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카쿠 문집南郭文集』 첫째 편 4장에 이때 지은 시 두 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그중 하나다.

이 한 몸 뉘일 초가집 조릿대 물가 그늘에 두었으니

가을바람이 쉬어가라며 긴 옷자락을 잡아끄네

재주는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기나긴 세월 눈물을 흘렸도다

사통팔달 편리한 고을에서 오래오래 책을 쓰고자 하니

저녁 무렵 숲속은 무수한 까마귀로 검다

세월이 흘러 강이며 수목이며 자연은 깊어만 가고

사람의 마음은 호수 바다 하늘 먼 곳을 떠다닌다

머나먼 타향에서 온 손님이라 방종함을 절제하게 되누나

산책하러 가자는 친구가 오면 나는 무코지마 백화원(에도시대에 센다이 출신 골동품상 사와라 기쿠가 스미다 강 인근 토지를 매입해 조성한 화원이며 현재는 도립)으로 향한다.

노인이 돋보기의 힘을 빌리 듯, 나는 전차와 승합자동차를 타고 무코지마로 간다.

"꽃이 피지 않을 무렵에 와보고 또 꽃이 지고 난 무렵에 와보는 일은 두번천(杜樊川 당나라 시인 두목의 별칭)이 녹음 드리운 가지에 열매만 가득하누나(옛 여인을 찾아가니 이미 시집 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안타까움을 토로한 시)라고 탄식한 것과 비슷하지. 이게 바로 진정한 풍류가 아니겠나."

"화단에 꽃이 없음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일인진대 이걸 보고 기뻐하다니, 이보다 괴상한 짓은 다시없을 걸세. 풍류는 알지 못해도 괴상함은 아는 자가 세상에는 더러 있나보더군." 하고 받아치는 바람에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떴다.

나카스(中洲 강 가운데 모래톱이란 뜻으로, 스미다 강 중간쯤인 니혼바시나카스를 이르며 옛날에는 달맞이 명소로 뱃놀이 인파가 붐볐다) 강가에 옛 친구가 병원을 차렸다는 얘기는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는 글에도 쓴 적이 있다.

언덕이 많은 야마노테에 오래 산 나는 이따금 유유히 흐르는 스미다 강을 볼 때마다 괜스레 건너고 싶다. 비가 올 듯한 날에는 안개 자욱한 강줄기 보는 즐거움에 산책이 한결 흥겹다.

어느 날 나카스 강가에서 기요스바시를 건널 때였다. 문득 만넨바시 부근에 있던 바쇼의 암자 터와 맛사키 이나리 신사는 대지진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가보니 기요스바시 건너 남쪽 아사노시멘트 제조공장은 여전하여 예의 그 무시무시한 건물과 굴뚝이 솟아 있다.

한편으론 물가 옆에 바쇼 암자 터가 신사로 보존되고 길 건너 맛사키이나리 사당에 새로운 돌기둥이 우뚝 솟은 모습에, 도쿄 생활이 아무리 바빠져도 옛 풍류가의 흔적을 아직 없애지는 않는구나 싶어 안도했다.

오히사의 샤미센 연주에 맞춰 누군가 오치우도(落人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가부키 곡명, 밀회를 하다 도망가는 남녀를 다룬 노래)를 읊고, 오히사는 세이신(清心 가부키 곡 십육야세이신을 이름, 성문에 목이 매달린 도적을 다룬 노래)을 읊었다.

나는 요가라스가 유칸바 오쿠보의 뒷골목 나가야에 은거하며 문단이나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초연히 홀로 좋아하는 곳에서 하이쿠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진정으로 에도시대 고유의 하이쿠 시인 기질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며 마음 깊이 존경했다.

야마노테에 사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체면에 사로잡혀 허황된 명성을 얻으려 안달하는 반면 요가라스는 뒷골목 나가야의 빈민 생활이 훨씬 청렴하고 자유롭다며 기뻐했다.

때는 다이쇼 2년(1913), 본명 나가이 소키치永井壮吉, 즉 나가이 가후는 미타에 위치한 게이오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면 쓰키지에 있는 셋집으로 향했다.

