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당. ~p.57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P38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 P40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처럼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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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 미 있 당

짐니 2023-07-0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 미 있 당

지닝 2023-07-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분발할게여,,,🫶
 

평범함 속에 자리하는 비밀


편안함을 고수하지 말고 포장을 벗겨내 확장하기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수준으로 축소하고 그분을 안락한 생활의 관리자로 만들곤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챙기고 그 부분에만 집중합니다. 나머지는 빼버리지요. 같이 예배드리면 좋은 소수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 편안함을고수하려 합니다. 다른 이들은 배제합니다.
그러다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초기 신자들의경험을 읽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진짜 교회가 되기 원한다면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경험으로 우리 삶이 확장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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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 환영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재를 바라는 것은 무모함이요 경솔함이다.

- 내 힘으로 절대 안 되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우리 세상에 임하십니다. (외계로 떠나지 않으십니다.)그러나 환영이 있기 전에는 임재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사가 없으면 방문이 만족스러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환영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습니까? 그분을 영접할 환대의 기술, 그분이 우리 삶과 세상에서 환영받게 할 기술을 연습하고 있습니까? - P59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성경에 충실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이들과 광야의 삶을 함께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낌없이 사랑할때, 비로소 성경에 충실한 것입니다. - P62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새번역.
종교(기관, 신경, 문서, 인공물 등)는 분명히 찾아볼 수 있겠지만, 믿음은 그럴 수 없을지 모릅니다. 믿음은 속속들이 인격적이고 역동적이고 궁극적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믿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예를들어, 종교는 기관(교회), 문서, 신앙진술(성경과 신학), 그리고 우리의 신념과 도덕률에 관심을 둡니다. 종교는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유일한 목적은 믿음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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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단순한 질문에는 좀 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온전해지고 싶으냐? 최고의 모습으로 살고싶으냐? 저는 그 사람이 반쪽짜리 인생에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저 그런 삶에 적응했습니다. 그럭저럭 지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핑계를 대며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말에는 자기연민이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반쪽짜리 인생이다른 사람들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상태를 지속할 이유를 찾기는 쉽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냥,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의존하는 쪽이 더 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낫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더 의미 있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더 쉬울 수 있습니다. - P43

예수님은 그 사람의 핑계를 무시하고 온전함을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일을 명령하고 탁월한 삶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그런 삶을 받아들일 힘이나 능력이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죄에 눌린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틀에 박힌 그릇은 열정적인 삶을 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게 죽어 가는 상태로" 또 하루, 또 한 시간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잘 맞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우리가 그 일을 잘할 수 있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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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시작들에 관하여

- 말씀이 첫 번째였습니다
- 출생

말씀이 첫 번째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이 두 번째였다면 또는 세 번째나 네 번째였다면ㅡ우리는 창조의 깊은 신적 리듬과 연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이 옆으로 밀려나 행동과 프로그램의 종이 되었다면, 우리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속의 광대한내면적 샘과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허투루 대하거나 부주의하게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본질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함으로부터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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