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혁명을 앞당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옳은 말이었다. 이 민족의 혁명을 담당할 전체 당을 놓고 보자면 그는 한낱 미미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직이란 그런 미미한 개인의 힘을 모아 각 개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로당에 입당한 이래로 그는 계속 앞만 쳐다보며 달려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삼 년을 한걸음에 휙 지나쳐온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전의 전 생애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 그 삼 년이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했다. 혁명이란 어쩌면 삶의 농축액이나 엑기스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음날 서장실에서 순회재판관 입회하에 치안재판이 열렸다. 다들 법령 2호 및 포고령 위반으로 구류 29일에 벌금 오천 원을 언도받았다. 몸뚱이는 엉망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다. 역사 앞에 떳떳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웃음이었다. 장성수가 그를 돌아다봤다.

48년 10월 20일 마실 간다고 나갔던 아지트 집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난리 났다요. 여수 십사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요."
"왜 그랬다고 합디까?"
"그건 모리것고, 암튼 구례 경찰들도 여차하면 도망갈라고 싹 준비해놓고 있답디다."

"해방이다!"
안개 너머로 해방의 함성이 물결쳤다. 그는 총알처럼 면사무소로 튀어나가 밤새 만든 인공기를 게양했다.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대중의 힘찬 함성처럼 인공기는 가을바람을 잔뜩 안고 마음껏 밝은 하늘을 휘저었다.

역시 해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10월 25일 국군 12연대와 경찰이 다시 구례읍을 장악했다. 군당에서는 세포를 통해 긴급지시로 계엄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교육 실시요령을 전달해왔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노 동무라고 자신을 밝힌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익계 장교 열여섯 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김지회를 제외한 열다섯 명의 장교는 이미 사살된 후였다. 모병을 나갔을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 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난 이현상은 눈물을 터뜨렸다. 자기의 동지들인 줄도 모르고 좌익계 장교들을 사살했던 지창수도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장교조직은 중앙당에서, 일반 사병조직은 지방당에서 관할하는 바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구례군 유격대장 박종하는 담 크고 호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일 미터 팔십이 넘는 훤칠한 키에 뛰어나게 잘생겼던 박종하는 이후 백운산지구 사령관을 지내다 이현상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현상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강 사령으로 알려진 박종하는 그가 전투를 지휘한다고 하면 아프다고 드러누웠던 사람들까지 싸우러 나가겠다며 따라나설 만큼 대단한 지장이었다.

이날의 전투로 양측 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계엄군은 다음날 반란군의 시체라며 트럭 몇 대에 시체를 실은 채 시위를 하고 다니다가 이삼 일 후 섬진강변 양정 모래밭에서 시체를 불태웠다. 그 전날 문척면 토금부락에서 동조자라고 붙잡아간 열일곱 명도 조사 한번 없이 양정 모래밭에서 총살당한 후 불태워졌다.

이 전투 때문에 구례지역은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피바다가 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지리산의 14연대 주력은 토벌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중대 단위로 각 마을을 뒤지며 좌익의 기초조직 파괴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파괴된 것은 좌익의 기초조직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삶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급적 직관으로 심정적으로 혹은 쌀 한 되로 좌익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이 좌익이라 하여 처형, 투옥당하거나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김용채가 스파이였던 것이다. 그를 따라간 마종재는 접선과정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사살되고 다행히 다른 동지들은 구사일생으로 튀었다고 했다. 곧바로 아지트로 돌아온 이들은 생활도구를 챙겨 다른 동지들과 곧장 아지트를 떴다. 몇 초 간격으로 김용채가 경찰을 데리고 아지트를 공격했다.

그는 끝끝내 평양까지 갔었다는 조용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도시락을 못 싸와 친구들 몰래 물만 마셔대는 아픔을 나누는 친구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계급투쟁을 위해 떨쳐 일어선 그들은 이제 동지였다. 함지에 생선을 이고 다니던 고기장수 어머니의 아들 조용식과 말이 양반이지 양반이라 더 배가 고팠던 유혁운은 손을 맞잡고 긴긴 겨울 밤을 지새웠다.