가후의 글은 급격히 변화하는 도쿄의 틈새를 다룬다.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극장 뒷길에 낡아 누르스름해진 얼음가게의 깃발. 가후의 관심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에도의 유산에 쏠렸다. 가게 안쪽 소녀는 샤미센을 들고 기요모토를 연습한다. 기요모토는 가부키의 반주음악으로 발달한, 특유의 샤미센 곡조에 애달픈 가사가 아우러진 노래다. 에도시대 말기에서 메이지시대까지, 시타마치 소녀들이 흔히 배웠다.

요쓰야와 아카사카는 오늘날 도쿄의 중심이다. 고층빌딩과 고급호텔이 즐비하다. 당시 가후는 에도부터 이어져온 가난한 서민의 생활을 바라봤다. 분뇨糞尿를 가득 실은 배들이 오가고, 공장 사이사이 집들이 끼어 있고, 무덤가 옆에 기다란 집이 늘어선 모습은 문명개화와는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펄럭이는 빨래처럼 초연히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모습을, 가후는 그려내고 있다.

가후는 한손에 에도지도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그의 산책로는 오늘날 도쿄순환선 야마노테센 안쪽을 총망라한다. 그러나 에도지도에도 메이지, 다이쇼지도에도 없는,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사실 가후의 산책길에 중요한 포인트였다.

아무리 정밀한 도쿄 시내 지도라 해도 골목은 그리 선명히 나와 있지 않다.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지 혹은 어디로도 나올 수 없는 막다른 길인지는, 그 골목에 살 때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두 번 골목을 걸었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현대 도쿄도 ‘어슬렁어슬렁 걷기’를 나서면 옛 에도를 느낄 수 있다. 공터는 공원이 되고 강을 메워 도로를 만들어도 지명에는 옛 모습이 남아있다.

우에노上野는 높은 땅을 이루고 시부야渋谷는 골짜기를 이룬다. 니혼바시日本橋에는 다리가 있고 고코쿠지護国寺에는 절이 있다.

도쿄가 도쿄답게 존재하려면, 도쿄 사람이 도쿄 사람답게 존재하려면 에도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도쿄라는 도시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긴 역사와 문화 속 뿌리를 상실하고 만다면 얼마나 빈약해질 것인가. 그 까닭에 가후는 붓을 들었다. 도쿄에 남겨둬야 할 것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오토와 베니코音羽紅子

일찍이 에도는 시골이었다. 가마쿠라막부가 들어설 즈음 정권의 중심에서 가까웠지만, 가마쿠라시대(1180~1333) 이전이나 이후 에도시대(1603~1868)가 막을 열기까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교토와 오사카가 있는 간사이(관서) 지방에 편중해 있었다.

알지 못하는 땅이자, 알 수 없는 힘이 서린 귀신들의 땅이라 업신여기면서도 간사이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동쪽의 땅 가운데 풍요롭게 작물이 자라는 간토에 정치의 중심을 두었고, 이후 많은 사람이 에도에 정착해 이윽고 에도는 백만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된다.

이렇듯 에도시대가 내란 없이 삼백 년 넘게 번영을 누린 데에는 참근교대 제도의 영향이 컸다. 다이묘는 거액의 여비를 지출해야 했지만, 주요 도로 역참 마을과 에도의 주민에겐 다시없는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이 대거 에도로 이주한 요인으로 3대 세이이다이쇼군 이에미쓰가 제정한 참근교대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각 번藩의 우두머리인 다이묘大名가 2년에 한 번씩 반드시 에도 성을 방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에도를 오고가는 여비는 모두 다이묘가 부담했다.

