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김부식『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15년 p.127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사 2022-09-16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가 용산으로 옮긴 무언가가 생각나네요
 

종묘제례의 소임을 맡은 제관들은 제사 7일 전, 의정부에 모여 제례의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를 재계라 한다. 그날부터 4일간은 산재(散), 3일간은 치재(齋)를 행하는데, 산재 기간에 왕과 백관들은 집무를 보지만 형벌과 관계된 문서는 처리하지 않는다. 귀로는 음란한 말이나 저속한 음악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입으로는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 파 등 매운 음식을 먹지 않으며, 문상이나 병문안을 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 P84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 P91

내가 종묘 답사는 늦가을 토요일 오후나 눈 내린 겨울 아침에 자유 관람으로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 길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P92

국가 의례를 행할 때 사용했다. 따라서 새로 지은 창덕궁은 별궁(別宮)이아니라 또 하나의 정궁(正宮)이 되어 양궐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이를 역사적으로 ‘법궁이궁(離宮) 양궐체제‘라고 했다. 왕조로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별도의 궁궐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양궐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 P99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과 왕의 직계존속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왕의 아버지,생존해 있는 왕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왕의 비빈 등이 포함됐다. 그때문에 계속 궁궐 규모를 확장하거나 별궁을 지어야 했다. 그로 인해 창경궁이 생겼다. - P99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 P101

내가 태조께서 개창하신 뜻을 알고, 또 풍수지리의 설이라는 것에괴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술자(術者)가 ‘경복궁은 음양의형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은 이상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무인년(1398) 집안의 일(제1차 왕자의 난)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 P103

일제는 왕가의 전통을 지우기 위하여 창경궁을 동궐에서 분리하여 동물원·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이라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만강조하여 관리소 이름을 비원청(秘苑廳)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두 궁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라는 이름 대신 오랫동안 창경원, 비원이라고 불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창덕궁,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국민학교 때는 창경원과 비원으로 소풍을 갔다. - P105

돈화문 앞 월대가 땅에 묻히게 된 것은 1907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 마련한 캐딜락 자동차가 내전까지 들어올 수있도록 월대를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1932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질러 원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돈화문 앞으로내면서 광장으로서 월대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미국 제너럴모터스사에서 제작한 순종황제의 어차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P108

나무를 비벼 새 불씨를 만드는 것을 일러 찬수(遂)라 했다. 이때 쓰는 나무의 종류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이를테면 봄에는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 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 P116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 P116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像 - P127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땅이 시키는 대로 한 건물 배치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  두드러진다. 3조란 외조(外朝), 치조(朝), 연조(燕)를  말한다. 외조는 의례를 치르는 인정전, 치조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宣政殿), 연조는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이 주 건물이다. 경복궁에서는 이 3조가 남북일직선상에 있지만 창덕궁에서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에 중국식의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면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가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 P129

창덕궁 전경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서 두드러진다. 창덕궁의 3조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로 인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를 풍긴다. - P130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외조, 치조, 연조의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주례」에 충실한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 - P131

"자연 지형과 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죠. 요즘 우리나라 건축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건물 대지를 반듯하게 밀어놓고 짓는 데 있어요. 땅을 생긴 그대로 두어야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건축이나오는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땅이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건축이 나옵니다." - P131

이 두 대의 자동차는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차고에 방치되어 거의폐차 상태였다. 그러다 1997~2001년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미국과 영국의 본사에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는 아주 희귀한 앤티크 자동차로대접받고 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 어차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하 1층 로비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 P138

순종과 황후의 어차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는 1903년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고 황후가 탄 어차는 1909년 영국 다임러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드문 앤티크 자동차가 되었다.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천위 제도와 종묘의 증축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150여 년이 흘러 13대 명종 대에이르면서 종묘는 한차례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5대 봉사를 한다는 것은 그 윗대 조상의 신주는 땅에 매장하여 안치하고 더 이상 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외로 불천위(不遷位) 제도라는 것이 있다. - P36

