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ㅁ役 以辛卯年ㅁㅁㅁ(不責因)破百殘ㅁㅁ (倭冠) 新羅以爲臣民 [원래 백제와 신라는 우리들(고구려)의 속민으로서 항상 조공을 바쳐왔는데 이후 신묘년에 조공을 바치지않으므로 백제와 왜적, 신라를 쳐서 이겨 신민으로 삼았다. - P84

하나하나 의식의 녹을 벗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신문기사를 읽어내려가던 내 눈길은 순간 하나의 단어 앞에 멎어섰다.
나는 무심코 지나쳐 읽어 내려간 눈길을 돌려 다시 한 번 그 기사를 되돌아 읽어보았다.

명치 17년, 일본 군인이 탁본을 가지고 돌아온 이래………. - P87

"무릇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몽상가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환상을 갖지 않으면 영웅이 될 수 없다." - P95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적을 완벽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진리로 평소 가츠라가 제일 좋아하는 전쟁 철학이었다.
청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완벽한 지도를 만드는 일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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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이곳까지 오신 것도 하나의 연(緣)입니다. 이따 가실 때간단히 배(拜)를 올리고 가시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부탁하신 책은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 P61

그렇다. 내가 보러 온 것은 탑과 불상과 긴 회랑이 아니다. 내가만나러 온 것은 사람도, 또 하나의 후예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신도, 영혼과의 만남도 아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개인사적 욕망때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탑 대신 폐허를 본다 해도, 사람 대신 부재(不在)를 만난다 해도, 신도영혼도 만나지 못하고 그저 무(無)만을만나게 된다 해도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곳에 와서 만난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 ‘역사‘ 의 강(江)‘이다. - P67

이것은,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그들은 나를 선택해서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부끄러운 기록을태우기 위해서 불을 지른 나를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이 무너진 폐허에도 역사가 있음을 내게 가르쳐주었으며, 저 초라한 신사에도 황홀하던 영화와 번영이 있었음을 침묵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 P69

나는 아침에 신문기사에 나와 있던 문제의 자구를 맨땅 위에 천천히 써내려갔다. 마치 천육백 년 전 처음 광개토왕비에 선왕의 공적을 새기던 비문처럼.
왜이신묘년내도해파백잔ㅁㅁㅁ 라이위신민,
- P69

백제 들판의 싸리나무
옛 가지에 봄을 기다리노라.
앉아 있던 꾀꼬리는 하마 벌써 울었을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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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의 옛모습
고구려의 옛땅(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으며, 장수왕 2년(414년)에 세웠다.
비의 높이는 6.34m, 폭 1면은1.53m이고 2면은 1.15m이다. 비의4면에 1,8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니다. 웃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무(無)의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다. 말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여자에 가깝다.
본문 중에서

호류지를 탐방하는 작가 최인호
무슨 탑이 남아 있으랴. 무슨 궁이 남아 있으랴. 무슨 절이 남아 있으랴.
멸망된 왕국에 무슨 왕관이 남아 있으랴….
그런데 뜻밖에도 백제인들이 만든 탑이, 절이, 그림이 일본에 남아 있었다.

이소노카미신궁 배전(拜殿)
나는 칠지도를 발견한 대궁사 간 마사토모의 행적을 나름대로 파헤치기 위하여,
그가 1873년에서부터 4년 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로 파견되어 있던 동안무엇을 어떻게 조작하고 어떠한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던가를 추적하기 위하여….

금족지
금족지는 조상 대대로 그 누구도 저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신성한 숲이다. 저 숲 안에 신검 (神劍)이 파묻혀 있다는 전설은 천 년 이상 내려오고 있다. 누구든지 그 신검을 본 사람은 큰재앙을 만나거나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분명히 <일본서기> 속에는 그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천년에 걸친 증오심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 P5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내 소설의 소재는 역사로, 종교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길 없는 길》이나 《상도》 같은 장편소설도 결국《잃어버린 왕국》을 그 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 P7

<잃어버린 왕국》의 초판본이 나온 것은 1986년 겨울. 그러고 보면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는데, 내가 이 작품을 아끼는 것은<별들의 고향>이 26세 때 쓴 처녀작이라면, 《잃어버린 왕국>은 40세에 갓 접어들었을 때 심봉사처럼 역사에 눈을 뜨고 쓴 또 하나의 처녀작이기 때문인 것이다. - P7

