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폭력과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같은 왕국에서는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세습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권력 위임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진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지 않고 권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거다. 이는 민주주의가 낳은 매우 훌륭한 정치제도다.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는 항상 선거 정치가 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은 모두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두 군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전두환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경제 성장에 대한 성과,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광주 시민에 대한 학살을 떠올린다는 차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쿠데타 이후 대통령직에 어떻게 올랐느냐의 차이가 크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갖게 된 정치적 정당성에는 차이가 컸다. 이처럼 심지어 권위주의 통치자들에게까지도 국민적인 동의를 얻는 절차를 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정책 집행의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정에서 반관선半官選 반민선半民選의 준準 대의기구를 구성해 선거법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완전한 대의기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에 의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성이나 자주성을 갖는 입법기구는 아니었다.
당시 투표율은 95.5퍼센트였다. 오늘날까지 포함해서 가장 높은 투표율이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표 참여를 사실상 강요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사실 김구가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했다면 제헌국회 내에서의 헌법 제정이나 반민족특별위원회 등 제헌국회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크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치인은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구 선생이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직선제를 포함한 발췌 개헌에 성공하며 이승만은 한 달 후 1952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75.2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다. 직선제 개헌 후 한 달 만에 치러진 선거였던 만큼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선거를 준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맞설 수 있었던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되고 말았기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 조봉암이 11.4퍼센트, 이시영이 10.9퍼센트를 각각 얻었다. 2, 3위 후보자의 득표율을 볼 때 이승만의 손쉬운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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