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일전쟁이 발발하였으니…… 하로빨리 일제가 패망토록 열성조께서……."
그러나 할아버지는 결국 일제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일제의 기승이 나날이 더해가던 1939년 초에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는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사당에서 일제가 패망토록 도와달라고 신주께 빌며 흘렸던 할아버지의 눈물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그도 매일 부역에 동원되어 저수지 공사장, 작전도로 개설장에서 혹사당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힘들여 지은 농사를 다 빼앗기고 공짜일을 해야 하는 건지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고 증오가 불타올랐다.

"일본군은 곧 망할 것이여."
"니가 그걸 어찌 알아야?"
"니는 김일성 장군 소식도 못 들었냐? 김일성 장군은 축지법을 써서 일본 놈들이 꼼짝없이 당한다드라."
"그려. 나도 들었는디, 만주 가면 독립운동 허는 사람들이 쌔고 쌨대야. 일본 놈들이 날고 겨봐야 축지법 쓰는 김일성 장군을 당하것냐. 해방은 시간 문제랑께."
"글먼 우리도 독립운동 허러 만주 가끄나?"
"아이가, 우리는 아직 쬐깐헌디. 더 배와가꼬 가야제. 언제라도 가기는 갈껑께."

"지금 전세는 대단히 불리합니다. 일본사람 기질대로 쉽게 손들 리 없고 갈 데까지 가겠지요. 조선 사람은 중학생까지 다 끌려가게 될 겁니다. 징병이 면제되는 철도종사원 시험을 보게 하십시오. 응시자격이 고등과 2년 수료 이상이어야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정군 실력이면 붙을 수 있을 겁니다."

수십 년간 쌓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라 말릴 수도 없고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해방이 되고 몇 달이 지났으니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것이지 해방 직후에는 구례에서만도 댓 명의 친일분자들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주로 관청의 노무과 사람들로, 앞장서서 우리 민족을 일본의 전쟁터로 내쳤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곡성세무과 사람들은 죽지 않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 법정요금을 다 문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새 관청에는 일제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해방조국의 관리로 다시 임명되었다. 45년 10월 미군정의 아놀드 군정장관의 선언대로 "남한에서 유일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미군정일 뿐이며, 미군정은 행정부의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통제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해방으로 친일의 딱지를 벗어던지고 공개적인 도둑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해방으로 눈 버젓이 뜬 채 강도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도둑들에게 친일의 표지를 벗겨주고 합법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쥐어준 것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또 나라를 양놈들헌테 뺏겼담서?"
"친일했던 놈들이 양놈들 등에 업고 설쳐대는 꼬락서니 좀 보라제. 잘되던 건준위는 왜 뺏고 지랄인가 몰러. 독립운동 했다는 이승만이도 순 사쿠란가비여."
"그나저나 나라가 우째 될라고 이라는고. 양코배기들은 일본 놈들보다는 쪼깨 나슬란가?"

"낫기는 문뎅이 지랄한다고 나사? 서울사람들 얼마 전에 쌀 달라고 난리친 소식도 못 들었는갑네. 쌀이 없으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그랬다는디 그 심정이 오죽했겄어. 양놈들 생긴 모냥을 보드라고. 숭악한 도둑놈들맨키 안 생겼는갑네. 잡것들이 일본 놈도 안 헌 하곡수매를 다 흐것다고 염벵이여, 염벵이."

"운창아, 니 결혼날짜가 잡혔다."
"예?"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부시게 흰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만 바라보았다. 말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하숙집 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하숙집 딸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결혼이라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였다.

일찍이 단발을 하고 개화물을 먹었던 아버지, 문중에서 정해준 짝인 어머니와 맞지 않아 전주에서 기생을 데려와 첩으로 삼았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봉건잔재가 뿌리박힌 양반이었다.
"지는 죽어도 장가 안 갈랑께 알아서 허시씨요."

"하지만 조선공산당도 반탁을 외치지 않았나?"
그가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좌익이어서 그는 좌익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 세상소식이 깜깜하구나. 처음엔 그랬지만 금세 중앙당에서 반탁이 중대한 오류라는 지적이 내려와서 다들 찬탁으로 돌아섰는데."

꼭 이상필의 말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 구례에서도 쓸 만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좌익이었다. 당연히 그도 친하게 지내는 좌익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가끔 구하기 어려운 기차표를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낯선 사람들을 데려와 잠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철저한 우익이 아니면 공산주의자가 되도록 만들고 마는 것, 그것이 당시 남한정치의 실상이었다.

47년 1월 6일 좌익의 외곽단체인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고 그는 서슴없이 가입했다. 철도에 계속 근무하면서 비합법 동지들의 왕래를 상시 보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47년 4월에는 남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했다. 남로당에 입당하는 것이 사회개혁을 위해 가장 바른 길이라고 믿은 까닭이었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을 가히 짐작하지도 못했고, 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유일하고 정당한 것이었고 선택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선택하는 것임을.

근 사십 년간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찌 됐건 이 땅의 분단을 인정할 수 없었고, 친일파들이 다시 윗대가리에 앉아있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으로 누군가의 창고에서 썩어나는 쌀을 두고도 강냉이로 간신히 끼니를 때워야 했던 이들이었다. 이 땅의 민중은 우익, 좌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누가 자신의 편인가 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을 지지했다. 그가 몇 번이나 불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민중의 선택을 믿은 까닭이었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아버지 이상으로 속을 끓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면서도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부모를 생각하며 그의 가슴 역시 부모처럼 멍드는 것 외에, 그리고 적어도 당신들의 자식이 역사 앞에 욕되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 외에 그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었다.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형사의 입가에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일제 때부터 갖가지 고문에 이력이 난 고문기계들이었다. 압제자들에게 빌붙어 민족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던 저런 놈들에게 다시 이 나라를 내주다니, 온몸에 돋은 소름이 분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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