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 환영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재를 바라는 것은 무모함이요 경솔함이다.

- 내 힘으로 절대 안 되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우리 세상에 임하십니다. (외계로 떠나지 않으십니다.)그러나 환영이 있기 전에는 임재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사가 없으면 방문이 만족스러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환영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습니까? 그분을 영접할 환대의 기술, 그분이 우리 삶과 세상에서 환영받게 할 기술을 연습하고 있습니까? - P59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성경에 충실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이들과 광야의 삶을 함께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낌없이 사랑할때, 비로소 성경에 충실한 것입니다. - P62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새번역.
종교(기관, 신경, 문서, 인공물 등)는 분명히 찾아볼 수 있겠지만, 믿음은 그럴 수 없을지 모릅니다. 믿음은 속속들이 인격적이고 역동적이고 궁극적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믿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예를들어, 종교는 기관(교회), 문서, 신앙진술(성경과 신학), 그리고 우리의 신념과 도덕률에 관심을 둡니다. 종교는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유일한 목적은 믿음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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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단순한 질문에는 좀 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온전해지고 싶으냐? 최고의 모습으로 살고싶으냐? 저는 그 사람이 반쪽짜리 인생에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저 그런 삶에 적응했습니다. 그럭저럭 지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핑계를 대며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말에는 자기연민이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반쪽짜리 인생이다른 사람들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상태를 지속할 이유를 찾기는 쉽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냥,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의존하는 쪽이 더 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낫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더 의미 있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 P43

예수님은 그 사람의 핑계를 무시하고 온전함을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일을 명령하고 탁월한 삶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그런 삶을 받아들일 힘이나 능력이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죄에 눌린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틀에 박힌 그릇은 열정적인 삶을 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게 죽어 가는 상태로" 또 하루, 또 한 시간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잘 맞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우리가 그 일을 잘할 수 있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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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시작들에 관하여

- 말씀이 첫 번째였습니다
- 출생

말씀이 첫 번째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이 두 번째였다면 또는 세 번째나 네 번째였다면ㅡ우리는 창조의 깊은 신적 리듬과 연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이 옆으로 밀려나 행동과 프로그램의 종이 되었다면, 우리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속의 광대한내면적 샘과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허투루 대하거나 부주의하게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본질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함으로부터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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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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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로처럼 보는 법

내 주변에는 소로를 닮은 사람이 있다. 어딘가 답답하기도 하고 가끔은 지치게도 하는 사람인데, 소로의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 아름다움을 보려 노력해야겠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두고, 여러 각도에서 훑어보기.
나만의 월든을 찾기에는 너무 정신 없는 삶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더 찾아봐야지. 아름다움을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어쩌면 머그컵처럼 보이는 저 물체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있다."

조류학자는 공작새가 형형색색의 깃털을 뽐내는 생물학적 이유는 알아도 그 아름다움은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소로는 말한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피로에 지친 눈으로는 조금밖에 보지 못한다.
소로는 "순진무구한 눈‘을 연마했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경이를 한 번도 잃지 않았다. 산딸기를 따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소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년이고, 언제까지나 나이 든 소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 만들겠다고 했다.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음미하다‘와 비슷한 시각 관련 단어는 없다(어떤 대상에 시선이 머무른다‘라고 말할수는 있지만 이 표현에는 ‘음미한다‘ 같은 감각적인 느낌은 없다).
나는 보는 데 게으른 사람이다. 내 시선의 대상이 모든 일을 다해주길 바란다. 경치, 한번 나를 황홀하게 해봐. 제기랄, 아름다워지라고! 그 대상이, 예를 들면 알프스 산맥이나 모네의 그림이 내 말도 안 되는 기대에 못 미치면 나는 내가 아닌 그 대상을 탓한다.
소로는 다르게 생각했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소로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을 "마음 검사"로 여겼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정말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나만의 월든인 이곳에서 더 명료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각적 깨달음, 소로가 성취한 "단하나의 확장"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말에서 위안을 얻는다.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소로가 내게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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