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카쿠 문집南郭文集』 첫째 편 4장에 이때 지은 시 두 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그중 하나다.

이 한 몸 뉘일 초가집 조릿대 물가 그늘에 두었으니

가을바람이 쉬어가라며 긴 옷자락을 잡아끄네

재주는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기나긴 세월 눈물을 흘렸도다

사통팔달 편리한 고을에서 오래오래 책을 쓰고자 하니

저녁 무렵 숲속은 무수한 까마귀로 검다

세월이 흘러 강이며 수목이며 자연은 깊어만 가고

사람의 마음은 호수 바다 하늘 먼 곳을 떠다닌다

머나먼 타향에서 온 손님이라 방종함을 절제하게 되누나

산책하러 가자는 친구가 오면 나는 무코지마 백화원(에도시대에 센다이 출신 골동품상 사와라 기쿠가 스미다 강 인근 토지를 매입해 조성한 화원이며 현재는 도립)으로 향한다.

노인이 돋보기의 힘을 빌리 듯, 나는 전차와 승합자동차를 타고 무코지마로 간다.

"꽃이 피지 않을 무렵에 와보고 또 꽃이 지고 난 무렵에 와보는 일은 두번천(杜樊川 당나라 시인 두목의 별칭)이 녹음 드리운 가지에 열매만 가득하누나(옛 여인을 찾아가니 이미 시집 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안타까움을 토로한 시)라고 탄식한 것과 비슷하지. 이게 바로 진정한 풍류가 아니겠나."

"화단에 꽃이 없음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일인진대 이걸 보고 기뻐하다니, 이보다 괴상한 짓은 다시없을 걸세. 풍류는 알지 못해도 괴상함은 아는 자가 세상에는 더러 있나보더군." 하고 받아치는 바람에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떴다.

나카스(中洲 강 가운데 모래톱이란 뜻으로, 스미다 강 중간쯤인 니혼바시나카스를 이르며 옛날에는 달맞이 명소로 뱃놀이 인파가 붐볐다) 강가에 옛 친구가 병원을 차렸다는 얘기는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는 글에도 쓴 적이 있다.

언덕이 많은 야마노테에 오래 산 나는 이따금 유유히 흐르는 스미다 강을 볼 때마다 괜스레 건너고 싶다. 비가 올 듯한 날에는 안개 자욱한 강줄기 보는 즐거움에 산책이 한결 흥겹다.

어느 날 나카스 강가에서 기요스바시를 건널 때였다. 문득 만넨바시 부근에 있던 바쇼의 암자 터와 맛사키 이나리 신사는 대지진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가보니 기요스바시 건너 남쪽 아사노시멘트 제조공장은 여전하여 예의 그 무시무시한 건물과 굴뚝이 솟아 있다.

한편으론 물가 옆에 바쇼 암자 터가 신사로 보존되고 길 건너 맛사키이나리 사당에 새로운 돌기둥이 우뚝 솟은 모습에, 도쿄 생활이 아무리 바빠져도 옛 풍류가의 흔적을 아직 없애지는 않는구나 싶어 안도했다.

오히사의 샤미센 연주에 맞춰 누군가 오치우도(落人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가부키 곡명, 밀회를 하다 도망가는 남녀를 다룬 노래)를 읊고, 오히사는 세이신(清心 가부키 곡 십육야세이신을 이름, 성문에 목이 매달린 도적을 다룬 노래)을 읊었다.

나는 요가라스가 유칸바 오쿠보의 뒷골목 나가야에 은거하며 문단이나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초연히 홀로 좋아하는 곳에서 하이쿠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진정으로 에도시대 고유의 하이쿠 시인 기질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며 마음 깊이 존경했다.

야마노테에 사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체면에 사로잡혀 허황된 명성을 얻으려 안달하는 반면 요가라스는 뒷골목 나가야의 빈민 생활이 훨씬 청렴하고 자유롭다며 기뻐했다.

때는 다이쇼 2년(1913), 본명 나가이 소키치永井壮吉, 즉 나가이 가후는 미타에 위치한 게이오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면 쓰키지에 있는 셋집으로 향했다.

