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에서 나를 네댓 장 찍기도 했고, 『소설신조』에 실린 다자이 오사무의 만취한 사진도 거기서 찍었다.

연하장의 주인공은 도호쿠 지방의 산골 마을 주민으로 나이는 스무 살 안팎, 아마 열여덟 살 정도가 아닐까. 이불 위에 여자가 한 명 누워 있으면 얼추 만점이란 눈부신 착상이 산골 사내아이란 생각이 안 들 만큼 얄밉지만 말이다.

원고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914년 고교 동창생인 기쿠치 간, 후에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활약하는 구메 마사오 등과 함께 『신사조』(제3차), 1916년 『신사조』(제4차)를 창간했다. 『신사조』는 1907년 오사나이 카오루가 제1차 창간한 이후 도쿄대 동인지로 1979년까지 산발적으로 발행됐다. 『신사조』는 동인지였기에 당연히 고료가 없었다. 1916년 첫 고료에 실망한 그였지만, 1917년 「희작삼매」가 마이니치신문에 실린 것을 계기로 1919년 마이니치신문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고료 외에 월급 50엔을 받다가 후에 150엔으로 올랐다고 알려졌다.
「원고료」는 1923년 5월 30일 도쿄니치니치신문에 실린 글이다.

문방구 만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23년 간토대지진을 겪은 뒤 지진을 두려워하며 도쿄를 떠나 교토, 고베, 효고 등 간사이 지방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이후 초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치인의 사랑』을 시작으로 『만지』, 『하국』 등 모든 연재 작품을 우편으로 잡지사에 보냈다. 1930년 효고에 살 때 이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이자 소설가인 사토 하루오와 그의 아내가 결혼했다. 1921년 사토 하루오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를 양보하겠다는 연하장을 문단 동료에게 보낸 적 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그들의 아들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문방구 만담」은 1933년 10월 잡지 『문예춘추』에 실린 글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지와 서양지, 두 종류의 원고지를 만들어 두고 일본지일 때는 붓으로 쓰며 서양지일 때는 연필로 쓴다. 내 취향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현실상의 필요로 그렇게 하게 되었다.

설사 잘못되더라도 인간은 제멋대로인지라 자신의 실수라면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쉬이 받아들인다.

연필은 원고지 사이에 카본지를 끼우고 복사할 때 쓴다. 조금 소리가 나고 저항감이 있고 적당한 연필깎이가 없다(요사이 나온 바리캉식 연필깎이는 제법 쓸 만하다, 책상에 붙박아 두는 기존 녀석은 풍류가 없어 괴롭다)는 결점이 있긴 해도 지우개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압지도 필요 없고 책상이나 손이 더러워질 일도 없다. 긴장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에는 연필이 제일이지 싶다.

일본지나 붓이 다소 비싸긴 하다. 하지만 화가에게 화폭이나 물감이 장사 밑천인 것처럼 작가에게 일본지나 붓은 장사 밑천이다. 거기에 돈이 좀 든다고 투덜대는 사람에게 한마디, 작가라서 다행인 줄 알기를. 화폭이나 물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값싼 물건이지 않은가.

쓴다는 것

이즈미 교카泉鏡花
1873년 이시카와현 출생. 1891년 열여덟 살에 통속소설의 일인자 오자키 고요에게 사사한 뒤 1895년 『문예구락부』에 「야행순사」와 「외과실」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00년 고승이 들려주는 마녀 이야기를 그린 「고야산 스님」으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자연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문단에서 요괴, 민담 같은 설화문학이나 고전을 소재 삼아 독특한 환상 세계를 추구한 그의 작품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근대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며 삼백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 생전인 1925년부터 전집이 발간됐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은 당대 최고 작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1939년 9월 7일 예순여섯 살에 폐종양으로 생을 마감했다.「쓴다는 것」은 1925년에 발표한 글이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딱 이맘때가 제일 좋지 않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새잎의 시기, 선명치 않은 바깥 공기에 닿으면 어쩐지 창작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고 펜이 술술 나가지 않아서 생각한 대로 글을 쓸 수 없다.

