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망가진다는 말은 역겹지만 실제로 이렇게쇼조를 눈앞에서 보니 수긍되는 부분이 있었다. 노쇠하다는 건 성숙이 아니라 고장나고 풍화되어가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늙음이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쌓은 덕의 차이일까, 경제적격차 때문인가 아니면 전생이 얽혀 있나.

2005년 현재, 치매를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아직해명되지 않았다. 알츠하이머형의 치매는 뇌에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축적되어 정상적인 뇌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라지만, 베타 아밀로이드가 왜 축적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애초부터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너무 커서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치매에 걸리느냐 걸리지 않느냐는 홀짝도박 같은 측면이 있어서 겐타로와 시즈카도 예외가아니다.

"그렇지.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걸 발견했을 때괜히 이해하는 척하지 말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심하게 야단을 쳐야 해. 도둑질한 그 자리에서 혼을 내야 효과도 있어. 만약 쇼조씨눈에 띄지 않았다면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래서 쇼조 씨를 도우려고……….."
"나 대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야단쳐 주었어. 은의를 생각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실례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옛날부터 어디에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몰상식한 남자야.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순식간에 구니히코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몰상식하면 네놈은 뭐냐. 듣자 하니 연금지급일인 매달 15일에 쇼조 씨 대리인으로 우체국에 간다고 들었다. 아버지 돈을 슬쩍하고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쪽이 훨씬 염치가 없지 않냐."

갑자기 구니히코 부부의 표정이 환해졌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결국 겐타로가 원하는 대로 억지로개조하는 것이지만, 철저히 비난받고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앞선 조건보다 한발 물러난 조건이 마찬가지로 그다지 좋지 않아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상투적인 사기수법이다.

사람 수만큼 행복이 있고 가정 수만큼 불행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인생의 종착역이 슬슬 눈앞에 나타나면 아무래도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자문하게 된다.

"좀 더 원만하게 썼으면 좋을 것을. 꿩도 울지 않으면 총을 맞지 않는다는 속담도 모르나."
*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면 재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

"요즘 아스팔트는 크게 나눠서 보수성, 배수성性, 투수성 이렇게 세 종류가 있어. 즉 물이 고이는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나뉘지. 보수성은 1제곱미터당 5리터의 물을 표층 내에 모을수 있어. 배수성은 알이 굵은 아스팔트로 경사를 만들어 물을 그대로 도랑으로 흘러보내지. 물이 고이기 어려우니까 비가 와도 걷기 쉽다는 이점이 있어.
투수성은 땅속까지 직접 빗물이 스며들게 하니까 배수수단이 필요없어. 보게나, 빗물이노상까지 스며들었으니 꽤 젖어 있지 않은가."
겐타로 말대로 아스팔트를 벗긴 노상 부분은 많은물을 빨아들여 진흙처럼 되어 있다. 요 며칠 밀어닥친 한파의 영향으로 아스팔트 바로 아래는 서리가내린 듯 하얗다.

마을을 만드는 것도 부수는 것도 같은 사람이 한다는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

그의 발언은 대체로 옳다. 소년 범죄는 그 잔혹성에 주목하는 편이라 빈발하는 듯 보이지만요수십년 검거 수는 감소하고 있다. 역시 고령자 검거 수가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특필해야 한다. 게다가 이런 범죄는 가정과 병원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개인의 성품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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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는 늙는 것, 약해지는 것을 악덕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을까. 예전이라면 나이를 먹는다는건 성숙의 증거이고 약해지는 건 비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근래 10년 동안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약육강식도 아니고 이제 경제력과 지위라는 뒷배가 없으면 안심하고 나이를 먹지도 병에 걸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서장이 면목 없다는 듯 변명하지만 그런 사정을 시즈카도 모르지 않는다. 지쿠사 경찰서뿐만 아니라 어느 교도소,
유치장도 노인으로 한가득이다. 가벼운 죄부터 무거운 죄까지 모조리 노인이 차지하고 있다. 현역 판사 시절, 그리고 퇴직 후에도 몇 번인가 수용 시설을 시찰했지만 방문할 때마다 노인 죄수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자주 한탄했다.
이런 노인 죄수는 교도소 바깥세상보다 담장 안이 살기 편하기 때문에 갱생하기 어렵다. 출소해도 바로 또 죄를 짓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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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건 대부분 울적한 것이야."
유감스럽지만 시즈카도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선은 어렵고 악은 쉽다 판사로 일했던 40년 세월 동안 뼈저리게느꼈다. 정의를 따르는 데는 귀찮은 수속과 각오가 필요한데 악행을 하는 데는 아무런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한순간 양심에 뚜껑을 닫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람의 마음도 제도도 마찬가지다.

