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의 좌파 혹은 노동자 정당, 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진보당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4ㆍ19 혁명 이후 선거에서 민주당에 맞서는 주요한 경쟁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몰락했고 다른 혁신계 정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75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1당 지배 체제가 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전 국민적인 규모로 커진다. 4월 25일에는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서울대학교 당시 문리대 교수회관에서 성명을 내고 시위를 한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린다. 한 달 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거로 정권의 정당성을 얻다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주축이 된 5ㆍ16 군사 쿠데타는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후 군사혁명위원회, 그리고 얼마 뒤 이름을 바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정당 및 사회단체는 모두 해산되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 이슈는 사상 논쟁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이후인 1948년 11월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선거 유세 막판에 폭로한다.
박정희와 윤보선에 대한 지지는 도시와 시골에서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30.2퍼센트를 얻은 반면 윤보선은 65.1퍼센트를 얻었다. 이에 비해 전남과 경북에서는 박정희가 57.2퍼센트, 55.6퍼센트를 얻었고, 윤보선은 각각 35.9퍼센트, 36.1퍼센트를 얻었다. 제1공화국 때도 나타났던 시골에서는 여당, 도시에서는 야당이라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났다.
이전 투표에서와 달리 여촌야도 현상도 사라져,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30.2퍼센트였던 것이 45.2퍼센트로, 부산에서의 지지율도 48.2퍼센트에서 64.2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광주, 전주, 수원을 제외한 전 도청 소재지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뒀다.
박정희 그리고 젊은 김대중의 등장 3선 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째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 이전 두 차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의 경쟁자는 윤보선이었지만,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야당인 신민당 내에서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40대의 젊은 정치인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면서 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뒤이어 같은 40대인 이철승과 김대중도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신민당이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훌쩍 넘는 것이어서 1967년과 같은 날치기에 의한 정권 연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은 전태일 분신,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폭동,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사법파동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정희 체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변경되었는데 우선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을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지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득표율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야당인 신민당은 32.8퍼센트로 공화당의 득표율 31.7퍼센트를 앞섰다.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득표율에서도 여당에 앞서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 소규모 야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퍼센트와 합치면 여당의 패배는 더욱더 자명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김영삼은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당선된다. 유신 체제에 도전하는 반체제 정당으로 신민당이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정국은 소용돌이치면서 유신의 종말을 향해 나가게 된다.
의원직 제명 당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발언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다.
결국 1987년 6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를 받아들인 6ㆍ29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6ㆍ29 선언과 민주화로 이끈 매우 중요한 출발점은 1985년의 총선거였다.
한나라당은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 째로 받은 이른바 ‘차떼기’ 수법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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