구례군당 선전부는 즉시 당기관지 <앞으로>의 발간에 착수했다. 그에게 등사판과 부속재료 일체가 맡겨졌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곧 다른 신문 검토에 들어갔다. <노력인민>이라는 도당 기관지 등을 세밀히 검토한 후 그들은 신문 면을 배정하고 곧 원고청탁을 시작했다. 군책에게는 ‘창간사’를, 조직책에게는 ‘유격투쟁의 방향과 투쟁지침’을, 군 인민위원장에게는 ‘인민과 주권’, 그리고 ‘적 치하의 당 활동과 인민들에 대한 당 노선 홍보를 위한 방법’ 등을 청탁했다.

순회투쟁은 3월 20일경까지 계속되었다. 악양, 청암 등을 거쳐 20일경 전북 남원군 산내면 금판정 마을에 도착한 14연대는 외부통로를 차단해놓고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김지회와 일부 간부들은 금판정의 술도가에 묵었다. 김지회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인 도갓집 주인은 그들에게 얼큰히 술을 먹인 후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산내지서에 고발했다.
그날 밤 14연대는 술도가 주인의 안내로 보초선을 피해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홍순석, 김지회 두 지휘관이 현지에서 전사하고 상당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은 지리산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산내면 전투를 두고 지리산이 시끌시끌했다. 유능한 지휘관의 손실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한두 번 전투를 해본 사람들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먹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14연대뿐만 아니라 모든 유격대의 철칙이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고, 원칙을 위배할 경우에는 아무리 뛰어난 당원일지라도 심하게는 처형이 되는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해서 당했다는 소문과 달리 군경의 매복과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순회투쟁의 마지막 무렵에 단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단 한 번의 원칙 이탈은 자신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14연대와 남한 전 유격투쟁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아직은 텅 빈 아지트를 지키며 혁운은 지리산과 달리 벌써 싱싱하게 피어오는 백운산의 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용지동 계곡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며 하루가 다르게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는 도토리나무며 떡갈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무릎을 쳤다.
아! 저게 바로 혁명이구나. 헐벗은 인민대중의 가슴을 녹음으로 뒤덮어오는 것. 어린 등짝이 휘어지게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올 때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눈물로 바라볼 때나, 느닷없이 합환주를 마셔야 했을 때나,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불어대던 스산한 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멈춰 있었다. 대신 그 가슴엔 촉촉하게 물오른 사월의 신록이 넘실대고 있었다.

게다가 강사령부대로서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령관이 목숨을 걸고 가장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데 대원들로서는 사령관 이상으로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움만 있으면 언제나 최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싸우던 박종하는 나중에는 이현상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일개 대원의 생명도 그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으로 소중히 알아야 할진대 한 부대를 지도해야 할 사령관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직무유기가 그를 하부로부터 최대의 신임을 받는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 한번 싸간 적이 없어도 점심을 굶어본 일이 없었고, 책가방은 아예 다른 아이들을 시켜서 들고 다니도록 했다. 자기 집으로는 책가방을 들고 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수업시간 외에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은 셈인데 그러고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것을 보면 타고난 머리도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단도 던지는 솜씨로 유명했던 박종하는 이미 그 시절부터 참새 잡는 솜씨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면 하루 종일 참새잡이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솜씨가 대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날마다 아이들에게 참새 잡기에 좋은 돌, 그것도 꼭 구슬만한 크기에 구슬처럼 매끄러운 것으로 스무 개씩 돌을 상납하도록 시킨 박종하는 그 돌을 신주머니 몇 개에 나눠 담아 다른 아이에게 들리고 수업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신주머니를 든 아이는 참새잡이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박종하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박종하의 돌에 깨진 동네 장독이 꽤 되었던 모양이지만 장독 주인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장독 값은 고사하고 호통 한번 치기도 어려웠다. 두 손을 허리에 탁 받치고 버텨 서서 아저씨가 봤느냐고 대드는 데는 어른이라도 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유명한 참새잡이에 동네의 원성이 자자한 것을 다 알면서도 박종하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아다준 덕에 먹게 된 참새탕에 반해서 아들을 나무라지 못했다고 한다.

