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성공의 윤리

사회적 가치와 능력을 동일시한 하이에크에게 나이트는 그러한 가치는 도덕적 고려에 의해 마련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생산적 기여의 시장 가치가 윤리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에 도전함으로써, 나이트는 능력주의를 하이에크보다 더욱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능력주의에서 비롯되는 자기만족에 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하이에크는 부자들에게 비록 그들의 부가 곧 능력의 징표는 아니지만, 사회에 그만큼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했다. 그러나나이트에게 이는 과한 아부일 뿐이다.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 성공한 사람이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뒤죽박죽된 욕구와 욕망(중대하든 하잘것없는 어느 시점에 소비자의 수요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서 관리(천재성과교활함, 시의성과 재능, 행운과 오기, 고집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혼합)를 잘 해냈다는 것밖에 없다. 소비자 수요의 충족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 가치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의 도덕적지위에 따라 정해진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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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공의 윤리

2주만에 읽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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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나머지를 읽었는데 학력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볼 만한 말들이 많았다.
학력이 높다는 게 좋은 통치 능력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 핵심 중 하나였다. 이러한 주장을 보여줄 예는 널리고 널렸으니..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 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 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두 경우 모두 정반대로 생각할 점이 있음을알게 된다. 부 또는 가난은 각각의 사회적 지위와 자부심을 상징한다는점 말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인식할 것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런 관점에서, 부자가 된다면 귀족제에서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가 더 낫다.
비슷한 이유로 능력주의 체제에서 가난하다면 맥이 빠지는 일이다.
만일 봉건사회에서 농노로 태어났다면 힘들게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낮은 지위가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부담은 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도록 일해서 받들어야 할 지주가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탁월해서그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볼 것이다.
이와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밑바닥에 놓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자신이 겪고 있는 불우함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스스로의 탓이라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재능과 야심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적 상승을 허용하는 사회, 하물며 그런 상승을 찬양하는사회에 산다는 것은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혹독한 판결을 내리기 마련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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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이자 해결사로 오랫동안 일해왔던 마이클 코언은 청문회에서, 트럼프가 다녔던 대학들과 대학 이사진에게 트럼프의 대학 성적이나 SAT점수 등을 밝히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음을 밝혔다. 2011년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학업성적을 공개하라고 몰아붙인 바 있었다. 이 일화는 트럼프의 위선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력이 얼마나 공적으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나타낸 사례이기도 하다.

- ‘스마트하다‘와 ‘우둔하다‘

-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힘들지만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또 아닐 때다),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이 된다.˝p.159

자신의 학력에 별 문제 없는 인사까지도 때로는 자기방어에 급급한태도를 보인다. 2018년 트럼프의 미 연방법원 판사 지명자(그리고 결국인준자) 브렛 캐버노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떠올려 보자. 청문회 막바지, 그의 인준이 어떤 여성의 고발 때문에 불투명해졌다. 고교 시절에 캐버노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고발이었다. 그가 정말 취한 상태에서 성폭력을 했느냐고 상원의원들이 묻자, 캐버노는 혐의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뜬금없이 자기 학력 변호까지 늘어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느냐면서 예일대와 예일 로스쿨에 입학했다는 것까지 강조했던 것이다.
고교 생활기록부에 음주와 성폭력 건이 기재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그는 대답했다. "저는 우리 학년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죽어라고 공부했어요. 대학 농구팀 주장이었고요. 예일대에 들어갔고요. 예일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이 나라의 제1등 로스쿨이죠. 거기서 저는 오직 공부만 파고 또 팠어요."10문제는 캐버노가 공부를 잘했느냐 여부가 아니었다. 그가 18세 때술을 마시고 파티에서 소녀에게 성폭력을 가했는지가 주제였지만, 그는 공부 이야기만 거듭했다. 하지만 2018년 당시 학력주의가 하도 만연한 나머지, 학교의 대문을 훨씬 넘어선 곳의 도덕, 정치 논쟁까지 좌우할 만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 P144

