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5ㆍ16 군사 쿠데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와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은 군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미군의 필요에 따라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 때문에 당시 군은 가장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공공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 국가 지도자들, 우리 사회에서 보다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들부터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들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공동체와 관련해 희생하고 책임을 지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애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십시오."

국가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 개인이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기여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특권이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책임이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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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평등은 매우 중요한 원칙인데 이는 선거에서 ‘일인일표一人一票’로 제도화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이나 부자나 빈자나 모두 한 표씩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 정치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지역 내의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고르게 대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유권자의 의견이 대표되어야 정치의 다원성을 회복하고 양극적인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정치는 우리 정치사에서 커다란 정치적 격변이 있기 전에 의미 있는 시그널을 보내왔다. 또한 4ㆍ19 혁명이나 6월 항쟁 모두 선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절차적 민주주의가 복원되었고 이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의 선거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누구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야 간의 권력 교체도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소극적 목표를 넘어 개방적이고 공정한 대표성의 확립, 정치적 표현과 선거운동의 자유, 비례성의 확보 등 민주적 가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 정치를 개혁해나가야 할 때다.

정당 정치의 역사를 쓰다

정당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권력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계하며 진정한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정당정치는 오늘날 포퓰리즘 위기의 대안이 된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야 정당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는 말했다. "정당이 민주주의를 만들어냈고, 근대 민주주의는 정당과 관련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영국에서는 정당정치의 실패가 결국 2016년 브렉시트로 표면화되었고 장기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2016년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인 정치학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지블랫Daniel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그 원인을 미국의 정당정치에서 찾았다.

우리 사회 속 정당 역할의 본질
정당정치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회 갈등의 관리다. 정당은 국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consensus란 절대 만장일치unanimity일 수 없다. 이 복잡한 사회가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과 협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모두의 뜻이 합치되었다 하더라도 토론과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뤄진 다원적 만장일치pluralistic unanimity의 형태다. 사회란 원래 불일치나 다양성으로 구성되며 합의는 만들어지는 것consensusーbuilding이다. 정당정치는 이처럼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과거 박정희 정부 때 국론 분열이나 총화 단결과 같은 구호 모두 이러한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회란 여러 이해관계, 다양한 생각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전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분이란 전체에서 어긋나는, 전체를 훼손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정당은 국가와 시민을 매개해야 한다
실제 우리나라의 정당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연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정당법에서는 매우 통치적인 관점에서 정당의 역할을 정의내리고 있다. 정책의 추진, 후보자 추천, 여론 형성 등 국가와 관련된 정책 및 정치적 측면을 강조한 모습이다.

당시 김종필은 민주 정권 이양 이후 강력한 정당 조직을 통해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

독일 정당법이 말하는 대로 정당이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제임스 2세 이후의 왕위 계승에 있었다.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던 토리 또한 제임스 2세가 왕자를 낳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토리와 휘그는 단합하여 1688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Mary와 남편인 오렌지 공작William of Orange을 통해 제임스 2세를 내쫓고 권리 장전을 제정해 의회 주권에 기초를 둔 입헌 왕정을 수립했는데 이것이 명예혁명이자 정당이 만들어지게 된 첫 출발점이다.

사회적 위기는 정당을 만들어낸다

이념 지형의 맨 오른쪽에는 이승만, 김성수, 김구, 중도우파 안재홍, 중도파 김규식, 중도좌파 여운형, 그리고 맨 왼쪽의 박헌영 등 극우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다양한 정치적 지형이 형성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의 기원을 1955년 민주당에서 찾고 있으며 2015년에는 60주년 행사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만큼 매우 보수적인 정당이었다.

실제로 민주당이 결성될 때 조봉암은 자신도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거부당했다. 좌익 전향자는 신당 발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조직 요강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봉암은 독자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지만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해산되고 만다. 제2공화국에서 신파 중심의 민주당과 구파가 탈당해 만든 신민당이라는 보수 양당 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5ㆍ16 군사 쿠데타의 발발로 이 또한 무산되고 만다.

