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장은 실천적인 성격의 챕터였다.

어떻게 하면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킬 수 있을까? 911 등을 거론하며 저자는 화평의 길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종교 간 협력’이라는 부분은 좀 애매하게 느껴졌다. 종교간 협력이 믿음의 타협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그걸 진정한 협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봉사를 하는 것이 겉보기에만 좋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거 아닐까?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인 듯하다.

그리고 8장에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좋은 부분을 결합하는 것이 정치에 있어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좀 새롭고 좋았다. 개인의 선택과 제도적 틀은 사실 둘 다 중요한 게 맞으니까.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데만 급급한 우리나라 정치상황에 주는 교훈이 있는 듯하다.

파면과 관련해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인용 전문에서도 협치하지 않고 서로 갈라서기만 하는 점을 비판한다. 이 기회에 그냥 파면 선고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는 게 좋겠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 파면 선고를 들으면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기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이 일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다시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반복된 탄핵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의 표면화처럼 느껴졌다. 여야는 협치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정작 시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좋은 방안은 뒷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시민의 승리’라며 자축하는 분위기도 약간은 불편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런 표현이 필요할 수 있지만 이것이 단지 승리의 환호로 끝나버린다면 그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 차례 탄핵을 겪은 우리가 같은 문제를 되풀이했다는 점에서 찬반을 떠나 모두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흘러갈까봐 걱정이 된다.

정말로 기뻐해야 할 건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아닐까. 반성 없는 환호가 아닌 함께 돌아보고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기쁘기는 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super-ego 개념과는 달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편입시킴으로써 내면에 그들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 P71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말할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랜만에 다시 읽는데 재미있다.

이 ‘비밀‘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알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 P53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집트 문명.

태양력이 나일강의 범람 시기를 측정하는 과정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일강의 범람 덕분에 비옥한 토양을 얻게되고 그로 인한 풍요를 누릴 수 있었기에 그렇게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구나 싶었다.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와 헬레니즘,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시기를 간단히 훑어볼 수 있어 좋았다.

무하마드 알리의 수에즈운하 개통에서부터 영국과의 관계가 얽혔다는 점, 지리적 위치와 종교 등의 이유로 중동전쟁에 엮이고 있다는 점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어 좋았다.

나중에 다른 영상이나 자료들로 더 알아보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비적인 기도와 예언적인 기도
예언적인 기도의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다가서듯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데 있다. 신비적인 기도의 정점이 고요 속에 누리는 평안이라면, 예언적인 기도의 궁극적인 표현은 입술의 찬양과 강렬한 감정 분출이다. 신비적인 기도가 자아와 신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쪽을 향한다면, 예언적인 기도는 자신과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차이를 더욱 뼈저리게 실감하는 방향으로 데려간다. 죄로 가득한 스스로의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언적인 기도는 그처럼 죄에 물든 인간이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길이 열렸음을 왁자지껄 표출하기도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자고로 기도라고 하면 간구로 시작해서 고백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말없이 희열을 만끽하는 명상에 들어가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언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어느 하나를 나머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여기지 않는다. 묵상과 간구, 감사와 고백, 찬양이 동시에 이뤄진다고 본다. 사실, 예언적인 기도는 이들을 다 아우르며 서로 자극을 주고, 깊어지게하며, 이편과 저편을 이어 준다.

그러나 유념할 게 있다. 기도는 보편적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기도가 똑같은 건 아니다. 오히려 지켜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힐 만큼 다양하고 다채롭다. 북미 원주민 샤먼은 의식 중에 곧잘 황홀경에 빠지고,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찬트를 음송하며, 맨해튼 사무실에서는 수행자들이 요가에 열을 올리고, 17세기 청교도 사역자들은 몇 시간씩 목회기도를 드렸으며,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게서는 방언기도를 흔히 볼 수 있고, 무슬림들은 이마와 양손, 두 무릎과 두 다리를 땅에 대고 메카 방향으로 엎드려 수주드(sujud)를 행하며, 하시딤(Hasidim)은 몸을 앞뒤로 흔들고절하며 간구하고, 성공회 사제는 공동기도서를 낭송한다.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지각색인 기도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또 무엇인가?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