가후의 글은 급격히 변화하는 도쿄의 틈새를 다룬다.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극장 뒷길에 낡아 누르스름해진 얼음가게의 깃발. 가후의 관심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에도의 유산에 쏠렸다. 가게 안쪽 소녀는 샤미센을 들고 기요모토를 연습한다. 기요모토는 가부키의 반주음악으로 발달한, 특유의 샤미센 곡조에 애달픈 가사가 아우러진 노래다. 에도시대 말기에서 메이지시대까지, 시타마치 소녀들이 흔히 배웠다.

요쓰야와 아카사카는 오늘날 도쿄의 중심이다. 고층빌딩과 고급호텔이 즐비하다. 당시 가후는 에도부터 이어져온 가난한 서민의 생활을 바라봤다. 분뇨糞尿를 가득 실은 배들이 오가고, 공장 사이사이 집들이 끼어 있고, 무덤가 옆에 기다란 집이 늘어선 모습은 문명개화와는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펄럭이는 빨래처럼 초연히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모습을, 가후는 그려내고 있다.

가후는 한손에 에도지도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그의 산책로는 오늘날 도쿄순환선 야마노테센 안쪽을 총망라한다. 그러나 에도지도에도 메이지, 다이쇼지도에도 없는,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사실 가후의 산책길에 중요한 포인트였다.

아무리 정밀한 도쿄 시내 지도라 해도 골목은 그리 선명히 나와 있지 않다.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지 혹은 어디로도 나올 수 없는 막다른 길인지는, 그 골목에 살 때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두 번 골목을 걸었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현대 도쿄도 ‘어슬렁어슬렁 걷기’를 나서면 옛 에도를 느낄 수 있다. 공터는 공원이 되고 강을 메워 도로를 만들어도 지명에는 옛 모습이 남아있다.

우에노上野는 높은 땅을 이루고 시부야渋谷는 골짜기를 이룬다. 니혼바시日本橋에는 다리가 있고 고코쿠지護国寺에는 절이 있다.

도쿄가 도쿄답게 존재하려면, 도쿄 사람이 도쿄 사람답게 존재하려면 에도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도쿄라는 도시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긴 역사와 문화 속 뿌리를 상실하고 만다면 얼마나 빈약해질 것인가. 그 까닭에 가후는 붓을 들었다. 도쿄에 남겨둬야 할 것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오토와 베니코音羽紅子

일찍이 에도는 시골이었다. 가마쿠라막부가 들어설 즈음 정권의 중심에서 가까웠지만, 가마쿠라시대(1180~1333) 이전이나 이후 에도시대(1603~1868)가 막을 열기까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교토와 오사카가 있는 간사이(관서) 지방에 편중해 있었다.

알지 못하는 땅이자, 알 수 없는 힘이 서린 귀신들의 땅이라 업신여기면서도 간사이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동쪽의 땅 가운데 풍요롭게 작물이 자라는 간토에 정치의 중심을 두었고, 이후 많은 사람이 에도에 정착해 이윽고 에도는 백만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된다.

이렇듯 에도시대가 내란 없이 삼백 년 넘게 번영을 누린 데에는 참근교대 제도의 영향이 컸다. 다이묘는 거액의 여비를 지출해야 했지만, 주요 도로 역참 마을과 에도의 주민에겐 다시없는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이 대거 에도로 이주한 요인으로 3대 세이이다이쇼군 이에미쓰가 제정한 참근교대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각 번藩의 우두머리인 다이묘大名가 2년에 한 번씩 반드시 에도 성을 방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에도를 오고가는 여비는 모두 다이묘가 부담했다.