박종하를 변화시킨 장본인은 곧 밝혀졌다. 바로 공산당이었다.

"언제 즈그들이 밥 한때라도 공걸로 줘봤간디. 나사 밥 묵은 죄배끼 없는디 즈그들이 어쩔 것이여. 글고 들켜봤자 겁날 것 없그마. 기왕지사 굶어죽을 목숨인디 이래 가나 저래 가나 그거이 그거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중일전쟁이 발발하였으니…… 하로빨리 일제가 패망토록 열성조께서……."
그러나 할아버지는 결국 일제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일제의 기승이 나날이 더해가던 1939년 초에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는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사당에서 일제가 패망토록 도와달라고 신주께 빌며 흘렸던 할아버지의 눈물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그도 매일 부역에 동원되어 저수지 공사장, 작전도로 개설장에서 혹사당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힘들여 지은 농사를 다 빼앗기고 공짜일을 해야 하는 건지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고 증오가 불타올랐다.

"일본군은 곧 망할 것이여."
"니가 그걸 어찌 알아야?"
"니는 김일성 장군 소식도 못 들었냐? 김일성 장군은 축지법을 써서 일본 놈들이 꼼짝없이 당한다드라."
"그려. 나도 들었는디, 만주 가면 독립운동 허는 사람들이 쌔고 쌨대야. 일본 놈들이 날고 겨봐야 축지법 쓰는 김일성 장군을 당하것냐. 해방은 시간 문제랑께."
"글먼 우리도 독립운동 허러 만주 가끄나?"
"아이가, 우리는 아직 쬐깐헌디. 더 배와가꼬 가야제. 언제라도 가기는 갈껑께."

"지금 전세는 대단히 불리합니다. 일본사람 기질대로 쉽게 손들 리 없고 갈 데까지 가겠지요. 조선 사람은 중학생까지 다 끌려가게 될 겁니다. 징병이 면제되는 철도종사원 시험을 보게 하십시오. 응시자격이 고등과 2년 수료 이상이어야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정군 실력이면 붙을 수 있을 겁니다."

수십 년간 쌓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라 말릴 수도 없고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해방이 되고 몇 달이 지났으니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것이지 해방 직후에는 구례에서만도 댓 명의 친일분자들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주로 관청의 노무과 사람들로, 앞장서서 우리 민족을 일본의 전쟁터로 내쳤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곡성세무과 사람들은 죽지 않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 법정요금을 다 문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새 관청에는 일제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해방조국의 관리로 다시 임명되었다. 45년 10월 미군정의 아놀드 군정장관의 선언대로 "남한에서 유일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미군정일 뿐이며, 미군정은 행정부의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통제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해방으로 친일의 딱지를 벗어던지고 공개적인 도둑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해방으로 눈 버젓이 뜬 채 강도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도둑들에게 친일의 표지를 벗겨주고 합법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쥐어준 것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또 나라를 양놈들헌테 뺏겼담서?"
"친일했던 놈들이 양놈들 등에 업고 설쳐대는 꼬락서니 좀 보라제. 잘되던 건준위는 왜 뺏고 지랄인가 몰러. 독립운동 했다는 이승만이도 순 사쿠란가비여."
"그나저나 나라가 우째 될라고 이라는고. 양코배기들은 일본 놈들보다는 쪼깨 나슬란가?"

"낫기는 문뎅이 지랄한다고 나사? 서울사람들 얼마 전에 쌀 달라고 난리친 소식도 못 들었는갑네. 쌀이 없으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그랬다는디 그 심정이 오죽했겄어. 양놈들 생긴 모냥을 보드라고. 숭악한 도둑놈들맨키 안 생겼는갑네. 잡것들이 일본 놈도 안 헌 하곡수매를 다 흐것다고 염벵이여, 염벵이."