불천위 제도란 공덕이 많은 임금의 신위는 변함없이 계속 모신다는뜻으로,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천위라고 한다. 태조는 무조건불천위였고 태종과 세종도 불천위로 모셔졌다. - P36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 P42

우암 송시열이 효종대의 공신으로 배향된 것도 100년 뒤 노론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추가로 들어간 것이었다. - P43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발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 P43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것이 이채롭다. - P44

칠사당에 모신 일곱 신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칠사란 궁중을 지키는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들로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 중류(中), 국문(國門), 공(公),
행(行) 등이다. 사명은 인간의 운명, 사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 사조는 부엌의 음식, 중류는 지붕, 국문은 나라의 성문, 공려는 상벌, 국행은 여행을 관장한다. 그러니 칠사 토착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 것이다. - P44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 P46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 P49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 P52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 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 P52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 P52

국가 의식으로서 종묘
제례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세종대왕이 연회 때 사용하기 위해 회례악(禮樂舞)로 작곡한 것이 「보태평」과 「정대업」이다. 보태평은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으로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고, 정대업은 ‘대업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무공(武功)을 찬양한 것이다. 두 곡 모두 세종 이전 6대조까지, 즉 태조의 네 선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 태종 등의 공을 칭송한 것이다. - P62

내가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창제란 예로부터 입법(立法)만큼이나 하기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하면 못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無)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리라. - P68

1910년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종묘제례도 막을 내렸다. 다만 대한제국 황실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이 향화(香火)를 올리는 것으로  제례를 대신했다. 8·15해방 뒤에는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향화마저 못했다.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란임을말해주는 대목이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랑과 사랑으로 쓴 서울 이야기
1『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封迫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 P4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 P4

서울 답사기는 모두 네 권으로 구상하고 시작했다. 첫째 권은 조선왕조의 궁궐이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품위와 권위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 5대 궁궐에서 나온다. 종묘와 창덕궁은 이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만 해도 생각이 조금 모자랐던것 같다. 제대로 문화외교 전략을 펼쳤다면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등재했어야 했다. 일본 교토(京都)는 14개의 사찰과 3개의 신사를 묶어서 등재했고, 중국의 소주(蘇州, 쑤저우)는 9개의 정원을 동시에  등재했다. 그리하여 세계만방에 교토는 사찰의 도시,  소주는 정원의 도시임을 간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궁궐의 도시이다.
- P5

첫째 권의 제목으로 삼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말한다‘는 창덕궁 존덕정에 걸려 있는  정조대왕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 P5

둘째 권은 조선왕조가 남긴 문화유산들을 답사한 것으로 한양도성,성균관, 무묘인 동관왕묘, 근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진 덕수궁, 그리고조선시대 왕가와 양반의  별서들이 남아 있는 속칭 ‘자문밖‘ 이야기로 엮었다. 둘째 권의 제목은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로 삼았다.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이 글은 오래전에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에 찍혀 있는 도장에서 본 것인데 석파정 답사기를 쓰면서 생각났다. - P6

아직은 구상단계이지만 앞으로 셋째 권은 인사동, 북촌, 서촌, 성북동등 묵은 동네 이야기로 내가 서울에 살면서 보고 느끼고 변해간 모습을담을 것이다. 도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계속 바뀌어왔다. 과거 위에 현재가 자리잡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라진 과거를 다시 되살리려는 현재의 노력도 있다. - P6

넷째 권에는 서울의 자랑인 한강과 북한산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서울이 확장되면서 편입된 강남의 암사동, 풍납토성, 성종대왕 선릉과중종대왕 정릉, 봉은사 그리고 사육신묘, 양천관아까지 한강변의 유적들과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승가사, 진관사, 북한산성, 도봉서원터를 이야기할 생각을 하면 나도모르게 가슴이 열리는 기분이다. - P7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 P15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1995)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 P15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사진은 승효상이 촬영한 월대의 박석이다. - P21