낮에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 때마다 뭔가 볼일이 생긴다. 가령 집사람이 "식사하세요"라고 부르면 곧장 아래로 내려가 밥을 먹어야 한다. 두부 장수가 와서 뭔가 수다 떠는 소리가 2층까지 들려오는 것도 달갑지 않다. 또 시간의 경과가 신경 쓰인다. 시간을 알려주는 요소가 많아서다. 밤이 돼서 시간의 기색이 죄다 사라져야 비로소 차분해진다.

시간의 경과란 그때그때의 감정이다.

푸른 배 일기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郎
1903년 야마나시현 출생.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열세 살 때부터 전당포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이때 가게 이름인 ‘야마모토슈고로’를 필명으로 사용했다. 본명은 시미즈 사토무.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가게가 불탄 뒤 고베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다가 도쿄로 와서, 1926년 「스마데라 부근」을 발표했다. 『일본혼』 편집기자로 근무하며 지바현 우라야스마치에서 살다가 1928년 10월 근무 태만으로 회사에서 해고됐다. 1932년부터 『킹』에 시대소설을 연재, 『붉은 수염 진료담』, 『사부』 등 대중소설을 쓰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1943년 『일본부도기』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신인 작가가 받는 편이 좋을 것 같다며 후보를 사퇴했다. 1967년 2월 14일 예순네 살에 세상을 떠났다.
「푸른 배 일기」는 1928년 8월부터 1929년 9월까지 쓴 일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온종일 비가 왔다. 몸 상태가 매우 나쁘다. 편도선이 부어 목이 아프다. 점심에 튀김과 함께 술을 마셔서 그런가 보다. 계속 잤다. 오후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북풍이라 쌀쌀했다. 밤이 되자 남풍으로 바뀌더니 또 이상하게 숨 막히게 더웠다. 싫은 날씨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설탕물을 만들어줬다.

그가 말하길 "여기서 먹고살 수 없다면 어디든지 가겠다, 나는 일본의 신자부로다." 저렇게 가난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하지. 신자부로여, 당신도 비로소 인간이 되었는가. 행복해라, 도련님이여. 너는 머지않아 참된 인생을 보리라. 아니면 선생이나 되어라. 자, 오라. 나 시미즈 사토무는 쉽사리 꺾이지 않을 테니. 잘 봐라. 내일의 태양에 영광 있으라.
1928년 10월 13일

어젯밤은 멋진 달밤이었다. 한밤중 처마에 떨어지는 밤이슬 소리가 났다. 파르께하게 환한 하늘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번민 일기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은 집안 내력을 부끄러워하며 성장했다. 대학 입학 후 이는 더욱 심해져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좌익 운동으로 당시 현의원이던 큰형과도 갈등을 빚었다. 게다가 고등학생 때 알고 지내던 게이샤 오야마 하쓰요와 1931년부터 도쿄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자 큰형은 호적에서 나가는 조건으로 졸업 때까지 매월 120엔을 보내주기로 하고 그와 연을 끊었다. 하지만 1937년 3월 하쓰요의 불륜 사실을 알고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로 끝나고 둘은 헤어졌다.
「번민 일기」는 1936년 6월 잡지 『문예』에 실린 글이다.

×월 ×일
몸 상태 나쁨. 자꾸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온다. 고향에 알려보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뜰 한구석에 복숭아꽃이 피었다.

×월 ×일
150만 엔의 유산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얼마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음. 8년 전, 호적에서 파였다. 형의 정에 의지해 오늘까지 살아왔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래?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함. 이대로라면 죽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이날, 탁한 일을 했다. 꼴 좀 봐라, 문장의 더러움, 서투름. 단 가즈오 씨 방문. 단 씨에게 40엔 빌림.

×월 ×일
단편집 『만년』 교정. 이 단편집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될 게 뻔하다.