"운창아, 니 결혼날짜가 잡혔다."
"예?"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부시게 흰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만 바라보았다. 말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하숙집 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하숙집 딸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결혼이라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였다.

일찍이 단발을 하고 개화물을 먹었던 아버지, 문중에서 정해준 짝인 어머니와 맞지 않아 전주에서 기생을 데려와 첩으로 삼았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봉건잔재가 뿌리박힌 양반이었다.
"지는 죽어도 장가 안 갈랑께 알아서 허시씨요."

"하지만 조선공산당도 반탁을 외치지 않았나?"
그가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좌익이어서 그는 좌익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 세상소식이 깜깜하구나. 처음엔 그랬지만 금세 중앙당에서 반탁이 중대한 오류라는 지적이 내려와서 다들 찬탁으로 돌아섰는데."

꼭 이상필의 말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 구례에서도 쓸 만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좌익이었다. 당연히 그도 친하게 지내는 좌익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가끔 구하기 어려운 기차표를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낯선 사람들을 데려와 잠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철저한 우익이 아니면 공산주의자가 되도록 만들고 마는 것, 그것이 당시 남한정치의 실상이었다.

47년 1월 6일 좌익의 외곽단체인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고 그는 서슴없이 가입했다. 철도에 계속 근무하면서 비합법 동지들의 왕래를 상시 보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47년 4월에는 남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했다. 남로당에 입당하는 것이 사회개혁을 위해 가장 바른 길이라고 믿은 까닭이었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을 가히 짐작하지도 못했고, 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유일하고 정당한 것이었고 선택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선택하는 것임을.

근 사십 년간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찌 됐건 이 땅의 분단을 인정할 수 없었고, 친일파들이 다시 윗대가리에 앉아있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으로 누군가의 창고에서 썩어나는 쌀을 두고도 강냉이로 간신히 끼니를 때워야 했던 이들이었다. 이 땅의 민중은 우익, 좌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누가 자신의 편인가 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을 지지했다. 그가 몇 번이나 불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민중의 선택을 믿은 까닭이었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아버지 이상으로 속을 끓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면서도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부모를 생각하며 그의 가슴 역시 부모처럼 멍드는 것 외에, 그리고 적어도 당신들의 자식이 역사 앞에 욕되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 외에 그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었다.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형사의 입가에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일제 때부터 갖가지 고문에 이력이 난 고문기계들이었다. 압제자들에게 빌붙어 민족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던 저런 놈들에게 다시 이 나라를 내주다니, 온몸에 돋은 소름이 분노로 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 내가 보고 겪고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의외로 그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세상엔 두 개의 계급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의 노동을 착취해서 살찌는 자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남까지 살찌우는 자밖에 없다."

나는 두 눈이 확 터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세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밖에 보지 못했던가. 나는 왜 세상이 정체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 정체된 세상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의 낡은 틀을 혁명으로 파괴했듯이, 체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도 있게 마련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못 가진 자의 표지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계급의 표지였고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표지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머니는 곧 전남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하는 날 나는 광주로 내려갔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서 아버지는 병실 호수를 모르는 나를 위해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보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담낭암인데 수술도 소용없단다. 엄마를 위로하려고 수술한다는 거지 희망은 없는가 보더라. 쨌다가 그냥 꿰매는 거지. 길어야 두 달일 게다. 안 알리려고 했다만 너도 알아야지…….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한 몸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오래 살았다. 그 돈 있다는 거 아버지한테도 알리지 말고 꼭 네 시집 밑천에 보태 써라. 살기 힘들다고 찾아 쓰지 말고. 엄마도, 형제 하나도 없이 어떻게 혼사를 치를지…….