공화당을 둘러싼 논란과 ‘김종필 플랜’
공화당은 우리나라 정당 조직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정당으로, 앞서 설명했듯이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김종필의 주도 아래 2년 반의 군정 기간 중앙정보부에서 비밀리에 창당한 정당이다.

이는 군부의 장기 집권 계획의 일환으로 결성된 것으로, 군정 종식 후 민정으로의 이양 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민주화 직후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거세게 터져 나온 지역주의의 원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깊다. 신군부에 의해 가혹한 억압을 받은 광주 시민, 그리고 호남 유권자들에게 당시 그것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고통을 겪은 김대중은 지역 주민이 갖고 있는 아픔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민주화와 함께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지역주의에 다른 지역 역시 유사한 형태로 반응하면서 지역주의 정당정치가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요인 이외에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은밀히 지역감정을 의도적으로 부추긴 측면도 있다.

본격적인 진보 세력의 출현은 2002년 이후에 이뤄지지만 ‘보수 대통합’을 주창한 3당 합당에 대해 민주당의 진보성이 가해지면서 한국 정당정치에서 정책적 차이나 이념적 차별성이 나타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정치 개혁은정당에서부터 시작된다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이 모여 민주당을 만들고, 이는 평민당과 합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만들어진다. 새정치국민회의 이후로는 이름만 바뀔 뿐 그 계보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새천년민주당 또한 열린우리당에서 다시 민주당으로 왔고 이후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진다.

진보 정당인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나, 여기에서 민중 민주 성향을 가진 노회찬, 심상정 등의 의원들이 탈당하며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이후 다시 통합진보당의 출범으로 합쳐져 오늘날 정의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적 맥락의 보수와 진보
오늘날의 이념적인 형태의 정당 구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당은 열린우리당이다. 이때부터 한국 정치에서 보수 일변도라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념적 차별성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에서와 같은 이념적 차별성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적 맥락에서의 보수와 진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은 국민 참여 경선이라는 새로운 후보 선정 방식에 의해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노무현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당내 일부 의원들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하여 후보직을 정몽준에게 양보하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당선 후에도 대북 송금 특검과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새천년민주당 내 친親 김대중계 의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의원 등 친노 신당파 주도로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등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의원 5명과 유시민, 김원웅 등 개혁국민정당 의원 47명은 2003년 11월 11일 정치 개혁을 표명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새천년민주당과 갈라선다.

이념이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2002년 노무현의 등장, 그리고 특히 2004년 열린우리당의 성공과 관련이 깊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도 열린우리당을 통해 ‘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진보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의원들 모두 편의점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들에게 본사의 이익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 가게만 잘 된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다.

민주화, 일상에서 촛불을 만나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이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민주화 운동의 성취로 우리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제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사회의 역할을 찾을 때다.

일본은 우리나라 다음의 22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평균 3.32로 권위주의 국가군에서 속하며 167개국 중 130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수년째 167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변함없이 북한이다. 북한은 평균 1.08로 꼴찌인데 선거 절차와 다원성, 시민적 자유에서는 0점을 받았다. 북한보다 순위가 하나 위인 166위는 독재자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지배하는 시리아였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정체성으로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 국가, 또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가치는 그 자체로 절대 모순될 수 없다.