×월 ×일
부끄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곳의 한가운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로 찔렀다. 날아올랐다. 게다 신고 기찻길로! 한순간, 장승처럼 우뚝 섰다. 풍로를 찼다. 양동이를 걷어찼다. 작은 방으로 가서 주전자를 장지문에! 장지문 유리가 소리를 냈다. 밥상을 찼다. 벽에 간장. 밥공기와 접시. 내 대신이다. 이 정도로 때려 부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후회 없음.

일곱 번째 편지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
1899년 도쿄도 출생. 1916년 어린 시절 아사카 할머니 댁에서 본 시골의 삶을 묘사한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를 발표해 천재 작가로 주목받았다. 1924년 자전적 소설 『노부코』를 쓰는 한편 1927년 소련에 다녀온 뒤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 일본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문예평론가이자 공산주의자인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지만, 이듬해 그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자신도 검거와 석방을 거듭한 끝에 집필 금지 처분까지 받았다. 번역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며 1945년 남편이 석방될 때까지 구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7년 패전 후 피폐해진 사회를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반슈평야』를 펴냈다. 1951년 1월 21일 쉰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일곱 번째 편지」는 20년간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감옥으로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글이다.

8월 19일 낮.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뒤에서 선들바람이 불어온다. 일을 시작하려는 참에 잠깐.

문학평론가 구보카와 쓰루지로(窪川鶴次郎 1903~1974), 소설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1902~1979), 쓰보이 사카에(壺井栄 1899~1967), 사카이 도쿠조(坂井徳三 1901~1973)는 미야모토 유리코 부부와 함께 일본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지바현 호타에는 미야모토 유리코가 빌린 셋집이 있었다.

다카미 준(高見順 1907~1965),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참여하는 등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으나 1934년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이 해체한 뒤 전향했다.

당신의 편지를 낙으로 삼고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고마고메 하야시초에서
1936년 8월 27일

달콤한 배의 시

오구마 히데오小熊秀雄
1901년 홋카이도 출생. 1922년 스물한 살 때 지역지인 아사히카와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활동하며 시를 짓기 시작했다. 1928년 도쿄로 상경해 문예지 『민요시인』 등에 자유와 이상을 자유롭게 표현한 작품을 발표해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1931년 프롤레타리아시인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자신을 ‘일하는 시인’으로 지칭하며 에너지 넘치는 저항시와 서사시를 주로 썼다. 시집 『하늘 나는 썰매』, 『장장추야』를 출간하는 한편 소설, 동화,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만년에 만화 편집자로 일하며 원작을 담당한 『화성탐험』은 일본 SF만화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데즈카 오사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40년 11월 20일 서른아홉 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달콤한 배의 시」는 사후 발표된 시로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매문 문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921년 3월부터 7월까지 마이니치신문사 해외시찰원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여행의 피로를 풀 새도 없이 집필에 매달리느라 병약했던 체질에 신경쇠약까지 겹쳐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건강은 점점 나빠져 잠시 펜을 놓고 요양 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날이 올라가는 명성으로 인해 출판이나 잡지 편집자가 연일 집으로 찾아와 편히 쉴 수 없었다. 결국 1923년 도쿄를 떠나 유가하라 온천에 가서 얼마간 머물렀다.
「매문 문답」은 1921년 12월에 쓴 글이다.