다섯 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의외로 상태가 좋았다고 했다. 재발만 아니라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마취상태에서도 나를 찾았다. 밤을 꼬박 새우며 가래를 받아냈다. 마취제 냄새가 지독해서 나까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수술한 자리에 꽂은 호스는 계속 손으로 만져야 분비물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가 살아날 수 있다면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다드린 이태의 《남부군》이었다. 흐린 불빛 아래 일에 지친 몸으로 책을 읽으며 부모님은 간혹 울고 웃었다. 책에 적혀 있는 옛 동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어머니는 몇날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적이 왜 없었겠냐. 더러 그런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미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휴전 무렵에 가서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무장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기다리는 건 이름 없는 죽음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함께 싸워 주리라고 믿었다. 그런 신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려가면서 그 악조건을 견딜 수 있었겠냐?"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아버지, 그 유명한 남부군의 정치지도원을 지낸 어머니, 나는 두 분이 자신들의 과거를 두 발로 삼아 당당히 설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것이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상의 순결을 지켜내며 창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나와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갚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부모와 내 부모 같은 선배 어른들의 과거를 복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멀리 지리산에도 아침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산에서 땅을 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결코 패잔병의 함성이 아니었다. 4.19로, 80년 광주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점점 커지더니 불쑥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산등성이에 내 부모가, 내 부모의 얘기 속에서 혹은 역사책 속에서 말로만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 함성을 뒤쫓기 시작했다.

운창이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반내골 정씨 하면 문척면에서 그 집 땅 안 밟고는 지나갈 수가 없다고 소문난 양반 집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있었던 3.1운동에 관계하면서부터 일본 놈들의 탄압과 억압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일찍 단발을 하는 등 일본 놈들 정책에 동조하다가 할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겠다며 전 재산을 팔아넘긴 후에는 땅 한 마지기 없는 허울 좋은 양반이 되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야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평생지는 것뿐이지만 나는 왜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아니 뭔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분홍빛 미래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뜨려야 하는가. 억울한 걸로 따지자면어머니보다 내가 몇 배 더했고, 우는 걸로 억울함을 풀자면 마음잡고 일 년을 울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차가운 몸이 내 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도 나도 다른 방식으로 온 밤을 울며 지새웠다. - P-1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 외에 취미생활을 가질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누구 못지않게 똑 소리 날 만큼 살림을 잘한다는 것 외에,

교문을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가지 않고 나는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데려간 적이 없어서 어머니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어머니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오천 원이라고 적힌 봉투를 내면서 나를 보았다. 이번만은 내 기를 살려주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어머니로서는 거금을 준비한 모양이지만 역시 어깨에 힘을 주기에는 너무나 적은 액수였다.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했다.

나는 문득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어머니도 공산주의자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젊은 시절 내내 총을 들고 싸웠는지도 몰랐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처럼.

나는 어머니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 미래를 빼앗아간 자가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내 부모 역시 나와 똑같이 과거와 미래를 차압당한 사람이라면, 내 분노를 어디로 쏟아 부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빨갱이였던 어머니는, 싸구려 속옷을 파는 보따리장수인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당당하고 의젓했다.

"가난뱅이 엄마가 창피했니? 너도 조금씩 나이 들면 알게 될 거야. 돈이란 건 마음대로, 일한 대로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란다. 오히려 없는 편이 떳떳한 거야. 그리고 훌륭한 사람은 언제나 없는 집에서 나오잖니?"

가난이 순간순간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어머니도 친구들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가난까지도 뛰어넘는 의지의 한국인이 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의지의 한국인이 되려면 비상한 머리와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슬로 묶이지 않은 백색의 미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아직까지 제 새끼를 찾아 헤매는 고슴도치 어미처럼 나를 천재로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고슴도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만나는 짐승들마다 물었다.

빈집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자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부렸던 모든 투정과 짜증은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슴속의 울분을 털어버릴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화살은 당연히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내 부모는 내가 알건대 누구보다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공산주의가 무작정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임을 나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 명이 같이 쓰는 일반 병실의 어머니 침대맡에는 그 흔한 주스도, 한 송이 꽃도 놓여있지 않았다.