요시와라는 오늘날 매춘업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매우 고급스러운 기모노를 걸치고, 문학을 이해하며, 악기를 다루고, 다도와 꽃꽂이에 능한 ‘오이란花魁’이란 고급 유녀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세간에는 삼대가 살면 에돗코(에도 토박이, 도쿄 토박이)라는 말이 있다. 삼대쯤 에도에 터 잡고 살면 에돗코가 됐으니, 그만큼 새로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간사이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오백 년, 천 년쯤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다’라는 확실한 가계도가 있을 때 비로소 토박이라 불렀기에 시간적 구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에도와 도쿄 모두, 도시가 비대해지다가는 파멸하고, 다시 비대해지기를 반복했다. 거리 풍경은 변모를 거듭했으며, 이주자가 끊이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도쿄를 방문한다면, 부디 고층빌딩에서 내려와, 가후처럼 어슬렁어슬렁 지상을 걸어보길 바란다. 눈이 핑핑 돌 만큼 정신없이 바쁜 이 거리가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 잎사귀가 속삭이는 소리에, 빨간 턱받침을 한 돌부처가 건네는 이야기에, 졸졸졸 흐르는 도랑이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 산책길에서 도쿄가 품어온 ‘생’을 만끽할 수 있기를.

오토와 베니코

일본은 오늘날에도 서력만큼 연호를 중시하는 나라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뀐다. 메이지시대(1868~1912) - 다이쇼시대(1912~1926) - 쇼와시대(1926~1989) - 헤이세이시대(1989~)

통학로인 한조몬, 다이칸초도리, 히토쓰바시, 간다를 중심으로 고지마치, 구단, 이치가야 등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 야마노테 마을 풍경을 즐겼다.

학교를 마치고 간다 강을 따라 간다, 야나기바시, 교바시, 하마초를 걸으며 강에 걸린 작은 다리와 강가 주변을 산책했다.

소토보리도리를 따라 이다마치(현 이다바시), 스이도, 오차노미즈를, 와세다도리를 따라 우시고메의 가구라자카, 오쿠보까지 산책했다.

고이시카와 저지대에서 혼고 고지대를 거쳐 네즈, 센다기, 야오이의 언덕 위를 걸어 올라가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길 즐겼다. 특히 모리 오가이의 저택 간초로가 있던 언덕길을 도쿄 제일가는 풍경이라며 좋아했다.

오쿠보 요초마치 집에서 게이오 대학이 있던 미타까지 전철을 타고 시나노마치, 아오야마를 구경했다. 때론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공터나 도랑을 찾아내어 좋아하는 잡초를 감상하곤 했다.

쓰키지 해안을 따라 가깝게는 신토미나 아카시초, 멀게는 쓰키시마까지 산책하며 강가 마을 풍경에 감흥을 받았다.

편기관을 거점으로 아카사카, 아자부, 시바, 미타까지 발길을 옮기며 오랜 절을 둘러봤다. 이해 처음으로 아라카와 방수로를 찾았다.

신풍속에 관심을 갖고 여름부터 긴자 카페 타이거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가운데 짬을 내어 친구 고지로 소우요 등과 긴자나 니혼바시 같은 번화가를 주로 다니며 서양 영화를 즐겼다.

니혼바시 나카스에 있는 친구 병원을 들릴 때마다 위쪽으로 고토부키, 아즈마바시를 건너 무코지마 주변까지, 아래쪽으로 기요스바시를 건너 후카가와, 스나마치까지 강가 마을을 누볐다.

『강 동쪽의 기담』 집필을 위해 사창가가 있는 다마노이(현 히가시무코지마)를 여러 차례 산책하며 마을을 스케치하고 거리 지도까지 손수 제작했다. 1948년 또다시 다마노이를 찾았지만,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불타버린 상태였다.

이치카와로 터전을 옮긴 뒤 마마 강을 따라 고노다이, 스가노, 야와타 등지를 돌며 오랜 절과 시골길을 감상했다. 특히 봄이면 마마 강의 벚꽃을 즐겼고, 이치카와 세무서가 있던 고노다이 언덕에 자주 올라 에도 강을 바라봤다.

도보뿐만 아니라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타고 이치카와 시내를 벗어나 우라야스나 후나바시까지 점점 산책로를 넓혀 나갔다. 

직접 쓴 각본이 잇달아 아사쿠사 극장에서 상영되자 매일같이 아사쿠사를 찾아 외식을 즐기고 영화를 감상했다. 단골집도 생겨났는데, 이해 처음 간 ‘아리조나 키친’에서는 10년 동안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조칸지가 있는 미노와, 요시와라 신사가 있는 센조쿠, 산야보리가 있는 이마도를 종종 찾아가 옛 에도의 향수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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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도시 중에서도 나는 뉴욕의 평탄한 5번가보다 콜롬비아의 고지대로 오르는 돌계단을 좋아했고, 파리의 널따란 대로보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훨씬 사랑했다.