일찍이 일본 건축계의 거장이었던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1905~83)는 1970년대에 이 종묘를 보고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라고까지 극찬한바 있다. 이는 이후 많은 일본의 건축가와 건축학자가 종묘를 방문하는계기가 되었다. - P23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 P25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 P25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 P26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미니멀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간단한 것을 미니멀리즘이라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미니멀리즘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서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성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 P27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 P27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 P28

종묘는 조종(祖宗, 임금의 조상)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 정치와 행정)을 내는것이며, 성곽(城)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國)을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서울을 정했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 P29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근거였다. - P28

건국 초의 종묘 건설
이성계가 역성 (易姓)혁명에 성공하여 조선의 건국을  선포한 것은 1392년 음력 7월 17일이었다. 
제헌절은 바로 이 날짜에서 유래한 것이다. - P29

특히 태종은 건축에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천한 신분의 박자청(朴子靑)을 공조판서에까지  등용해 수도 한양의 건설 공사를 주도하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박자청의 무리한 공사 진행을 성토할때에도 그를 끝까지 보호해주었다. 창덕궁 인정문 밖 행랑이 잘못 시공되었을 때는 그를 하옥시키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풀어주었다. - P31

조종(祖宗)을 위한다면서 토목공사를 어렵게 여겨 옛  전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마땅히 옛날의 제도를 따라서 대실(大室, 정전)의 서쪽에 별묘를  세우라. 별묘의 이름은 마땅히 영녕전(永寧殿)으로 하라. 그 뜻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 7월 18일자)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네가 그 사건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려줄까? 그 사건의 깊은 곳에서, 그 수수께끼의  깊은  곳에서, 자네 자신을 보고 있지? 자신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부분이 기묘하게도  그 사건에 반응을 하지? 그 사건의진상에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 속의 그 정체 모를 부분도 해명된다는 듯이. 언젠가 자신을 망가지게 할 터인자네 자신의 핵심을."

"만일 당신이 내 입장이었다면…......
자기 집에 들이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게다가 행방불명인 사람을?"
남자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런지 만족스러운 듯이.
"그건 그렇죠, 나라면 이런 사람은 집에 들이지 않을 겁니다."

다케시의 구두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알겠어? 그래서 종이학 사건은 미궁에 빠진거야."

"이를테면 A를 해결하면 B라는 문제가 터져. B를해결하면 C라는 문제가 터지고, C를 해결하면 D라는문제가 튀어나와. 하지만 D를 해결하면 다른 해결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돼…………. 미궁에 빠진 사건이란 그런 거야."

생각해 보면그 동네가 그 시기에 좀 시끄러웠어. 사람을 미치게하는 불안정한 정체停滯가 동네를 뒤덮고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 사건이 터졌겠지."

"그리고 그 딸아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아름다움은 대부분 나이와 함께 사라지는 법이지만………. 그 아이, 아까 말한 낯선 남자에게 주스병을받고 아주 좋아했다던데."
"좋아했다고요?"
"주스를 나눠주던 남자는 이미 학교에도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그냥 거절하기가 무서워서 받아갔을 뿐이야. 하지만 그 딸아이는……… 마치 남에게서 뭔가를 받아본 게 처음인 것처럼 좋아하면서냉큼 받아갔다는 거야."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R은 사라졌어. 그런 존재를 중학생 때까지 끌고 들어갔다면 아마 큰일이 났을거야. 하지만 내 경우, 다행히 사라졌어. 그다음부터는 모두 흉내야. 주위의 흉내. 우리는, 꿈을 가져라,
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커온 세대잖아? 뭔가가 되어라, 라는 식으로, 존재의 희박함을 특별한 뭔가가 되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했지. 실은 음악을 했었어. 뮤지션이 되려고 했어."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나 노엘 갤러거 같은 곡은 만들어낼 수 없어. 기타를 쳤었는데, 스티브 바이처럼은도저히 칠 수 없어.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그러고는거품경제가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이 나라가 돌연 불경기에 빠진 다음부터는 안정된 생활을 목표로 달려야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어. 사회에 여유가 없어졌으니까

그 뒤에 나온 구호는, 뻔한 귀결이지만, 일상을 사랑하라는 거야.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더라도 이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라는 거. 주위를 흉내 내면서. 어떤이데올로기 속에는 들어가서 이 세계에 존재할 자격을 구비하고 싶었던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됐어. 일상을사랑하라고? 그건 너무 어렵잖아."