반공의 목적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 공산주의에 반대하느냐 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목적은 자유민주주의가 되고, 수단은 반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후에 전개됐던 한국 정치는 반공을 목적으로 삼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는 이처럼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저항의 역사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는 대부분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나 질서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4ㆍ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의 사건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이제는 시골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라님’이라도 법을 지키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낯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4ㆍ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 점차 내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다른 정권과 달리 제5공화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정의내리기 어렵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당시 대다수 국민은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총칼로 유신을 연장했다. 여러 정치학자들이 제5공화국을 "잉여剩餘 군사정권"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 "유신 체제의 아류"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6ㆍ29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야는 합의하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기로 했다. 또한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지지세 확대와 정통성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재야 정치 세력을 편입시키고자 애썼다. 예컨대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 출신으로 1985년 민주당에 입당했고, 노무현은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출신으로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김문수는 서노련 지도위원 출신으로 1994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이재오 또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4년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젊은 피 수혈’이라는 명분하에 당시 386세대 학생운동권 출신을 영입했다. 송영길,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오영식 의원 등이 이때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두 번째 권력 공유는 이른바 DJP 연합에 의해 이뤄진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과 김종필은 공동 정부 구성을 합의하고, 당선 후 총리직을 비롯해 거의 절반의 내각 각료직을 자민련에 배당하기로 한다. 실제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김종필은 국무총리가 되었고 자민련은 장관직의 절반을 차지했다.

촛불집회가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의 취약함으로 보여주었는데, 국민의 대표자라는 국회의원들까지 의회 정치를 버리고 거리로 나간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지 거리까지 나와서 일반인들처럼 문제를 제기해야 할 입장은 아니다.

과거 급속한 경제 발전이 놀랄 만큼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재자 박정희와 경제 건설자 박정희가 같이 만났기 때문이다. 독재라는 것과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오늘날에는 결코 적용할 수도, 효과를 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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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첫 책모으기

뿌듯하다. 포인트, 적립금, 쿠폰 긁어모아 알라*, 교*, 네 에서 구입.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6권
˝지중해, 펠리페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4권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총 11권을 사 모았다. 꽃아둘데가 없다.
만들어보자. 페르낭님의 나머지 책도 모으자.

지중해의 기억 절판이랍니다 ㅠ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에서 노마드가 독서모임에 가입하려한다. 즐겨읽는 분야가 뭐냐고 묻자 자기개발서라 답한다. 바로 퇴짜를 맏고 그럴싸한 책을 읽는데 그게 바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펠리페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다

이 책을 지금 당장 읽겠다는게 아니다.
읽고싶지만 이게 보통 고된작업이 아닐듯 싶다.

나는 아직 독서 중독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물질문명~~~글자도 작고 줄간격 좁고 되게 촘촘하다. 지중해~~~얘는 그래도 좀 낫다. 줄간격 좀 넓고, 활자도 물질보다 훨 눈에 잘 들어온다.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교육자로 파리의 중등학교, 브라질의 상파울루대학 등에서 강의하였고 《아날(年報) Annales》지의 편집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15~18세기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가 있다.

출생-사망 1902.8.24 ~ 1985.11.28

나무위키
https://naver.me/GGhpjYp0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출생 - 사망 1906.10.14. ~ 1975.12.4.

“생각하는 일은 (…)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나무위키
https://naver.me/GaLmBW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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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3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정님 안녕하세요?^^

열독하시는데 질문드려서 귀찮으실지도....
페르낭 브로델과 나란히 Horden and Purcell의 책 [The corrupting Sea]를 설명하는 글을 읽던 차인데 갑자기 대장정님이 생각났어요.
혹시라도 ˝지중해~~˝ 걔에서 ㅎㅎ(대장정님 표현 따라) 이 책이 언급되면 알려주시겠어요?^^ 찾아서라도 꼭 봐야할 부분이 있어서 ...

혹시나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대장정 2024-01-04 00:05   좋아요 2 | URL
네, 얄라님, 언제 읽게될지 모르겠지만서두 읽다가 찾게되면 말씀드릴께요~~

bookholic 2024-01-04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척 어려워 보이는 책들입니다.
저는 대장정님의 써주실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

대장정 2024-01-04 08:17   좋아요 1 | URL
저도 읽기보담 구매욕 때문에 😂 장만했습니다. 소장용ㅎㅎ 올해도 벌써 4일째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의 좌파 혹은 노동자 정당, 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진보당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4ㆍ19 혁명 이후 선거에서 민주당에 맞서는 주요한 경쟁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몰락했고 다른 혁신계 정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75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1당 지배 체제가 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전 국민적인 규모로 커진다. 4월 25일에는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서울대학교 당시 문리대 교수회관에서 성명을 내고 시위를 한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린다. 한 달 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거로 정권의 정당성을 얻다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주축이 된 5ㆍ16 군사 쿠데타는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후 군사혁명위원회, 그리고 얼마 뒤 이름을 바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정당 및 사회단체는 모두 해산되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 이슈는 사상 논쟁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이후인 1948년 11월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선거 유세 막판에 폭로한다.