대학 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 P144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년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그런 역효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어느 것이나 노동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미국인 대부분은 대학 학위가 없다. 관리자 또는 전문직업인으로서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이 사실이 뜻밖일 수 있다. 비록 최근에 대학 졸업자 비율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미국의 성인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대졸자의임금 수준을 한껏 높이는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에서 스스로의 책임을면제해준다.
둘째,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에게 고약한 편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연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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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 시장 메커니즘과 함께 능력주의는 잔재해있던 신분, 인종, 경제적 차이, 성별 등으로 인한 계급을 타파하고 능력이 있는 누구나 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과 생산성이라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진보주의자들은 ˝제3의 담론도 내놓았다. ..즉 사람들이 오직 노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루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드러난 부정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1.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
2. 사회적 상승에 대한 언어적 포장: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
=> 이것이 능력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대통령 가운데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캘빈 쿨리지, 그리고 허버트후버였다. 이는 철저히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가난하거나 병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며, 정부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 도중에 사용된 표현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이 표현을 가끔 썼다. 하지만 그의 경우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도중에 언급된 것이었다.˝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문구를 그의 어떤선임 대통령들보다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 후임인 두 사람의 민주당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는 레이건보다 두 배나 많이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레이건처럼 은연중에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정부 보조를 받을 만했다. 다만 불우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자격이 없었다.˝
- 정부 보조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개인의 노력, 의욕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들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 외의 요소들을 전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는 것일 테다. 정치인들은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전략이었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보니 ‘아무 이유 없이‘ 지원하는 것은 세금 낭비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정부 지원 결정 과정에 포함되어야 할 ‘이유‘에는 개인의 능력 요소만이 들어간다. 능력이라는 건 매우 우연적인 요소들의 결합 결과이고, 하물며 능력을 얻기 위해 노력할 힘마저 그 주변 환경이나 천부적 재능과 같은 요소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말이다. 참 어려운 것 같다. 그 중심을 잡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다.


고등교육에 관한 오바마의 말
˝가장 중요한 점은 명석하고 동기부여가 잘 된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재능이 그리고 그들의 직업윤리와 꿈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 요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해서 써 보기

-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 ˝레이건 이후 ˝자격이 있다˝는 말은 당파를 불문하고 대통령들의 상투적 문구가 되었다. 클린턴은 이 말은 레이건보다 두배 더 썼다. 오바마는 세배였다. 그 맥락은 일상적인 언급에서부터 의미심장한 발언까지 두루 걸쳐 있었다. 클린턴은 국방부 산하 센터를 유치해 일자리 창출이 기대되는 한 도시에서 연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받았습니다.˝ 오바마는 도매 상점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땀흘려 일한 이상 그의 마땅한 급료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오하이오에 개방 대학에서 연설할때 오바마는 중산층에 대한 감세를 옹호하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세금우대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죠.˝
˝영국에서는 1990년대 토니 블레어의 의해 제창된 능력주의 신념이 계속 영국 정치를 휘어 잡았다. 심지어 브렉시트 국민투표 뒤에도 말이다. 2010년 수상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테레사 메이는 ‘영국을 진정으로 능력주의화하는 비전‘을 내세우면서 ‘보통 사람들, 노동계급‘이 그 주인공이라 했다. 그녀는 그들은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그녀가 제시한 더 나은 조건이란 바로 능력주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보다 미국에서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 (이중 덴마크가 이동성이 가장 크다.)