하여튼 사람은 계급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자기 아래에 다른 사람을 놓고 싶어 한다. 수입의 많고 적음도 사회적 지위와도 관계없는, 어쩌면 사람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통역하면 세계화, 지구 규모화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가로막던 구조와 법률이 철폐되고사람 · 물건 · 돈이 국경을 넘어 찾아오는데 이는 꿈도 미래 이야기도 아닌 2005년 현재 시작된 일입니다. 쉽게 말해외국 기업체가 일본 시장에 진출하거나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난 것 등입니다. 장벽이 없어지면 균일화가 진행되어나라와 지역마다 격차가 없어지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당연히 단점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싼 노동력이 흘러들어오기때문에 젊은 층의 취업 사정이 악화하는 것입니다. 한편 고령자 쪽은 연금 제도가 파탄 나지 않는 한, 현역 때 벌었던 금액 이상의 연금을 받기 때문에 가장 유복한 세대가 되리라고 예상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든 악당은 돈이 많은 곳을 노리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한 군데에 봉을 모아놓고 고사카이가 열변을 토한다. 우스이의 증언을 생각하면 추임새를 넣거나 회장을들뜨게 만드는 바람잡이도 섞여 있었겠지. 요컨대 영감 상법"을 응용한 것인데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노인이 앞다퉈 먹이에 달려든다.
* 상품이나 서비스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속이고 파는 상술.

사기죄 구성 요건은 기망→착오→교부(처분) 행위→재산의 이동이라는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안건의 경우,우선 문제는 기망에서 착오의 단계로, 투자 어드바이저인 고사카이의 기망을 증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틀림없이 고사카이도 사기 그룹의 한 사람이겠지만 ‘시니어 서포트 주식회사 상장 준비실‘에서 설명을 의뢰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면 입증은 어렵다. 게다가 업적 악화와 분식결산 사이의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어서 기업이사기 행위를 저질렀다고 입증하기 힘들다. 모두에게 보여준 자료는 ‘시니어 서포트‘ 측에서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고사카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다.

속은 쪽에도 책임이 있다.
남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마라.
물론 그것도 사고방식의 하나이지만 시즈카는 이에 완전히 동의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왜냐하면 그건 법의정신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헌법은 인권을 인정하고 법률이 그 확대를 억제한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있다.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를,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그리고 강자보다 약자를 돕는다.

법이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에 나는 여자면서 판사를 목표로 했다. 여성의 위치가 지금만큼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였기에 더욱 그랬다. 판사 임명을 받았을 때도 정당함보다 상냥함을 우선으로 하는 재판관이 되자고 결심했다. 엄격하고 준엄하더라도 마음속에 확실한 조리만 있으면 상냥함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노인이 울고 있다. 불합리와 악랄과 기댈 곳이 없음에 분노해 비관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어떻게 법조계에 몸을 담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빠른 사람이 임자라든가, 투자가인 당신들에게만이라든가, 요컨대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다른 사람이 어떻든 자신만 이익을 보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꼬임에 빠지는 거야. 본래 몇백 만,
몇천 만 엔이라는 돈은 말라서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야. 그걸 그저 자고 일어난 것만으로 손에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시점에서 나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재판관 자리에서 본 경험과 비교해 보면 사기 피해자는 대개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사기꾼에게 그런 사람만큼 알맞은 사냥감은 없다. ‘묘하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쉽다‘라고 사기 상습범에게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타인보다 현명하니까 자신은 그들보다 대접을 더 받아야 한다. 그래서 뜻밖의 행운도 선민의식도 당연하다 옆에서 보면 웃음이 나오는 이론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존재 의식이 된다.