그즈음 나는 아직 서른 전이었다. 독신으로 정처 없이 떠돌며 이국의 고독한 객을 자처했고, 세상은 넓고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청산, 즉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세 좋게 돌아다녔다.

"풍류가 없어도 고통은 덜하고, 비루하고 조그만 오두막에도 달빛은 비추네"란 구절이 있듯 쓸데없이 슬퍼하고 분개하며 자길 괴롭히는 건 현인賢人이 갖출 행동이 아닐 터.

우리가 사는 도쿄가 아무리 추하고 더럽다 해도 여기 살면서 아침저녁을 보내는 한은 그 추악함 속에서 약간의 아름다움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더러움 속에서 멋을 발견해 억지로라도 마음 편히 살도록 스스로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본래 나의 히요리게다 산책에 조금이나마 주의 아닌 주의를 기울이고픈 부분이다.

도쿄 시내의 훌륭한 모습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일 잘 보인다.

옛 풍경 가운데 명성 높은 곳은 아카사카 레이난자카 위에서 시바 서쪽 구보로 내려가는 에도미자카다.

이들 돌층계 길을 보면 나는 나가사키 마을이 떠오른다. 그 까닭에 히요리게다 신고 딸깍딸깍 모서리가 마모된 돌층계를 위태롭게 한 계단씩 밟으며 부디 도쿄 토목공사가 이곳을 통행에 편리한 보통 언덕길로 만들지 않기를 남몰래 빌곤 한다.

에도의 서쪽 외곽 메구로에는 유히가오카 (夕日ヶ岡 석양 언덕)가 있고, 오쿠보에는 니시무키텐진(西向天神 서쪽 천신)이 있다. 둘 다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에도 때의 일이고, 오늘날 일부러 벽촌 언덕까지 지팡이를 짚으며 석양을 보러 가는 우매한 이는 없을 터다. 하지만 나는 요즘 빈번히 도쿄 풍경을 탐색하며 걸으면서 이 도시의 미관이 석양과 꽤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쿄의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새잎이 돋는 5월과 6월, 만추에 젖은 10월과 11월이다. 야마노테는 정원이든 울타리든 가는 곳마다 신록의 싱그러움이 흘러넘친다. 노을이 질 때면 그 나무들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붉게 물든 하늘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을 지는 그늘 아래로 낙엽 밟고 걸으면 강호에 묻혀 사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얼마간 감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석양의 아름다움과 함께 논할 것이 시내에서 바라보이는 후지 산 원경이다. 석양이 지는 서쪽 거리에서는 대체로 후지 산뿐만 아니라 그 기슭으로 이어지는 하코네, 오야마, 지치부의 산맥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분세이시대(1818~1830)에 호쿠사이가 『후지 36경』에 그린 니시키에 가운데 에도 시내에서 후지 산을 볼 수 있는 곳은 열 군데가 넘는다.

호쿠사이나 그 문하생인 쇼테이 호쿠주, 또 히로시게의 판화는 오늘날까지도 도쿄와 후지 산의 회화적 관계를 찾아나서는 이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후지 산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우키요에의 색채에서 보듯 초여름과 늦가을 석양에 비친 구름과 안개가 오색으로 빛나고, 산은 자줏빛으로, 하늘은 붉은 색으로 온통 물들었을 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밀라노는 알프스 산맥이 있기에 한층 더 아름답고,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 연기로 인해 여행자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지 않는가.

도쿄의 도쿄다움은 후지 산을 조망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 애국은 고향의 미를 영원히 보호하고, 국어를 순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의무라 하겠다.

