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 내가 보고 겪고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의외로 그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세상엔 두 개의 계급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의 노동을 착취해서 살찌는 자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남까지 살찌우는 자밖에 없다."
나는 두 눈이 확 터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세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밖에 보지 못했던가. 나는 왜 세상이 정체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 정체된 세상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의 낡은 틀을 혁명으로 파괴했듯이, 체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도 있게 마련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못 가진 자의 표지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계급의 표지였고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표지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머니는 곧 전남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하는 날 나는 광주로 내려갔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서 아버지는 병실 호수를 모르는 나를 위해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보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담낭암인데 수술도 소용없단다. 엄마를 위로하려고 수술한다는 거지 희망은 없는가 보더라. 쨌다가 그냥 꿰매는 거지. 길어야 두 달일 게다. 안 알리려고 했다만 너도 알아야지…….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한 몸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오래 살았다. 그 돈 있다는 거 아버지한테도 알리지 말고 꼭 네 시집 밑천에 보태 써라. 살기 힘들다고 찾아 쓰지 말고. 엄마도, 형제 하나도 없이 어떻게 혼사를 치를지…….
다섯 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의외로 상태가 좋았다고 했다. 재발만 아니라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마취상태에서도 나를 찾았다. 밤을 꼬박 새우며 가래를 받아냈다. 마취제 냄새가 지독해서 나까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수술한 자리에 꽂은 호스는 계속 손으로 만져야 분비물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가 살아날 수 있다면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다드린 이태의 《남부군》이었다. 흐린 불빛 아래 일에 지친 몸으로 책을 읽으며 부모님은 간혹 울고 웃었다. 책에 적혀 있는 옛 동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어머니는 몇날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적이 왜 없었겠냐. 더러 그런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미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휴전 무렵에 가서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무장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기다리는 건 이름 없는 죽음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함께 싸워 주리라고 믿었다. 그런 신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려가면서 그 악조건을 견딜 수 있었겠냐?"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아버지, 그 유명한 남부군의 정치지도원을 지낸 어머니, 나는 두 분이 자신들의 과거를 두 발로 삼아 당당히 설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것이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상의 순결을 지켜내며 창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나와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갚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부모와 내 부모 같은 선배 어른들의 과거를 복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멀리 지리산에도 아침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산에서 땅을 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결코 패잔병의 함성이 아니었다. 4.19로, 80년 광주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점점 커지더니 불쑥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산등성이에 내 부모가, 내 부모의 얘기 속에서 혹은 역사책 속에서 말로만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 함성을 뒤쫓기 시작했다.
운창이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반내골 정씨 하면 문척면에서 그 집 땅 안 밟고는 지나갈 수가 없다고 소문난 양반 집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있었던 3.1운동에 관계하면서부터 일본 놈들의 탄압과 억압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일찍 단발을 하는 등 일본 놈들 정책에 동조하다가 할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겠다며 전 재산을 팔아넘긴 후에는 땅 한 마지기 없는 허울 좋은 양반이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