"그렇지만, 겐타로 씨. 그것도 역시 강자의 논리예요. 궁지에 빠진 쥐도 고양이를 물어요. 학대당한 사람, 궁지에몰린 사람이 역습하는 것은 본능일지도 몰라요. 천성까지 법률로 판가름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일리 있는 말이군. 하지만 시즈카 씨. 전에 어느 법률가에게 들었는데, 재판은 범죄 행위를 판가름하는 것이지 죄를 저지른 사람의 마음을 판가름하는 건 아니라더군."
"맞아요. 법률은 사람 마음을 제어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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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또 율곡 이이에게는 매월당 김시습 전기를 지어오라고 명하기도했다. 그래서 영·정조 시대 문인들은 선조의 치세를 일컬어 그의 능이름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송했다.  풀이하자면 선조대왕 문예부흥기라는 뜻으로 명문이 나오면 ‘목릉성세에도 이런 문장은 없었다‘라며 칭송하곤 했다. - P279

동의보감의 편찬 원칙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을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 P279

책이 완성되어 광해군에게 바치자 광해군은 출판을 서두르게 하여광해군 5년(1613) 에 개주 갑인자(甲) 목활자로 출간되었다. 이때 허준의 나이 76세였다. 내의원에서 펴낸 『동의보감』 초간본 중 보존상태가 좋은 3종(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서울대 규장각소장본)은 국보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 P281

이 책을 완성한 뒤 허준은 칠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끊임없이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의서를 펴냈다. 그것이 온역(疫, 급성 전염병으로티푸스로 추정된다고 함)에 대한 대책을 내놓은 신찬 벽온방과 성홍열에대한 처방책인 『역신방(辟疫神方)』이다.  그리고 1615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동의보감」이 완성되고 5년 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광해군은 그에게 보국숭록대부라는 칭호를 내렸다. - P281

허준의 묘는 임진강을 굽어보는 파주 진동면에 자리 잡았다. 민통선가까이 있어 오랫동안 방치되던 것을 군 당국 협조로 새 단장을 했고1992년 경기도기념물로 지정했다. - P281

고양군, 오늘날 서울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 경계에 있는 이 산이 망우산(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묫자리 (동구릉의 건원릉)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언덕에 올라 이제 나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 P286

그러나 이에 대한 전거를 보면 비슷하지만 상황 설명이 약간 다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9년(1683)  3월 25일 기사에 태조의 존호를 올리는대신들의 논의 중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태조께서는 자손들이 뒤따라 장사 지낼 곳이 20개소에 이를 정도로 많게 된다면 내가 이제부터 근심을 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곳(동구릉)의 가장 서쪽 한 가닥의 산봉우리를 이름하여 망우리(忘憂里)라  하였습니다. - P286

종친 1품은 사방 10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문무관 1 품은 사방 90보, 문무관 2품은 사방 80보, 문무관 3품은 사방 70보, 문무관4품은 사방 60보, 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 - P291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陋室銘)」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有龍則靈 - P295

1. 불굴의 애국지사 묘역: 한용운 · 오세창 · 방정환 등
2. 찬란한 문학 위인 묘역 : 계용묵 · 김말봉 · 박인환 등
3. 생생한 역사 위인 묘역: 장덕수 · 조봉암 · 지석영 등
4. 감동의 예술 위인 묘역 : 이중섭,이인성 · 권진규·차중락 등 - P301

10월 12일 이화학당은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런데 1935년에 이태원공동묘지 전체가 망우리로 이장할 때 무연고 묘로 분류되면서 여기에합장된 것이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때 순국했고 유관순 열사의 후손이 있을 수 없어 무연고 묘가 되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넋을 우리가 이렇게밖에 기릴 수 없게 되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P304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1962년에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9년에는 1등 서훈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추서되었으며 중랑구에서 매년 기일인 9월 28일에 추모식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 P304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 그리고수많은 은지화(紙)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원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 P311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P317