토마스 제퍼슨은 말하였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을 평가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판단케 한다." - P7

다행히 2001년 12월 24일, 일본의 왕 아키히토는 한일 월드컵을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해온사람들, 초빙되어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왔습니다. 국내청 악부(樂部)들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 이주자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악사를 지냈고, 지금도 때로 아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에 전래됐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 간무천황(桓武皇)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武王)의 자손이라고《속(續)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어 이때부터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되어 왔습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달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한국과의 교류는 이런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일본 역사 속의 검은 비밀을 밝히는 데 극히미약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전 일본이 침묵해온 왕실의 뿌리에대해서 왕 스스로 입을 열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는 데서 큰 의미를지니고 있다.
<잃어버린 왕국>은 아키히토 왕의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고백성사의 전문이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왕국》의 모든 내용이 그들의 입을 통해 고백될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왕국》에 나오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진실이므로 - P8

로마서를 쓴 리비우스는 말하지않았던가.
"진리의 빛은 자주 차단되지만 결코 꺼지는 일은 없다."
리비우스의 이 말처럼 진실된 역사는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가릴 수는 있지만 절대로 사라지는 법은 없는 것이다.
새로운 독자를 또다시 만날 기쁨으로 나는 연지곤지 찍고 초례청에 앉아 있는 새색시 처럼  마음이 설렌다.

2003년 여름 해인당에서 최인호 - P9

이끼가 벗겨지자 딱딱한 바위가 드러났다. 그 바위 위에는 1천 8백여 자의 글씨가 가득히 메워져 있었다. 막연히 청의 옛 황성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압록강변의 이 일대가 그로부터 천오백 년 전 고구려의 옛 도읍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보이는 무언의 절규였었다. 뿐 아니라 이 비석은 만주의 전부와 요동반도, 북으로는 소련의 영토, 그 모든 곳을 나라로 삼고 통일했던 광개토왕(廣開土王)의391년부터 413 년까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기념비였던 것이다. - P24

그러나 뉘 알았으랴.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장수왕은 짐작이나 했었으랴. 천오백 년 만에 부활한 이 환상의 비석이 그의 소중한 자손 한(韓)민족이 남의 나라의 노예로 짓밟히는 그 무기로 사용되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었으랴.
그것은 무서운 출발의 신호였다. 천오백 년 세월의 덫을 깨고 일어선 광개토왕의 비는 옛 영광의 찬란한 재현보다는 우리에게 검은 음모의 시작을 알리는 만가(歌)의 조종(鐘) 소리였다.
모든 비극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음모는 그곳에서부터 이렇게 시작되었다. - P25

그렇다. 이 기사 뒤에는 ‘뭔가 떳떳하지 못한 역사의 조작을 눈치채고 있는 오늘날 일본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불안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안간힘‘이 숨어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 역사에서는 그들이 391년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을 쳐서 이겨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일본인 스스로 그들의 역사는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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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헤밍웨이 및 세계 유명 인사들의 사진과 사인판이 빼곡이 걸려 있다. 땀을 식히려고 엘리베이터로 6층에 올라갔더니, 거기에 있는 까페테리아도 만원이다. 냉커피한잔을 선 채로 마시고 나서 5층으로 걸어 내려와 511호실에 들렀다.
작가는 이 방에 7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7개월 만에 완성했다. 방에는 침대와 타자기, 서가가 유물로남아 있다. - P282

쿠바만이 아닌,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닌, 전세계의 변혁을 위한 그의 원대한 구상과 굳은 의지 및 예지가 돋보이는 유물과자료들이다. 지구상의 대륙마다에 게바라 같은 사건창조적 인물이 더도 말고 서너명만 있어도 세계의 면모는 변혁과 더불어 탈바꿈되어갈 것이다. - P290

