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서장실에서 순회재판관 입회하에 치안재판이 열렸다. 다들 법령 2호 및 포고령 위반으로 구류 29일에 벌금 오천 원을 언도받았다. 몸뚱이는 엉망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다. 역사 앞에 떳떳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웃음이었다. 장성수가 그를 돌아다봤다.
48년 10월 20일 마실 간다고 나갔던 아지트 집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난리 났다요. 여수 십사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요." "왜 그랬다고 합디까?" "그건 모리것고, 암튼 구례 경찰들도 여차하면 도망갈라고 싹 준비해놓고 있답디다."
"해방이다!" 안개 너머로 해방의 함성이 물결쳤다. 그는 총알처럼 면사무소로 튀어나가 밤새 만든 인공기를 게양했다.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대중의 힘찬 함성처럼 인공기는 가을바람을 잔뜩 안고 마음껏 밝은 하늘을 휘저었다.
역시 해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10월 25일 국군 12연대와 경찰이 다시 구례읍을 장악했다. 군당에서는 세포를 통해 긴급지시로 계엄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교육 실시요령을 전달해왔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노 동무라고 자신을 밝힌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익계 장교 열여섯 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김지회를 제외한 열다섯 명의 장교는 이미 사살된 후였다. 모병을 나갔을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 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난 이현상은 눈물을 터뜨렸다. 자기의 동지들인 줄도 모르고 좌익계 장교들을 사살했던 지창수도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장교조직은 중앙당에서, 일반 사병조직은 지방당에서 관할하는 바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구례군 유격대장 박종하는 담 크고 호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일 미터 팔십이 넘는 훤칠한 키에 뛰어나게 잘생겼던 박종하는 이후 백운산지구 사령관을 지내다 이현상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현상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강 사령으로 알려진 박종하는 그가 전투를 지휘한다고 하면 아프다고 드러누웠던 사람들까지 싸우러 나가겠다며 따라나설 만큼 대단한 지장이었다.
이날의 전투로 양측 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계엄군은 다음날 반란군의 시체라며 트럭 몇 대에 시체를 실은 채 시위를 하고 다니다가 이삼 일 후 섬진강변 양정 모래밭에서 시체를 불태웠다. 그 전날 문척면 토금부락에서 동조자라고 붙잡아간 열일곱 명도 조사 한번 없이 양정 모래밭에서 총살당한 후 불태워졌다.
이 전투 때문에 구례지역은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피바다가 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지리산의 14연대 주력은 토벌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중대 단위로 각 마을을 뒤지며 좌익의 기초조직 파괴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파괴된 것은 좌익의 기초조직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삶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급적 직관으로 심정적으로 혹은 쌀 한 되로 좌익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이 좌익이라 하여 처형, 투옥당하거나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김용채가 스파이였던 것이다. 그를 따라간 마종재는 접선과정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사살되고 다행히 다른 동지들은 구사일생으로 튀었다고 했다. 곧바로 아지트로 돌아온 이들은 생활도구를 챙겨 다른 동지들과 곧장 아지트를 떴다. 몇 초 간격으로 김용채가 경찰을 데리고 아지트를 공격했다.
그는 끝끝내 평양까지 갔었다는 조용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도시락을 못 싸와 친구들 몰래 물만 마셔대는 아픔을 나누는 친구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계급투쟁을 위해 떨쳐 일어선 그들은 이제 동지였다. 함지에 생선을 이고 다니던 고기장수 어머니의 아들 조용식과 말이 양반이지 양반이라 더 배가 고팠던 유혁운은 손을 맞잡고 긴긴 겨울 밤을 지새웠다.
구례군당 선전부는 즉시 당기관지 <앞으로>의 발간에 착수했다. 그에게 등사판과 부속재료 일체가 맡겨졌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곧 다른 신문 검토에 들어갔다. <노력인민>이라는 도당 기관지 등을 세밀히 검토한 후 그들은 신문 면을 배정하고 곧 원고청탁을 시작했다. 군책에게는 ‘창간사’를, 조직책에게는 ‘유격투쟁의 방향과 투쟁지침’을, 군 인민위원장에게는 ‘인민과 주권’, 그리고 ‘적 치하의 당 활동과 인민들에 대한 당 노선 홍보를 위한 방법’ 등을 청탁했다.