- 힐러리와 트럼프의 대결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이유
˝힐러리 클린턴의 불운이랄까. 사회적 상승에 관한 담론은 2016년 그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그녀를 누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이야기나,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트럼프는 유세 기간 중 이 구호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또한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런 이야기를 일절 안 했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한 거친 발언을 내놓으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위대함의 비전은,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활발한 공적 담론을 일으켰던 능력주의적 기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해 초 영국에서 예상을 깨고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선거는 복합적 이벤트이므로 어떤 일이 투표자의 표를 이끌어냈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기존 질서에 대한 포퓰리즘적 증오가 꼭 능력주의적 오만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혐오증, 인종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감 등도 한몫했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반격에 있어 적어도 일부는 능력주의 위계질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자들이 그들보다 덜 성공한 자들을 깔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촉발되었다. 이런 포퓰리스트들의 불만은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수 있으리라‘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또는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사정을 챙기지못했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약속이라기보다는조롱이었다.(p.123-124)˝
-우리나라가 많이 생각난다. 이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학에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우대정책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운이나 기타의통제 불가능 요인으로 입학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 P107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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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이 챕터에서 샌델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나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기독교에서부터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토대가 기독교에 있으며, 능력주의를 정당화했던 많은 권력자의 입장의 토대가 기독교적 섭리론(내 생각에는 왜곡된 기독교적 입장)에 기초해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샌델은 먼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의 신, 즉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상을 주고 악한 행위를 하면 벌을 주는 신의 모습을 간단히 짚고(이를 그는 능력주의 신학이라 부른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응보적으로 상벌을 받는 것이기에), 이후 <욥기>에서의 신, 즉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신의 모습을 짚으며(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한 벌을 받는다.) <욥기>에서의 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그가 첫 번째로 말한, 성서에 나타나는 능력주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샌델은 성경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치 신의 모습이 성경 안에서 모순적으로 그려진 것인 마냥 대립시켰다. 이는 먼저, 근본적으로 욥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다. 욥기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창세기와 모순되는,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신이 아니다. 욥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결점 하나 없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함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점이 욥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신은 인간과 차원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임을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다루는 차원의 상위에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죄성을 논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욥기에서의 신을 창세기 출애굽기에서의 신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을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신학을 능력주의 신학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에 대한 샌델의 주장부터 먼저 살펴보자.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는.
하지만 신이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역설적으로 신은 우리에게 구속받게 되며, 신이 정당한 이상 우리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야만 하게된다. 신이 상벌의 주체라 하지만 그는 각자의 실적에 따라 처리할 뿐 임의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p.

나는 여기서 두 번째 문단에 주목하고자 한다. 샌델은 하나님이 인간의 선에 상을 주고 악에 벌을 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신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존재가 됨으로써 신이 인간에게 구속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샌델이 표현한 것처럼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없어도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모든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로서 오로지 그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의로 이끄는 존재이다. 신은 절대로 인간에게 구속받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상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미지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능력(행위)가 신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능력주의 신학으로의 해석은 주객전도된 잘못된 해석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게 다 운명이다 라는 게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든 있든 간에(지금의 대부분의 신학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본다) 신은 인간과 구분되어 자존하며 인간의 기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오해한 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성경은 이를 그 안에서 번복하면서 그 자체로 모순인 책이다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하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실제로 이런 책을 통해 성경의 내용 일부를 접하고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


다시 챕터2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후 그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인 ‘구원’에 대한 논쟁이 세월을 거쳐 칼뱅에 이르러 능력주의적 사고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다해 직업 행위를 함으로써 결실을 맺는 것을 구원의 표증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능력주의적인 섭리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성어거스틴)에서부터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신의 은총‘이냐 ‘율법준수와 선행으로부터 오는 자기구제‘이냐라는 질문에는 공통적으로 전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제 칼뱅이 구원의 표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서 직업행위와 그 결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근면성실함으로 얻은 부와 소유들을 구원의 표증, 신의 축복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짚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쟁이 기독교 자체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가깝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구원과 자기구제에 대한 논쟁은 성서 속 초대교회에서도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논쟁이 없고서야 사도바울이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반복적으로 외쳤을까. 아무튼 기독교 교리 자체와 그를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입장들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저런 내용들을 읽고 나서 너무나 쉽게 기독교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면..ㅎ 샌델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적 토대는 미국의 건국부터 클린턴,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의 능력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부와 건강함을 신의 섭리로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펼치는 모든 정책의 정당성을 “정의로 향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하게 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문구(아이젠하워가 토크빌에게서 잘못 인용한 말. 미국인의 기본적 의식으로 많이 깔려 있다고 함.)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이러한 섭리론, 즉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받은 신의 축복이다”라는 섭리론이 지금의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걸렸던 점은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이에 따라 이 챕터를 읽는 비기독교인에게 성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겨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좀 길게 썼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챕터 전체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챕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현재 왜곡된 기독교적 섭리론이 능력주의를 정당화해왔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의 한국 교회들을 보면 이러한 능력주의, 번영 복음주의가 많이 있었다. 조금씩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생기면서 변화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많다. 가장 단적인 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전 말씀들까지 포함하면 이렇다.

(빌립보서 4장 / 개역개정)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한 줄만 따로 빼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식으로 정말 많이 해석한다. 결국 이는 본래의 의도가 아닌 제 입맛에 맞춰 성경을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또 길게 썼는데 이만 힘드니 여기서 끝.
오늘의 교훈. 잘 읽자. 의도를 잘 파악해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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