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눈살이 찌푸려졌고 때때로 험한 말이 나왔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담겨 있는 이야기와 다르게 부드럽게 넘어가는 글자들이, 책장들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어느 날 더 이상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한 여성의 시공간을 그의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각자는 삶에서 법과 정상성을 따른다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강요의 폭력을 버티거나 적응해 가며 살아간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영혜는 명치에 걸린 응고된 피를 뱉을 수 없어 스스로를 말려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생명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진다.
스스로를 말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남편은 그녀에게서 돌아섰고, 형부는 정상성 너머의 욕망을 능력껏 포장하다 발가벗겨졌다. 남은 건 언니뿐이라는 것이, 함께 상처받고 견뎌 온 여성이라는 점이 이 책에 사실성을 더해준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그녀’, 즉 영혜의 언니일 테다. 견디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면서도 정작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그’의 연약함을 봐주었다면 ‘그’ 또한 그녀의 연약함을 봤어야 하지만, 섬세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그’에게 왜 그러한 눈은 없었을까.
폭력이 무서워 조숙함을 덮어쓰고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질책하는 그녀의 삶에 어느 누가 탄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탄식하지 않는다면 둘 중에 하나다. 인간이 아니거나 폭력의 주체이거나.
그렇지만 내가 어느 누구를 욕할 수 있을까. 사실 욕할 수 있다. 그러나 욕할 수 없다. 나 또한 결백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 사람을 이렇게 만든 사회 구조를 향해서는 “어둡고 끈질긴” 항의의 눈길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 자체를 욕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 물들어 있는 폭력을 향해서는 고함을 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인간이라면 적어도 그 고함에 분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처럼 초록빛의 불꽃이 되기를 택한 영혜가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 하나를 남겨두고 마무리하려 한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p.214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 P61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 P161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P192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 P203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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