겨울밤에 오는 눈은 어머님 소식
혼자 누운 들창이 바삭 바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 납니다 - P341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웃지요.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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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은 이 성북천의 푸근하면서도 호젓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집들이 철거되었다. 그중 하나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68)의 집이다.  조지훈의 당호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다.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어디에 가 있든지 아랑곳할 것이 없이 "(방우산장기1953) 내 집으로 삼는다고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성북동길 역사산책로를 조성하면서 조지훈의 집터에 ‘시인의 방 방우산장‘이라는 설치물을 세웠다. - P126

만해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그 위에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심우란 진리 또는 자기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것을 동자가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한 데서 나온것이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써준 ‘심우장‘ 현판은 따로 있고 여기 걸린현판 글씨는 당대 초서의 대가로 꼽힌일창 유치웅의 작품이다. 일창 선생 또한 성북동에 사신 분이다. - P140

만해 선생이 심우장을 지은 것은 54세 때인 1933년이고 여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은 해방 직전인 1944년이었으니 생애 후반 마지막 11년을여기서 보내신 것이다. - P140

「무제5」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물이 흐르기로 두만강이 마를 건가
뫼가 솟앗기로 백두산이 무너지랴
그 사이 오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 P144

이산(山) 김광섭(金光燮, 1905~77)은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문명의 괴리 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1960년대 후반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 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쓴 시라고한다. 북정마을에 와서 읽으면 이 시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 없다. - P147

선릉 
선릉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과 왕비인 정현왕후의 능으로 두 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긴 박석 길(참도)이 뻗어 있고 여기서 성종의 능침과 정현왕후의 능침으로 갈라진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오른쪽 숲 너머 언덕에 있다. - P153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마침내 보우는 주먹에 맞아죽었다.
- P213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 P213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지금의 선불당은 1941년에 지은 것이고 옛날에는자그마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선불당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추사 김정희가 바로 이 건물 남쪽 벽에 딸려 있는 목조 가건물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냈기 때문이다. - P223

김약술의 추방현기 발견 과정
추사 김정희는 1856년, 나이 71세로 타계하는 바로 그해에 봉은사에머물면서 선불당자리에 기거하고 있었다. 봉은사에서의 추사 모습은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이 쓴 「추사방현기(秋史記)」에  아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 P223

봄바람 같은 아량은 만물을 능히 포용하고
가을 물 같은 문장 티끌에도 물들잖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 P227

법정 스님의 ‘무소유‘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 P232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이어서 관아재는 겸재 정선의 예술적 역량과 성취는 중국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지칭되는 송나라 미(米),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거의필적할 만하다며  이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는 경지라고까지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겸재를 화성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 P249

내 시와 자네 그럼 서로 바꿔 봄세
경중을 어이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에서 나오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我詩君畫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畫揮手
不知誰易更誰難 - P257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산봉우리들 희미하게 나타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 P260

曙色浮江漢
觚稜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 - P260

진경문화체험실에 가면 관람객들이 관심 가는 대로 버튼을 누르면서빠짐없이 눌러보는 것이 ‘압구정‘이다. 동호대교 건너 고급 아파트의 상징인 현대아파트가 있는 곳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옛날 압구정동의 풍광이 이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에 금석지감을 느끼곤 한다. - P263

산중에 폐호(戶)하고 한가히 앉아 있어
만권서(萬卷)로 생애(生涯)하니 즐거움이 그지없다
행여나 날 볼 임 오셔든 날 없다고 사뢰라 - P267

구암 허준의 의관 시절
허준은 중종 32년(1537)에 태어나 호를 구암(龜巖) 이라고 했다. 허준의 할아버지(허곤)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우수사(정3품)에 이르렀고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군수종4품)을 지냈다. 허준은 이런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서자였다. - P277

그런 허준이 어떤 경로로 의학의 길로 들어섰고 서출이라는 신분적제약을 넘어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이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의림촬요(醫林撮要)"의  ‘본국 명의‘ 편에 나오는 짧은 증언밖에 없다. - P277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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