편집자: 아니요, 저희는 성심성의껏 독자의 희망을 따를 작정입니다.
작가: 당신은 그러시든지요. 독자의 희망을 따르다 보면 동시에 장사도 번창하겠지요.
편집자: 그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은 장사라고 말씀하시지만, 당신에게 원고를 써달라고 하는 건 장사치라서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복면 쓴 사람: (작가에게) 네놈은 한심한 녀석이구나. 훌륭한 말을 하는가 싶더니 그냥저냥 책임만 때우려고 아무거나 엉터리로 쓰려고 하다니. 나는 옛날에 발자크가 하룻밤 만에 멋진 단편 하나를 써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녀석은 글을 쓰다가 머리에 피가 몰리면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 피를 내린 후 다시 썼다. 그 무시무시한 기력을 생각하면, 네놈 따위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설사 한순간일지라도 너는 왜 그녀석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아쿠타가와의 원고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무로 사이세이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처음 만난 것은 1918년으로 시인 히나쓰 고노스케의 출판기념회에서였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도쿄 다바타에 살고 있었다. 이 둘 외에도 호리 다쓰오, 기쿠치 간, 구보타 만타로 등 많은 문인이 거주하며 이른바 ‘다바타문인촌’을 이루었는데, 1919년 ‘도한회’라 불리는 친목회가 만들어지면서 매주 일요일 아쿠타가와의 서재에 다바타 문인들이 모여 예술을 논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무로 사이세이는 존경하는 친구였던 아쿠타가와가 자살한 뒤 그를 모델로 1932년 소설 『푸른 원숭이』, 1943년 평론 『아쿠타가와의 사람과 작품』을 선보였다.
「아쿠타가와의 원고」는 1954년 11월 잡지 『도서』에 실린 글이다.

류노스케龍之介는 ‘용의 개체’란 뜻으로 용의 해, 용의 달, 용의 날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알려졌다.

아쿠타가와의 원고는 잇대어 붙인 부분, 글자를 고치거나 지우거나 끼워 넣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원고지 위에서 싸움이라도 벌인 것처럼 장렬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붓 가는 대로 술술 써 내려가지 못한 탓에 몇 장이나 고쳐 쓴 부분도 있었다. 잘못 쓴 원고는 완성된 원고보다 매수가 훨씬 많았다. 아쿠타가와는 그걸 찢어서 없애지 않고 다시 책상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다. 나쓰메 소세키 선생도 잘못 쓴 원고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모양이니, 그에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편집 중기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문예시대』는 1924년 10월 요코미쓰 리이치,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사키 미쓰조 등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문예’를 지향하며 창간했다. 창간호부터 몇 달간 편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27년 5월 폐간될 때까지는 요코미쓰 리이치, 나카가와 요이치 등이 돌아가며 맡았다. 창간호에 실린 요코미쓰 리이치가 쓴 「머리 그리고 배」는 대담한 비유, 이질적인 말의 조합으로 새로운 감각을 만들었다고 평가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문예 동인들을 ‘신감각파’로 불렀다. 신감각파는 같은 해 6월 창간된 『문예전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파와 더불어 1930년대 중반까지 일본 문단계를 이끌었다.
「편집 중기」는 1925년 1월 『문예시대』에 실린 글이다.

편집실에서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년 후쿠오카현 출생. 어린 시절부터 문학가의 꿈을 키우다가 1912년 도쿄로 올라와 영어 교사이자 사상가였던 쓰지 준과 동거했다. 그해 가을, 일본 최초 여성 문예지 『청탑』(1911년 9월~1916년 2월)을 창간한 히라쓰카 라이초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청탑』에 글을 발표했다. 1914년 히라쓰카에 이어 『청탑』 편집을 맡은 뒤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모토로 다양한 글을 실어 정조 및 낙태 논쟁을 불러왔다. 1916년 가족을 버리고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와 파트너로서 창작과 평론 활동을 함께하며 『가난의 명예』, 『두 명의 혁명가』 등을 출간했다. 1923년 9월 16일 스물여덟 살에 간토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헌병에게 살해됐다.
「편집실에서」는 『청탑』에 실린 편집 후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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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모자를 쓰지 않고 망토를 걸치지 않고 오로지 일본 옷만 입는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지 못해 누워서 쓰는 버릇이 있다. 한밤중인 한두 시부터 아침 여덟아홉 시까지 글을 쓰고 읽기에 오후 두세 시께 일어나는 날이 잦다.

