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은 이 성북천의 푸근하면서도 호젓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집들이 철거되었다. 그중 하나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68)의 집이다.  조지훈의 당호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다.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어디에 가 있든지 아랑곳할 것이 없이 "(방우산장기1953) 내 집으로 삼는다고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성북동길 역사산책로를 조성하면서 조지훈의 집터에 ‘시인의 방 방우산장‘이라는 설치물을 세웠다. - P126

만해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그 위에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심우란 진리 또는 자기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것을 동자가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한 데서 나온것이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써준 ‘심우장‘ 현판은 따로 있고 여기 걸린현판 글씨는 당대 초서의 대가로 꼽힌일창 유치웅의 작품이다. 일창 선생 또한 성북동에 사신 분이다. - P140

만해 선생이 심우장을 지은 것은 54세 때인 1933년이고 여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은 해방 직전인 1944년이었으니 생애 후반 마지막 11년을여기서 보내신 것이다. - P140

「무제5」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물이 흐르기로 두만강이 마를 건가
뫼가 솟앗기로 백두산이 무너지랴
그 사이 오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 P144

이산(山) 김광섭(金光燮, 1905~77)은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문명의 괴리 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1960년대 후반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 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쓴 시라고한다. 북정마을에 와서 읽으면 이 시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 없다. - P147

선릉 
선릉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과 왕비인 정현왕후의 능으로 두 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긴 박석 길(참도)이 뻗어 있고 여기서 성종의 능침과 정현왕후의 능침으로 갈라진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오른쪽 숲 너머 언덕에 있다. - P153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마침내 보우는 주먹에 맞아죽었다.
- P213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 P213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지금의 선불당은 1941년에 지은 것이고 옛날에는자그마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선불당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추사 김정희가 바로 이 건물 남쪽 벽에 딸려 있는 목조 가건물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냈기 때문이다. - P223

김약술의 추방현기 발견 과정
추사 김정희는 1856년, 나이 71세로 타계하는 바로 그해에 봉은사에머물면서 선불당자리에 기거하고 있었다. 봉은사에서의 추사 모습은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이 쓴 「추사방현기(秋史記)」에  아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 P223

봄바람 같은 아량은 만물을 능히 포용하고
가을 물 같은 문장 티끌에도 물들잖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 P227

법정 스님의 ‘무소유‘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 P232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이어서 관아재는 겸재 정선의 예술적 역량과 성취는 중국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지칭되는 송나라 미(米),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거의필적할 만하다며  이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는 경지라고까지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겸재를 화성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 P249

내 시와 자네 그럼 서로 바꿔 봄세
경중을 어이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에서 나오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我詩君畫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畫揮手
不知誰易更誰難 - P257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산봉우리들 희미하게 나타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 P260

曙色浮江漢
觚稜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 - P260

진경문화체험실에 가면 관람객들이 관심 가는 대로 버튼을 누르면서빠짐없이 눌러보는 것이 ‘압구정‘이다. 동호대교 건너 고급 아파트의 상징인 현대아파트가 있는 곳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옛날 압구정동의 풍광이 이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에 금석지감을 느끼곤 한다. - P263

산중에 폐호(戶)하고 한가히 앉아 있어
만권서(萬卷)로 생애(生涯)하니 즐거움이 그지없다
행여나 날 볼 임 오셔든 날 없다고 사뢰라 - P267

구암 허준의 의관 시절
허준은 중종 32년(1537)에 태어나 호를 구암(龜巖) 이라고 했다. 허준의 할아버지(허곤)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우수사(정3품)에 이르렀고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군수종4품)을 지냈다. 허준은 이런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서자였다. - P277

그런 허준이 어떤 경로로 의학의 길로 들어섰고 서출이라는 신분적제약을 넘어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이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의림촬요(醫林撮要)"의  ‘본국 명의‘ 편에 나오는 짧은 증언밖에 없다. - P277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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