요시와라는 오늘날 매춘업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매우 고급스러운 기모노를 걸치고, 문학을 이해하며, 악기를 다루고, 다도와 꽃꽂이에 능한 ‘오이란花魁’이란 고급 유녀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세간에는 삼대가 살면 에돗코(에도 토박이, 도쿄 토박이)라는 말이 있다. 삼대쯤 에도에 터 잡고 살면 에돗코가 됐으니, 그만큼 새로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간사이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오백 년, 천 년쯤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다’라는 확실한 가계도가 있을 때 비로소 토박이라 불렀기에 시간적 구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에도와 도쿄 모두, 도시가 비대해지다가는 파멸하고, 다시 비대해지기를 반복했다. 거리 풍경은 변모를 거듭했으며, 이주자가 끊이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도쿄를 방문한다면, 부디 고층빌딩에서 내려와, 가후처럼 어슬렁어슬렁 지상을 걸어보길 바란다. 눈이 핑핑 돌 만큼 정신없이 바쁜 이 거리가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 잎사귀가 속삭이는 소리에, 빨간 턱받침을 한 돌부처가 건네는 이야기에, 졸졸졸 흐르는 도랑이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 산책길에서 도쿄가 품어온 ‘생’을 만끽할 수 있기를.

오토와 베니코

일본은 오늘날에도 서력만큼 연호를 중시하는 나라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뀐다. 메이지시대(1868~1912) - 다이쇼시대(1912~1926) - 쇼와시대(1926~1989) - 헤이세이시대(1989~)

통학로인 한조몬, 다이칸초도리, 히토쓰바시, 간다를 중심으로 고지마치, 구단, 이치가야 등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 야마노테 마을 풍경을 즐겼다.

학교를 마치고 간다 강을 따라 간다, 야나기바시, 교바시, 하마초를 걸으며 강에 걸린 작은 다리와 강가 주변을 산책했다.

소토보리도리를 따라 이다마치(현 이다바시), 스이도, 오차노미즈를, 와세다도리를 따라 우시고메의 가구라자카, 오쿠보까지 산책했다.

고이시카와 저지대에서 혼고 고지대를 거쳐 네즈, 센다기, 야오이의 언덕 위를 걸어 올라가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길 즐겼다. 특히 모리 오가이의 저택 간초로가 있던 언덕길을 도쿄 제일가는 풍경이라며 좋아했다.

오쿠보 요초마치 집에서 게이오 대학이 있던 미타까지 전철을 타고 시나노마치, 아오야마를 구경했다. 때론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공터나 도랑을 찾아내어 좋아하는 잡초를 감상하곤 했다.

쓰키지 해안을 따라 가깝게는 신토미나 아카시초, 멀게는 쓰키시마까지 산책하며 강가 마을 풍경에 감흥을 받았다.

편기관을 거점으로 아카사카, 아자부, 시바, 미타까지 발길을 옮기며 오랜 절을 둘러봤다. 이해 처음으로 아라카와 방수로를 찾았다.

신풍속에 관심을 갖고 여름부터 긴자 카페 타이거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가운데 짬을 내어 친구 고지로 소우요 등과 긴자나 니혼바시 같은 번화가를 주로 다니며 서양 영화를 즐겼다.

니혼바시 나카스에 있는 친구 병원을 들릴 때마다 위쪽으로 고토부키, 아즈마바시를 건너 무코지마 주변까지, 아래쪽으로 기요스바시를 건너 후카가와, 스나마치까지 강가 마을을 누볐다.

『강 동쪽의 기담』 집필을 위해 사창가가 있는 다마노이(현 히가시무코지마)를 여러 차례 산책하며 마을을 스케치하고 거리 지도까지 손수 제작했다. 1948년 또다시 다마노이를 찾았지만,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불타버린 상태였다.

이치카와로 터전을 옮긴 뒤 마마 강을 따라 고노다이, 스가노, 야와타 등지를 돌며 오랜 절과 시골길을 감상했다. 특히 봄이면 마마 강의 벚꽃을 즐겼고, 이치카와 세무서가 있던 고노다이 언덕에 자주 올라 에도 강을 바라봤다.

도보뿐만 아니라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타고 이치카와 시내를 벗어나 우라야스나 후나바시까지 점점 산책로를 넓혀 나갔다. 

직접 쓴 각본이 잇달아 아사쿠사 극장에서 상영되자 매일같이 아사쿠사를 찾아 외식을 즐기고 영화를 감상했다. 단골집도 생겨났는데, 이해 처음 간 ‘아리조나 키친’에서는 10년 동안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조칸지가 있는 미노와, 요시와라 신사가 있는 센조쿠, 산야보리가 있는 이마도를 종종 찾아가 옛 에도의 향수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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