"하지만 결국 깨달았어. 나에게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거. 내 안의 불안이라든가 우울을 뭔가로 메우려고 했던 것뿐이야. 변호사가 되려고 한 것도, 현실적인 노선이었고 그걸로 우쭐해질 수 있다고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는 변호사다, 라는 식으로, 하지만 전혀 흥미가 없어져 버렸어. 위로 치고 올라가서,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지? 부자가 되는 거? 우월감? 하지만 그 우월감에서 표면적인 행복을 느낀다고해도, 그건 말하자면 자신의 행복에 타인의 지위를 전제로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뭐, 결국 내가 문제인 거야."

전혀 낯설게 보였어…………. 어린 마음에도 내가 버려졌고 이 넓은 세계 속에 마구잡이로 내동댕이쳐졌다고깨달았던 것 같아. 미끄럼틀의 커브가, 정글짐의 파란색이 넓게 펼쳐진 땅이, 나무들의 푸르름이, 모조리무관심하게, 오히려 적의를 품고 덤벼드는 것 같았어.
그 무렵의 나는 그런 어린아이를 위한 복지시설이 있다는 것 따위, 알지 못했어. 주위에 친척도 없었고, 나는 완전히 혼자서 이 잔혹하고 넓디넓은 세계 속에서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주위의 풍경 모두가 나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것 같았어. 내 약한 생명력 자체를, 내 의식을, 통과하며 냉혹하게 시험하는 것 같았어. 나는 점점 제대로서 있을 수도 없게 됐어. 견딜 수가 없었어, 그 광대한풍경의 무서움을 기계적이고 부조리한, 그 지나치게높은 풍경의 무서움을…………. 의식을 잃어서 다행이었다, 라고 지금은 생각하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풍경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거야."

가족의 균형이 뒤틀리기 시작하면 그중에서 가장 약한 자에게그 무게가 고스란히 덮쳐든다. 아들 다이치는 당시 열네 살로, 뒤틀림의 영향을 받기 쉬운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나를 능가한다. 세계의 정체속으로 간다. 내면의 상처 따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다. 누가 죽건 누가 살건, 별다를 것 따위 아무것도 없는것이다. 나는 그녀의 죽음이 된다. 부글부글 거센 뭔가가 끓어오른다. 나를 뛰어넘는 것이 솟구쳐 오른다. 뭔가와 일체가 되어간CERCOFUE다. 나의 출구.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몸에 힘을 넣는다. 그렇다, 그렇다, 나는…….

"방해했군…………. 미안해."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고통스러운 듯이. 나는 휴대전화를집어 들었다.

미궁 속에 다이치의 약병을 바꿔치기한 순간의 기억을 꽁꽁 처넣어 버렸다면? 혹은 자신이 약병을 바꿔치기했을 때 그녀에게는그런 자각이 없었다고 한다면? 즉, 세계에 적응하기 전의 다이치가 품은 욕망의 강력한 발로를, 그보다 좀 더 세계에 적응하기 전의 여동생 사나에가, 오빠의 욕망을 뛰어넘을 정도의 자연스러움과 천진함으로, 그 욕망과 함께 오빠를 처리해 버린 결정체가 그
"사건이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은 다양한 사람을끌어들였던 게 아닐까. 내면에 ‘어두운 부분‘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런 자신을 처리해 줬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것이 그 사건의 총체적인 진상이 아닐까. 아니면, 이건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