밝은 달 뜨니 후지 산 바라볼까 쓰루가 마을 
  소류

반쪽만 보면 에도의 물건이니 녹지 않는 눈 
  류시

후지 산 보며 잊지 않으려 하네 세밑이구나
호마

봄이 가누나 후지 산도 절하며 잘 가라 하네

자네는 오늘   학을 타고 가려나   후지 산엔 눈

가후 / 다이쇼 4년(1915) 4월

백성들 모두 이곳을 즐기어 아무리 걸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도읍에 사는 이의 행락지로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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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라는기록으로 표현해 놓았다. - P119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땅은 안정되어 있고 단단하고 고정적인 데 반하여 그 외의 천체들은 매일같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 P119

"따라서 달리 교육을받지 않는 한 누구나, ‘지구는 커다란 집과 같다. 그 위를 덮고 있는 둥근 천장이 하늘이고 집과 천장은 고정되어 있다. 천장 안에서 매우 작은 태양이 새가 허공을 누비며 날아다니듯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지나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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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쿄는 바다와 강, 수로와 도랑과 같이 물의 변화–가령 유유히 흐르는 물 혹은 움직이지 않고 고여서 죽어버린 물 등등–가 매우 많은 도시다.

시나가와 만의 흥미로운 경치는 시대 흐름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이를 대신할 새롭고 멋스러운 경치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나는 에이타이바시를 건너며 강어귀에 약동하는 광경을 접할 때마다 알퐁스 도데가 센 강을 오가며 화물선 생활을 그린 애처로운 단편 「라 벨 니베르네즈」가 생각난다.

스미다 강 하구 일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제껏 밝혔듯 에이타이바시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아즈마바시, 료고쿠바시 주변은 아직 정돈이 안 되어 에이타이바시처럼 감흥을 한데 집중시키기 어렵다.

갓난아기는 그 주위에서 마치 버려진 아기처럼 모래 위로 나가 마른 닭이 흘리고 간 먹이를 찾으려 애쓰거나 말 엉덩이에서 말똥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이런 광경을 접할 때마다 나는 호쿠사이나 밀레가 떠올라 회화적 사실주의에 깊이 감동한다.

그리고 내게 그림 소질이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도쿄 나들이가 처음인 지방 사람들은 전차 승강장을 잘못 알거나 시내에서 길을 헤매며 화가 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러한 허위 지명 역시 도시의 얄미운 악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도시의 도랑은 원래 하수에 불과하다. 『지치 한 그루紫の一本』에도 시바의 우다 강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메이케 저택의 하수가 아타고 아래부터 조조지 뒷문을 흘러 이곳으로 들어온다. 아타고 아래 주택가 하수도 흘러들어 우다가와바시에 이르면 작은 강물처럼 보이지만 물의 근원은 이와 같다."라고 나와 있듯, 예로부터 에도 시내에는 하수가 흘러들어 강을 이루는 곳이 적지 않았다.

도시는 활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부터 전해오는 유물을 최선을 다해 보존하여 그 품위를 지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룻배와 같은 것을 나 같은 사람 하나의 편협한 퇴보 취미로만 논해서는 아니 되리라.

고독하고 덧없는 삶도 있다. 은거의 평화도 있다. 실패와 좌절과 궁핍의 최후 보상인 태만과 무책임의 낙원도 있다. 서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신혼살림이 있는가 하면, 목숨 건 모험에 몸을 맡기는 밀애도 있다. 골목은 좁고 짧기는 해도 풍부한 멋과 변화를 지닌 장편소설과 같다 할 수 있으리라.

눈, 비, 바람, 달, 석양의 도움 없이는 이 어정쩡한 시가지에서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시내 대로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불쾌함과 혐오감이 나의 관심을 그늘에 숨은 골목 풍경으로 잡아끄는 가장 큰 이유다.

료고쿠의 넓은 대로를 따라 난 돌이 깔린 좁은 길에는 여성용 장신구 파는 가게나 일용품 가게, 센베이 가게 등 다양하고 작은 가게가 성행하여 마치 지붕 없는 지하 상점가를 보는 듯하다.

개나 고양이가 무너진 담장이나 벽 사이를 찾아내 자연스레 종족끼리 통로를 만드는 것처럼 큰길가에 집을 세우지 못한 서민은 큰길과 큰길 사이에 그들이 살기 적당한 골목을 직접 만들었다.

