼 생긴 켄 윌버(Ken Wilber)의 책이 새로 나왔다. <의식의 스펙트럼(The Spectrum of Consciousness)>, 흔히 말하는 문제작에 속하는 책이다. 켄 윌버의 다른 책들도 우리나라에 이미 여러 권 나와있다. 그런데 정작 그 남자의 첫 번째 책은 여기서는 다소 늦게 소개되는 셈이다. 미국에선 1977년에 처음 나왔으니 벌써 30년 전이다. 이 책은 켄 윌버가 이미 이십대 초반쯤 마무리를 지었지만, 받아 주는 출판사가 없어 몇년에 걸쳐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매니아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데, 동서양이 맞물린 최고지식을 가려 뽑아 스스로 수행을 통한 높은 식견으로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해낸다는 소리를 듣는다. 흔치 않은 독특한 색깔을 가진 지성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엇비슷한 작업, 가령 서양의 최신 과학 이론과 동양 사상을 중매하는 일들은 많지만, 그 색깔만 화려한 표피는 시간이 흐르면 금방 벗겨질만큼 가벼운 것들이 많다.

분명 켄 윌버는 그런 자기 흥에 겨워 성급한 짜맞추기에 급급한 지식인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여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사유의 성과물이라고도 보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동양 철학의 정수를 알지 못하는 서양인에게는 그 남자의 결과물이 너무도 새롭고 경이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다. (학파로서의) 상키야, 요가, 베단타와 불교의 화엄 그리고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중론'의 엄격한 논리적 비판력)에 대해 어느 정도 살펴본다면, 켄 윌버가 이 사상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섭취했고, 새롭게 이용하는지 알 수 있다. 거기다 새로운 과학인 시스템 이론도 제한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거에 그러한 개념이나 설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쓸 수 있다는 건, 단순한 반복이라기 보다 또다른 창조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걸 활구(活句)라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이십대 초반에 자기 지성의 기획이 담긴, 그리고 거대한 지적 영향력을 가진 책을 썼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이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처럼 '스펙트럼'은 여러 의식 단계(혹은 지식)의 풍경들을 끊어진 갈래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각기 차이로 인해 구별되는 레벨을 갖지만, 그것이 (퇴보와 상승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통합적 사고에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중에 요긴하게 쓰이는 '홀론' 개념과도 짝이 잘 맞는다.

<의식의 스펙트럼>을 좀 더 대중적으로 다듬었다는 책이 <무경계(No Boundary)>이다. 책 제목을 처음에는 '의식의 경계(Boundary of Consciousness)'로 했다가 나중에 무경계로 바꿨다고 한다. 책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처음 지은 제목이 더 적당해 보인다. '무경계'란 제목은 내용에 비해 너무 높게 잡은 느낌마저 든다.  처음 켄 윌버가 두각을 나타낼 때, '프로이트와 붓다의 만남'이란 소리도 들었다지만, 이 책을 보면, 오히려 페르소나와 (전인적) 자기 성장을 강조하는 융과 겉그림이 더 가까워 보인다.

켄 윌버는 나중에 <의식의 스펙트럼>과 <무경계>에서 낭만적 관점으로 인한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는데, 아동기에 대해 순진하게도 어른의 입장에서 '상실한 낙원' 쯤으로 설정한 부분이다. 즉 전단계와 초월 단계를 구분 못한 것인데, 나중에 아동기는 전단계로 수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무경계> 책 뒤에 '켄 윌버의 사상'에서 번역자(김철수)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모든 것의 역사>는 그의 통합적인 관점이 제대로 드러난 또 하나의 야심작이자 대표작으로 보이는데, '온우주'와 '홀론' 개념이 주요하게 쓰인다. 그의 사상을 분명하게 종합적으로 구성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어떤 하나의 눈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레벨의 눈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켄 윌버는 크게 감각의 눈, 이성의 눈, 관조의 눈으로 나누는데, <아이 투 아이>라는 책 제목은 바로 감각의 눈에서 관조의 눈으로 상승적 이행을 내포하는 제목이라 보인다. 이 책에서는 '의식의 만다라 지도'라는 소제목을 가진 장이 눈길을 끈다.

 <감각과 영혼의 만남>은 그래도 최근의 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데, 1부에서는 그 전의 책에서 다루어진, '존재의 대사슬', '(진리의) 네 상한(the four quadrants) 등이 다시 간략히 설명되고 있으며, 이후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철학 등 현대철학에 관한 내용들이 비판적으로 자주 나온다. 들뢰즈(Deleuze)를 델루즈라고 표기했는데, 미국에선 델루즈라고 읽는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철학뿐만이 아니라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지식의 영역들이 다루어지는데, 처음 켄 윌버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는 아내(트레야)의 투병과 그것을 지켜보는 켄 윌버의 사적인 이야기로 채워진 책으로 알았는데, 꼭 그런것은 아닌듯 하다. 기회가 되면 구해서 봐야 할 거 같다.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는 지금은 절판이라 구할 수 없는 책이다. 나는 다행히 고려원에서 나온 걸 가지고 있다. 원제는 'Quantum Questions'으로 이 책에서 켄 윌버는 서론 부분과 편집을 맡았다. 따라서 나머지 부피에는 다른 과학자들, 하이젠베르그, 슈뢰딩거, 아인슈타인 등의 글이 차지한다.

 

<영혼의 거울(Sacred Mirrors)>은 알렉스 그레이의 그림집 같은데, 여기에도 '화가의 눈 - 예술과 영원의 철학'이라는 켄 윌버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딱히 알렉스 그레이의 그림을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책 가격에 비해 쪽수가 적어서 아마 볼 기회는 없을 듯 하다. 비닐커버로 닫혀진 책이 아니라면 나중에 서점에서 보면 될 거 같다. 그런데 알렉스 그레이의 인체 투시도?는 단지 상상으로 그려진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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