취미: 바둑 2단으로 두세 점 놓고 둔다. 장기 8단으로 차와 포를 떼고 둔다. 마작 0단. 카페나 요릿집 순례, 여행, 경마(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생활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하야시 후미코는 자전적 이야기인 『방랑기』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됐지만 늘 순문학 작가를 꿈꿨다. 「청빈의 서」, 「울보 아이」 같은 단편이 좋은 반응을 얻긴 했어도 동시에 ‘가난을 팔아 먹고사는 작가’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세간의 비난에 지치고 글을 쓰다 막히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돈이 바닥날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돌아와선 글을 써 원고료를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다 1935년 9월 단편 「굴」을 기점으로 자전적 사소설에서 사실주의 소설로 작풍을 바꾸고 마침내 순문학 작가로 인정받았다.
「생활」은 1935년 2월 『개조』에 실린 글이다.

뭐가 애타서 쓰는 노래인가
함께 열리는 매실이며 자두
자두의 파란 몸에 내리쬐는
시골 생활의 평화로움

무로 사이세이 씨의 이 노래가 참 좋아서 매일 흥얼거린다. "뭐가 애타서 쓰는 노래인가" 정말이지 이 노래대로 나는 뭐가 애타서인지 몰라도 거의 날마다 밤이 이슥도록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너절한 그날의 일상을 소설로 쓴다.

신문을 얼추 다 읽어갈 즈음 주전자에 담긴 물이 끓는다. 이 시간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다. 안경알에 입김을 후후 불고 무두질한 가죽으로 깨끗이 닦는다. 그다음 차를 우리고 책상 위 여러 가지 물건을 매만진다. "잘 계셨나요?"라고 물어보듯. 펜은 만년필을 사용한다. 잉크는 마루젠의 아테나잉크. 3홉가량 들어 있는 큰 병을 사 와서 쓸 때마다 즐겁게 잉크를 채운다.

책상 위에는 늘 뭐가 뭔지 모르겠는 잡지와 책이 한가득 쌓여 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겁쟁이인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문단속을 한 뒤 부엌에서 밤참거리를 챙겨 들고 2층으로 다시 올라온다. 염장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사실 생각해보면 시골 여학생 같은 생활이다. ‘나의 생활’을 써달라고 해서 이렇게 쓰고 있자니, 별 볼 일 없는 나의 일상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오늘도 비가 내렸다. 머리를 짜낸 끝에 마침내 「그녀의 비망록」 완성. 스물일곱 매짜리 원고를 『신조』에 보냄. 막과자를 10전어치 사 와서 혼자 먹었다. 작은 순무와 조롱박으로 절임을 만들어봤다. 이삼일 지나면 맛이 들겠지.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 머리가 아프다.
1932년 9월 20일

저녁에 보랏빛 꽃범의꼬리 10전, 개미취 5전을 주고 사 옴. 비에 젖어 개와 걷기. 즐거운 산책이었다. 건널목의 비, 밤의 비, 푸르게 빛나며 비에 젖어 달리는 교외 전차. 더없이 기분 좋다.

하지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아등바등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나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저 꾸준히 쓰는 것이다. 그 삼매경에 빠져 있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결국 ‘만년 문학소녀’다.

다이묘 여행**

**관리나 의원 등의 시찰을 빙자한 관광 여행. 원래는 에도시대 지방 영주 ‘다이묘’의 유람에 빗대어 호화로운 여행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한다. 한 달에 두세 번은 기차를 탄다. 장거리 여행도 아무렇지 않다. 걷는 게 무척 즐겁다. 올 1월에는 나가노 시가고원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마루야마의 한 산장에 묵었는데, 운 좋게도 여자는 나 혼자라 눈 덮인 산 위에서 마치 소녀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괘종시계가 1시를 쳤다. 다들 푹 자고 있겠지.
5만 리나 앞에 있는 눈사태처럼 숨소리가 들린다.
2시가 되어도 3시가 되어도 내 책상 위는 새하얀 채다.
4시를 치면 숯 바구니 속 숯이 사라진다.
나는 덧문을 열고 헛간으로 숯을 가지러 간다.
추워서 몸이 얼어붙는 듯하지만
글 쓰는 일보다 숯 집어 드는 일이 훨씬 즐겁다.
어딘가에서 기르는 휘파람새가 울기 시작한다.