순회투쟁은 3월 20일경까지 계속되었다. 악양, 청암 등을 거쳐 20일경 전북 남원군 산내면 금판정 마을에 도착한 14연대는 외부통로를 차단해놓고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김지회와 일부 간부들은 금판정의 술도가에 묵었다. 김지회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인 도갓집 주인은 그들에게 얼큰히 술을 먹인 후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산내지서에 고발했다. 그날 밤 14연대는 술도가 주인의 안내로 보초선을 피해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홍순석, 김지회 두 지휘관이 현지에서 전사하고 상당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은 지리산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산내면 전투를 두고 지리산이 시끌시끌했다. 유능한 지휘관의 손실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한두 번 전투를 해본 사람들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먹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14연대뿐만 아니라 모든 유격대의 철칙이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고, 원칙을 위배할 경우에는 아무리 뛰어난 당원일지라도 심하게는 처형이 되는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해서 당했다는 소문과 달리 군경의 매복과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순회투쟁의 마지막 무렵에 단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단 한 번의 원칙 이탈은 자신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14연대와 남한 전 유격투쟁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아직은 텅 빈 아지트를 지키며 혁운은 지리산과 달리 벌써 싱싱하게 피어오는 백운산의 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용지동 계곡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며 하루가 다르게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는 도토리나무며 떡갈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무릎을 쳤다. 아! 저게 바로 혁명이구나. 헐벗은 인민대중의 가슴을 녹음으로 뒤덮어오는 것. 어린 등짝이 휘어지게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올 때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눈물로 바라볼 때나, 느닷없이 합환주를 마셔야 했을 때나,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불어대던 스산한 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멈춰 있었다. 대신 그 가슴엔 촉촉하게 물오른 사월의 신록이 넘실대고 있었다.
게다가 강사령부대로서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령관이 목숨을 걸고 가장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데 대원들로서는 사령관 이상으로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움만 있으면 언제나 최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싸우던 박종하는 나중에는 이현상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일개 대원의 생명도 그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으로 소중히 알아야 할진대 한 부대를 지도해야 할 사령관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직무유기가 그를 하부로부터 최대의 신임을 받는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 한번 싸간 적이 없어도 점심을 굶어본 일이 없었고, 책가방은 아예 다른 아이들을 시켜서 들고 다니도록 했다. 자기 집으로는 책가방을 들고 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수업시간 외에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은 셈인데 그러고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것을 보면 타고난 머리도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단도 던지는 솜씨로 유명했던 박종하는 이미 그 시절부터 참새 잡는 솜씨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면 하루 종일 참새잡이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솜씨가 대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날마다 아이들에게 참새 잡기에 좋은 돌, 그것도 꼭 구슬만한 크기에 구슬처럼 매끄러운 것으로 스무 개씩 돌을 상납하도록 시킨 박종하는 그 돌을 신주머니 몇 개에 나눠 담아 다른 아이에게 들리고 수업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신주머니를 든 아이는 참새잡이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박종하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박종하의 돌에 깨진 동네 장독이 꽤 되었던 모양이지만 장독 주인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장독 값은 고사하고 호통 한번 치기도 어려웠다. 두 손을 허리에 탁 받치고 버텨 서서 아저씨가 봤느냐고 대드는 데는 어른이라도 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유명한 참새잡이에 동네의 원성이 자자한 것을 다 알면서도 박종하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아다준 덕에 먹게 된 참새탕에 반해서 아들을 나무라지 못했다고 한다.
박종하를 변화시킨 장본인은 곧 밝혀졌다. 바로 공산당이었다.
"언제 즈그들이 밥 한때라도 공걸로 줘봤간디. 나사 밥 묵은 죄배끼 없는디 즈그들이 어쩔 것이여. 글고 들켜봤자 겁날 것 없그마. 기왕지사 굶어죽을 목숨인디 이래 가나 저래 가나 그거이 그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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