박정희와 윤보선에 대한 지지는 도시와 시골에서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30.2퍼센트를 얻은 반면 윤보선은 65.1퍼센트를 얻었다. 이에 비해 전남과 경북에서는 박정희가 57.2퍼센트, 55.6퍼센트를 얻었고, 윤보선은 각각 35.9퍼센트, 36.1퍼센트를 얻었다. 제1공화국 때도 나타났던 시골에서는 여당, 도시에서는 야당이라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났다.

이전 투표에서와 달리 여촌야도 현상도 사라져,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30.2퍼센트였던 것이 45.2퍼센트로, 부산에서의 지지율도 48.2퍼센트에서 64.2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광주, 전주, 수원을 제외한 전 도청 소재지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뒀다.

박정희 그리고 젊은 김대중의 등장
3선 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째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 이전 두 차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의 경쟁자는 윤보선이었지만,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야당인 신민당 내에서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40대의 젊은 정치인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면서 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뒤이어 같은 40대인 이철승과 김대중도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신민당이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훌쩍 넘는 것이어서 1967년과 같은 날치기에 의한 정권 연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은 전태일 분신,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폭동,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사법파동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정희 체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변경되었는데 우선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을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지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득표율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야당인 신민당은 32.8퍼센트로 공화당의 득표율 31.7퍼센트를 앞섰다.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득표율에서도 여당에 앞서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 소규모 야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퍼센트와 합치면 여당의 패배는 더욱더 자명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김영삼은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당선된다. 유신 체제에 도전하는 반체제 정당으로 신민당이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정국은 소용돌이치면서 유신의 종말을 향해 나가게 된다.

의원직 제명 당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발언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다.

결국 1987년 6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를 받아들인 6ㆍ29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6ㆍ29 선언과 민주화로 이끈 매우 중요한 출발점은 1985년의 총선거였다.

한나라당은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 째로 받은 이른바 ‘차떼기’ 수법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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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폭력과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같은 왕국에서는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세습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권력 위임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진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지 않고 권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거다. 이는 민주주의가 낳은 매우 훌륭한 정치제도다.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는 항상 선거 정치가 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은 모두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두 군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전두환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경제 성장에 대한 성과,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광주 시민에 대한 학살을 떠올린다는 차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쿠데타 이후 대통령직에 어떻게 올랐느냐의 차이가 크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갖게 된 정치적 정당성에는 차이가 컸다. 이처럼 심지어 권위주의 통치자들에게까지도 국민적인 동의를 얻는 절차를 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정책 집행의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정에서 반관선半官選 반민선半民選의 준準 대의기구를 구성해 선거법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완전한 대의기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에 의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성이나 자주성을 갖는 입법기구는 아니었다.

당시 투표율은 95.5퍼센트였다. 오늘날까지 포함해서 가장 높은 투표율이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표 참여를 사실상 강요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사실 김구가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했다면 제헌국회 내에서의 헌법 제정이나 반민족특별위원회 등 제헌국회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크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치인은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구 선생이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직선제를 포함한 발췌 개헌에 성공하며 이승만은 한 달 후 1952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75.2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다. 직선제 개헌 후 한 달 만에 치러진 선거였던 만큼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선거를 준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맞설 수 있었던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되고 말았기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 조봉암이 11.4퍼센트, 이시영이 10.9퍼센트를 각각 얻었다. 2, 3위 후보자의 득표율을 볼 때 이승만의 손쉬운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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