"달 어두운 밤 기러기는 높이 난다"고 비참한 날이 와도 원래 몸뚱어리 하나뿐이니 어떻게든 되리라.

‘맑은 물처럼 아무 맛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내 글은 손짓이나 거짓말이나 꾸밈새가 도드라진다. 괴롭다. 힘이 모자라는지도 모른다.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툇마루에서 햇볕을 쬐는 듯한 생활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버릇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요시카와 에이지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음에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일찍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다 1926년 『나루토비첩』으로 거액의 인세를 받으며 가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궁핍한 시절부터 함께하며 절약이 몸에 밴 아내는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해결책으로 새집을 짓고 고향의 가족을 부르고 양녀를 들여 안정을 꾀했지만, 결국 1937년 이혼했다.
「버릇」은 1935년 출간된 수필집 『초사당수필』에 실린 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못 들은 척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어떤 책에서 읽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짜증을 잘 내기로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한 왕이면서도 잔꾀를 부리던 소싯적 버릇을 못 고치고 귀엣말해서 당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잉크병을 닦는다. 책꽂이를 훔친다. 외출할 때 모자를 솔질해서 건네줘도 한 차례 손가락을 튕겨 먼지를 털어낸다.

책상과 이불과 여자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기성 문학 전반에 비판적이던 ‘무뢰파’를 형성했다. 무뢰파는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주며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세 사람은 친분도 두터워서 좌담회를 함께 하거나 카페 ‘루팡’에 모여 술을 마시며 열띤 문학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루팡’은 1928년 긴자에 문은 연 이래 기쿠치 간, 나가이 가후, 가와바타 야스나리, 햐야시 후미코 등 문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책상과 이불과 여자」는 1948년 2월 잡지 『마담』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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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비밀은 죽음과 시간에 있다. 환경에 불완전하게 적응한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과 우연히 적응하게 된 조그마한 돌연변이를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말이다. 유리한 돌연변이 형태들이 서서히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이 바로 진화의 비밀이다.  - P79

다윈과 월리스에게 퍼부어졌던 그 엄청난 반대의 목소리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억겁의 영원은 고사하고 수천 년조차 상상하기 힘들어 하는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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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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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잘 드는 창 아래 정갈한 책상. 이것이 내 취향이리라. 한적함을 사랑한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호주머니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밝은 것이 좋다. 따뜻한 것이 좋다.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 곳이 제일이다.

필기도구는 처음엔 금색 G펜을 사용했다. 대여섯 해쯤 썼던가. 이후 만년필로 바꿨다. 지금 사용하는 만년필은 2대째로 ‘오노토’다. 특별히 좋아서 사용하는 것도 뭣도 아니다. 마루젠서점의 우치다 로안 군이 선물로 줘서 사용할 뿐이다. 붓으로 원고를 쓴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다.

작가의 마감 | 나쓰메 소세키 외,안은미 편역

나쓰메 소세키 “문인의 생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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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종의 기원 The Origin of Species』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변종을 바로 만들지는 못한다. 사람은 유기 생물들에게 삶의새로운 조건들을 접하게 할 뿐이다. 그 후에 자연이 유기체에 작용함으로써 변이성을 발현케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변이성들을 선택할 줄 알고, 변이성을 자신이 원하는 형식으로 축적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줄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동물과식물을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에 봉사하도록 할 수 있다. - P74

19세기에 진화론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한 토머스 헉슬리 Thomas Huxley가 다음과 같이 한탄한 적이 있다. "다윈과 월리스의 저작물들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의섬광이었다. 그 섬광으로 드러난 길은, 그 길이 집으로 향하고 있든 말든, 무조건 따라가게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내가 『종의 기원』의 핵심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나는 참담했다. 바보같이 왜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콜럼버스와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도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을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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