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평생지는 것뿐이지만 나는 왜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아니 뭔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분홍빛 미래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뜨려야 하는가. 억울한 걸로 따지자면어머니보다 내가 몇 배 더했고, 우는 걸로 억울함을 풀자면 마음잡고 일 년을 울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차가운 몸이 내 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도 나도 다른 방식으로 온 밤을 울며 지새웠다. - P-1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 외에 취미생활을 가질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누구 못지않게 똑 소리 날 만큼 살림을 잘한다는 것 외에,
교문을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가지 않고 나는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데려간 적이 없어서 어머니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어머니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오천 원이라고 적힌 봉투를 내면서 나를 보았다. 이번만은 내 기를 살려주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어머니로서는 거금을 준비한 모양이지만 역시 어깨에 힘을 주기에는 너무나 적은 액수였다.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했다.
나는 문득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어머니도 공산주의자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젊은 시절 내내 총을 들고 싸웠는지도 몰랐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처럼.
나는 어머니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 미래를 빼앗아간 자가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내 부모 역시 나와 똑같이 과거와 미래를 차압당한 사람이라면, 내 분노를 어디로 쏟아 부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빨갱이였던 어머니는, 싸구려 속옷을 파는 보따리장수인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당당하고 의젓했다.
"가난뱅이 엄마가 창피했니? 너도 조금씩 나이 들면 알게 될 거야. 돈이란 건 마음대로, 일한 대로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란다. 오히려 없는 편이 떳떳한 거야. 그리고 훌륭한 사람은 언제나 없는 집에서 나오잖니?"
가난이 순간순간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어머니도 친구들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가난까지도 뛰어넘는 의지의 한국인이 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의지의 한국인이 되려면 비상한 머리와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슬로 묶이지 않은 백색의 미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아직까지 제 새끼를 찾아 헤매는 고슴도치 어미처럼 나를 천재로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고슴도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만나는 짐승들마다 물었다.
빈집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자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부렸던 모든 투정과 짜증은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슴속의 울분을 털어버릴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화살은 당연히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내 부모는 내가 알건대 누구보다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공산주의가 무작정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임을 나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 명이 같이 쓰는 일반 병실의 어머니 침대맡에는 그 흔한 주스도, 한 송이 꽃도 놓여있지 않았다.
수술실 앞에서 담배를 빼문 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봐야 했을 남편은 멀리 남도의 흰 벽 안에 갇혀 있고, 엄마를 부르며 울어야 할 딸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도 찾아와주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과거를 가진 가난한 어머니를 그 외에 누가 찾아줄 것인가.
그러던 1979년 8월 느닷없이 교도소에서 통보가 왔다. 아버지가 8.15 특사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같이 문화동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눈에 덮여 비정하도록 희던 교도소는 녹음에 묻혀 있었다. 교도소 앞 정문에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최규하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한다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분명히 암살당했을 거라며 아버지는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시끄럽겠어." "어쨌거나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모양이지. 그러고 보면 역사의 심판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정확하다구."
나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이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김일성을 독재자라고, 부자세습까지 하는 독재자라고 욕했었는데. 그래서 그 젊은 남자들은 대통령의 죽음을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던 것일까?
김재규가 대단하다는 말이 떠돌았고 박정희는 독재자이며 우리도 언니 오빠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어지러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근처 다른 학교와 합류해서 시내로 진출하자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성공한 학교는 없었다. 교문까지 나갔던 학교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말만 돌았을 뿐이었다
광주는 진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잡혀갔다. 세상에는 제법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열심히 신나는 쇼를 방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왠지 허둥거렸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몸짓은 과장되어 보였다. 뭘까? 나는 알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권력과 돈을 틀어쥐면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그때까지의 내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어지러운가? 광주 사람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것인가? 왜 누구는 공산당이 되고 누구는 공산당을 막는가?
구례여고가 아니라 전남 동부6군의 교육도시라는 순천으로 전학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농사나 짓게 되면 죽어버리겠다는 어머니의 협박과 호소 탓이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에 열중할 수 없었다.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넣어 다녔고 수업시간에는 필기도 하지 않은 채 소설책만 읽었다. 영어단어를 외고 방정식을 풀고, 그리하여 좋은 대학에 가는 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나 가난이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1948년 국군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여수 14연대가 백운산 줄기인 반내골을 지나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였다. 구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동네사람들과 의논해서 반란군에게 밥 한 끼를 해주고 고추장이며 된장 등속을 대주었다. 할아버지는 좌익도 아니었고, 동네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철수한 다음에야 기세등등하게 반내골로 들어온 국군 토벌대는 부역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를 처형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아랫동네 토금리에서는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서른 명이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고 했다.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반내골 사람들과 반내골 사람들의 가난에 대해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누구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고통과 절망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는 표지를 달고 울부짖을 때 반내골 아이들은 가난이라는 표지를 달고 나처럼 미래와 희망을 갈가리 찢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이나 부산으로 떠나든가, 남의 집 식모가 되어야 하는 애들이 태반인데 적어도 내게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미래를 한탄하고 고민할 여지라도 남아 있었다. 가난이라는 굴레는 빨갱이라는 낙인보다 더 무서웠다
범인은 바로 정부였다. 이 무모한 정책이 독재권력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자금의 필요와 몇몇 특권층의 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에게 수많은 농민의 좌절과 고통쯤은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자신들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세 식구면 꽉 차는 방에 일거리를 벌여놓고 산수유나 밤을 까며 긴 겨울밤을 이야기로 꽃피웠다.
사실 아무 밑천 없는 나로서는 대학을 졸업해봐야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찰 게 뻔했다. 부잣집 아들이라도 잡기 전에는 말이다. 당장 부모님이 구걸하다시피 빌려온 돈으로 간신히 대학엘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팔백 원짜리 커피를 마시거나 천오백 원짜리 맥주를 마시는 일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이천 원이면 돼지고기가 한 근이었고 일 년치 등록금은 부모님이 놀고먹으며 일 년을 쓸 돈과 맞먹었다. 그런 돈으로 대학을 마친 나는, 국졸인 부모와 친척을 둔 나는 적어도 호미나 낫 대신 펜을 들고 살게 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