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쿄는 바다와 강, 수로와 도랑과 같이 물의 변화–가령 유유히 흐르는 물 혹은 움직이지 않고 고여서 죽어버린 물 등등–가 매우 많은 도시다.

시나가와 만의 흥미로운 경치는 시대 흐름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이를 대신할 새롭고 멋스러운 경치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나는 에이타이바시를 건너며 강어귀에 약동하는 광경을 접할 때마다 알퐁스 도데가 센 강을 오가며 화물선 생활을 그린 애처로운 단편 「라 벨 니베르네즈」가 생각난다.

스미다 강 하구 일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제껏 밝혔듯 에이타이바시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아즈마바시, 료고쿠바시 주변은 아직 정돈이 안 되어 에이타이바시처럼 감흥을 한데 집중시키기 어렵다.

갓난아기는 그 주위에서 마치 버려진 아기처럼 모래 위로 나가 마른 닭이 흘리고 간 먹이를 찾으려 애쓰거나 말 엉덩이에서 말똥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이런 광경을 접할 때마다 나는 호쿠사이나 밀레가 떠올라 회화적 사실주의에 깊이 감동한다.

그리고 내게 그림 소질이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도쿄 나들이가 처음인 지방 사람들은 전차 승강장을 잘못 알거나 시내에서 길을 헤매며 화가 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러한 허위 지명 역시 도시의 얄미운 악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도시의 도랑은 원래 하수에 불과하다. 『지치 한 그루紫の一本』에도 시바의 우다 강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메이케 저택의 하수가 아타고 아래부터 조조지 뒷문을 흘러 이곳으로 들어온다. 아타고 아래 주택가 하수도 흘러들어 우다가와바시에 이르면 작은 강물처럼 보이지만 물의 근원은 이와 같다."라고 나와 있듯, 예로부터 에도 시내에는 하수가 흘러들어 강을 이루는 곳이 적지 않았다.

도시는 활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부터 전해오는 유물을 최선을 다해 보존하여 그 품위를 지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룻배와 같은 것을 나 같은 사람 하나의 편협한 퇴보 취미로만 논해서는 아니 되리라.

고독하고 덧없는 삶도 있다. 은거의 평화도 있다. 실패와 좌절과 궁핍의 최후 보상인 태만과 무책임의 낙원도 있다. 서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신혼살림이 있는가 하면, 목숨 건 모험에 몸을 맡기는 밀애도 있다. 골목은 좁고 짧기는 해도 풍부한 멋과 변화를 지닌 장편소설과 같다 할 수 있으리라.

눈, 비, 바람, 달, 석양의 도움 없이는 이 어정쩡한 시가지에서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시내 대로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불쾌함과 혐오감이 나의 관심을 그늘에 숨은 골목 풍경으로 잡아끄는 가장 큰 이유다.

료고쿠의 넓은 대로를 따라 난 돌이 깔린 좁은 길에는 여성용 장신구 파는 가게나 일용품 가게, 센베이 가게 등 다양하고 작은 가게가 성행하여 마치 지붕 없는 지하 상점가를 보는 듯하다.

개나 고양이가 무너진 담장이나 벽 사이를 찾아내 자연스레 종족끼리 통로를 만드는 것처럼 큰길가에 집을 세우지 못한 서민은 큰길과 큰길 사이에 그들이 살기 적당한 골목을 직접 만들었다.

골목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생활의 비애 속에서 스스로 심오한 골계적 정취를 풍기는 소설 세계다. 따라서 모든 속된 감정과 생활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격자문과 하수구 덮는 널빤지, 빨래 건조대와 울타리 문, 철책 등 온갖 도구와 일치한다. 골목은 어엿하게 예술이 조화를 이룬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내를 산책하다 보면 마침 앞 장에서 논한 골목과 비슷하게 흥미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공터다. 번화한 도로 사이로 나팔꽃이나 메꽃, 달개비나 질경이 같은 잡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시내 번화한 마을의 창고와 창고 사이 혹은 짐배가 오가는 물길 근처 공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염색가게 주인이 천을 말리고, 머리 올리는 끈 만드는 장인이 작업을 한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호쿠사이의 그림이 떠오른다.

분시치에게   밟히지 마라 뜰의   달팽이야
머리 묶을 끈   붙이는데 덧없이   벌레 우는 소리
커다란 줄이   볕 쬐는 곳 너머로   기러기 날다 

이 시는 기카쿠 시문집 『루이코지』의 ‘북쪽 창문’에도 실려 있다. 『루이코지』는 내가 즐겨 읽는 책 가운데 한 권이다.

공터는 말하자면 잡초의 화원이다. 비단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금방동사니’ 이삭, 털보다도 부드러운 ‘강아지풀’ 이삭, 따사롭고 연붉은 ‘개여뀌’ 꽃, 산뜻하고 창백한 ‘질경이’ 꽃, 모래알보다 작고 새하얀 ‘별꽃’,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잡초도 제법 그럴싸하게 가련한 정취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잡초는 와카(和歌 일본 전통적인 시조)에서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타쓰 고린(宗達光琳 에도시대 화가 다와라야 소타쓰와 오카다 고린을 함께 지칭하는 말)의 그림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에도 서민문학이라는 하이카이(俳諧 골계적이고 해학적인 에도시대의 산문시)와 교카가 생기고 나서야 나서야 비로소 잡초가 문학에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요즘 교외는 무서운 기세로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으면 건축물을 세우고, 그렇지 않으면 쟁기로 주저하지 않고 갈아엎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쿠보 주변은 이렇듯 자연 대부분이 들판 그대로인 상태로 남겨져 있는가. 우습게도 이것이 실로 속물 중의 속물인 육군의 선물이다.

그저 시끄러운 게 아니라 울화가 터진다. 하늘 아래 모두의 길을 마치 제 것인 양 횡령하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행태는, 우리 서민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불쾌하게 하는 거대 기관이 한편으로 옛날 무사시노의 정취를 간직한 이곳 도야마 들판을 보존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언제나 이상하리만치 이것을 잃으면 저것을 얻게 된다. 이로움이 있으면 해로움도 있는 법, 새삼 일리일해一利一害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늘 유난히 여름날 어스름한 황혼이 길었던 데다 휘영청 달이 밝아 이를 보지 못함을 원망스러워 하며 원래 왔던 사메가하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요즘 관리들처럼 멍청한 일을 생각해내는 인간도 없다. 도쿄라는 도시의 외관, 일본이라는 국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빈민굴 철거보다도 우선 거리 곳곳에 세워진 동상부터 없애려 서둘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도쿄 토목공사는 이리저리 손을 써서 부산하게 도쿄 경치를 훼손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다행히도 잡초라는 것이 있어 불타버린 들판과 같이 나무 한 그루 없는 공터에도 푸르고 부드러운 양탄자를 깔아 달빛 흐르는 곳에 이슬로 자수를 놓는다. 박복한 우리 시인들은 전원보다도 세속의 도시에서 보다 깊은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벼랑은 공터나 골목과 비슷하게 나의 히요리게다 산책에 적잖이 흥미를 돋운다. 왜냐하면 벼랑은 야생조릿대나 참억새에 섞여 엉겅퀴, 거지덩굴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잡초가 우거져 있거나 때때로 맑은 물이 솟거나 하수가 골짜기처럼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까닭이다.

한편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시야를 가로막는 무엇 하나 없이 드넓은 하늘이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의 행방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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