수술실 앞에서 담배를 빼문 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봐야 했을 남편은 멀리 남도의 흰 벽 안에 갇혀 있고, 엄마를 부르며 울어야 할 딸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도 찾아와주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과거를 가진 가난한 어머니를 그 외에 누가 찾아줄 것인가.

그러던 1979년 8월 느닷없이 교도소에서 통보가 왔다. 아버지가 8.15 특사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같이 문화동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눈에 덮여 비정하도록 희던 교도소는 녹음에 묻혀 있었다. 교도소 앞 정문에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최규하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한다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분명히 암살당했을 거라며 아버지는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시끄럽겠어."
"어쨌거나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모양이지. 그러고 보면 역사의 심판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정확하다구."

나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이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김일성을 독재자라고, 부자세습까지 하는 독재자라고 욕했었는데. 그래서 그 젊은 남자들은 대통령의 죽음을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던 것일까?

김재규가 대단하다는 말이 떠돌았고 박정희는 독재자이며 우리도 언니 오빠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어지러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근처 다른 학교와 합류해서 시내로 진출하자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성공한 학교는 없었다. 교문까지 나갔던 학교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말만 돌았을 뿐이었다

광주는 진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잡혀갔다. 세상에는 제법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열심히 신나는 쇼를 방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왠지 허둥거렸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몸짓은 과장되어 보였다. 뭘까? 나는 알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권력과 돈을 틀어쥐면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그때까지의 내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어지러운가? 광주 사람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것인가? 왜 누구는 공산당이 되고 누구는 공산당을 막는가?

구례여고가 아니라 전남 동부6군의 교육도시라는 순천으로 전학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농사나 짓게 되면 죽어버리겠다는 어머니의 협박과 호소 탓이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에 열중할 수 없었다.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넣어 다녔고 수업시간에는 필기도 하지 않은 채 소설책만 읽었다. 영어단어를 외고 방정식을 풀고, 그리하여 좋은 대학에 가는 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나 가난이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1948년 국군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여수 14연대가 백운산 줄기인 반내골을 지나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였다. 구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동네사람들과 의논해서 반란군에게 밥 한 끼를 해주고 고추장이며 된장 등속을 대주었다. 할아버지는 좌익도 아니었고, 동네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철수한 다음에야 기세등등하게 반내골로 들어온 국군 토벌대는 부역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를 처형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아랫동네 토금리에서는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서른 명이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고 했다.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반내골 사람들과 반내골 사람들의 가난에 대해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누구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고통과 절망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는 표지를 달고 울부짖을 때 반내골 아이들은 가난이라는 표지를 달고 나처럼 미래와 희망을 갈가리 찢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이나 부산으로 떠나든가, 남의 집 식모가 되어야 하는 애들이 태반인데 적어도 내게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미래를 한탄하고 고민할 여지라도 남아 있었다. 가난이라는 굴레는 빨갱이라는 낙인보다 더 무서웠다

범인은 바로 정부였다. 이 무모한 정책이 독재권력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자금의 필요와 몇몇 특권층의 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에게 수많은 농민의  좌절과 고통쯤은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자신들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세 식구면 꽉 차는 방에 일거리를 벌여놓고 산수유나 밤을 까며 긴 겨울밤을 이야기로 꽃피웠다.

사실 아무 밑천 없는 나로서는 대학을 졸업해봐야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찰 게 뻔했다. 부잣집 아들이라도 잡기 전에는 말이다. 당장 부모님이 구걸하다시피 빌려온 돈으로 간신히 대학엘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팔백 원짜리 커피를 마시거나 천오백 원짜리 맥주를 마시는 일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이천 원이면 돼지고기가 한 근이었고 일 년치 등록금은 부모님이 놀고먹으며 일 년을 쓸 돈과 맞먹었다. 그런 돈으로 대학을 마친 나는, 국졸인 부모와 친척을 둔 나는 적어도 호미나 낫 대신 펜을 들고 살게 될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