골목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생활의 비애 속에서 스스로 심오한 골계적 정취를 풍기는 소설 세계다. 따라서 모든 속된 감정과 생활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격자문과 하수구 덮는 널빤지, 빨래 건조대와 울타리 문, 철책 등 온갖 도구와 일치한다. 골목은 어엿하게 예술이 조화를 이룬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내를 산책하다 보면 마침 앞 장에서 논한 골목과 비슷하게 흥미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공터다. 번화한 도로 사이로 나팔꽃이나 메꽃, 달개비나 질경이 같은 잡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시내 번화한 마을의 창고와 창고 사이 혹은 짐배가 오가는 물길 근처 공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염색가게 주인이 천을 말리고, 머리 올리는 끈 만드는 장인이 작업을 한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호쿠사이의 그림이 떠오른다.

분시치에게   밟히지 마라 뜰의   달팽이야
머리 묶을 끈   붙이는데 덧없이   벌레 우는 소리
커다란 줄이   볕 쬐는 곳 너머로   기러기 날다 

이 시는 기카쿠 시문집 『루이코지』의 ‘북쪽 창문’에도 실려 있다. 『루이코지』는 내가 즐겨 읽는 책 가운데 한 권이다.

공터는 말하자면 잡초의 화원이다. 비단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금방동사니’ 이삭, 털보다도 부드러운 ‘강아지풀’ 이삭, 따사롭고 연붉은 ‘개여뀌’ 꽃, 산뜻하고 창백한 ‘질경이’ 꽃, 모래알보다 작고 새하얀 ‘별꽃’,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잡초도 제법 그럴싸하게 가련한 정취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잡초는 와카(和歌 일본 전통적인 시조)에서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타쓰 고린(宗達光琳 에도시대 화가 다와라야 소타쓰와 오카다 고린을 함께 지칭하는 말)의 그림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에도 서민문학이라는 하이카이(俳諧 골계적이고 해학적인 에도시대의 산문시)와 교카가 생기고 나서야 나서야 비로소 잡초가 문학에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요즘 교외는 무서운 기세로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으면 건축물을 세우고, 그렇지 않으면 쟁기로 주저하지 않고 갈아엎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쿠보 주변은 이렇듯 자연 대부분이 들판 그대로인 상태로 남겨져 있는가. 우습게도 이것이 실로 속물 중의 속물인 육군의 선물이다.

그저 시끄러운 게 아니라 울화가 터진다. 하늘 아래 모두의 길을 마치 제 것인 양 횡령하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행태는, 우리 서민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불쾌하게 하는 거대 기관이 한편으로 옛날 무사시노의 정취를 간직한 이곳 도야마 들판을 보존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언제나 이상하리만치 이것을 잃으면 저것을 얻게 된다. 이로움이 있으면 해로움도 있는 법, 새삼 일리일해一利一害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늘 유난히 여름날 어스름한 황혼이 길었던 데다 휘영청 달이 밝아 이를 보지 못함을 원망스러워 하며 원래 왔던 사메가하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요즘 관리들처럼 멍청한 일을 생각해내는 인간도 없다. 도쿄라는 도시의 외관, 일본이라는 국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빈민굴 철거보다도 우선 거리 곳곳에 세워진 동상부터 없애려 서둘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도쿄 토목공사는 이리저리 손을 써서 부산하게 도쿄 경치를 훼손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다행히도 잡초라는 것이 있어 불타버린 들판과 같이 나무 한 그루 없는 공터에도 푸르고 부드러운 양탄자를 깔아 달빛 흐르는 곳에 이슬로 자수를 놓는다. 박복한 우리 시인들은 전원보다도 세속의 도시에서 보다 깊은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벼랑은 공터나 골목과 비슷하게 나의 히요리게다 산책에 적잖이 흥미를 돋운다. 왜냐하면 벼랑은 야생조릿대나 참억새에 섞여 엉겅퀴, 거지덩굴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잡초가 우거져 있거나 때때로 맑은 물이 솟거나 하수가 골짜기처럼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까닭이다.

한편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시야를 가로막는 무엇 하나 없이 드넓은 하늘이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의 행방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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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은 과학이고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는 학문이다. 점성술은 사이비 과학으로 확고한 근거 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지배한다고 주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딱히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둘은 확실하게 서로 갈라섰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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