수도 아바나에서277km나 떨어진 중부 쿠바의 중심도시 싼따끌라라를 하루 품이나 들여 가보려는 것은 그곳이 체 게바라가 이끌어 성공한 혁명의 성지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대끼는 도시를 벗어나 시원한 자연과 시골의추억을 담고파서이기도 했다. 사실 싼따끌라라는 ‘체 게바라 맨‘이라면 누구나 찾아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거기에 그가 쿠바혁명과 라틴아메리카혁명, 그리고 세계의 변혁을 위해 한생을 바치다가 영면한유택(幽宅)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체 게바라 시(市)‘라고도 부른다. - P308

1953년 7월 26일, 당시 26세이던 피델 까스뜨로는 뜻을 같이하는165명의 열혈청년들과 함께 쿠바의 동단 싼띠아고에 있는 몬까다 병영을 습격, 까스로 혁명의 첫 횃불을 지펴올렸다. 까스뜨로는 붙잡혀 11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까스뜨로 형제를 비롯한 일군의 추종자들은 멕시코로 망명한다. 거기서한창 미래의 꿈을 키워가던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의 청년 체 게바라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 P315

그렇지만 까스뜨로는 애당초 미국과 맞설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혁명 직후 그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즉 "미국에게 단 하나 바라고 싶은 점은 우리를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미국과 손잡고 나아간다면 쿠바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싶다면 환영한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우리의
자주권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을 일으킨다면 쿠바를 방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까스뜨로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풍파 없이 혁명과업을 수행하려고 했다. 사실이 입증하다시피 이얼마나 실현불가의 순진한 환상이었던가. 쿠바의 자주권 수호와 미국의 압살 시도는 숙명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판결이고불가피한 현실이었다. - P316

기념관을 나와 맞붙은 광장을 둘러봤다.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오른손으로는 장총을 으스러지게꽉 잡고 멀리 내다보는 게바라의 동상이 하늘을 향해 우뚝서있다. 동상 앞면에는 "영원히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철석같은 신념이 밴 세 단어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 P331

‘자유로의 길은 오로지 하나, 투쟁의길 뿐이다‘ - P341

15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해상교역이 급증하자, 이때까지는 순수 민간집단으로서 약탈행위를 감행해온 해적의 사회적 관계는 복잡해진다. 이제부터는 국가라는 권력기관이 나서서 해상무역을 관장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해적들에게 적의 선박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항해의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 재부의 약탈도 위임하게 된다. 이른바 ‘약탈면허장‘ (Letter of Marque)의 발부다. 위임을 받은 해적들은 국가를 대신해 해적행위를 합법적으로 단행한다. 이러한 민간해적들을 사략선업자掠船業者, privateer)라고 한다. 그런데 사략선업자들은 국가의 위임계약은 무시한 채, 사리사욕만 채우면서 국가의 공익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1690~1720년대의 황금시대를 비롯해 해적사상 최대의 번영기를 맞는다. - P480

한편, 재력과 무력이 막강해진 국가는 더이상 해적에 불과한 사략선업자들을 대리로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면서 양자 간에는 갈등과충돌이 발생했으며, 급기야 국가는 무력으로 해적들을 제압하고 해체한다. 그 과정은 자그마치 200~300년(1500~1800년)이라는 긴 세월이걸렸다. 이것이 중세의 굴절된 해적사의 단면이다. 해적사는 여기서그치지 않고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당장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선진문명을 공유하고 공정한 글로벌 해상교역이 실현될 때 해양사의 암적 존재인 해적,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 P480

이 시대의비극은 문명의 진화가 인성(人性)의 
퇴화를 불러도 치지도(度外)하는 것이다. 
문명과 인성은 쌍쌍진화(雙雙進化)해야 한다. - P502

귀족의 지위를 얻고 자신을 ‘돈‘ (don, 영어의 Sir)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각서에 따르면, 그는 발견한 땅의 소유자는 아니며, 소유자는 국왕이다. 이 각서에 사람이나 땅에 대한 정복과 지배와 종교전도에 관한 언급은 없으며, 아시아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아마 원래의 의도가 정복이나 전도가 아닌 교역에 있었으며, 아시아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이목표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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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채택된 헌법수정안에는 호세마르띠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과 국가의 지도사상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은전국인민정권대표대회(국회)이며, 최고지도자는 국가원수이자 무력통수권자인 국가평의회(1876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신설) 의장이다. 전국은 15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로 나누고, 주 산하에 총 168개 도시가있다. 쿠바공산당은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사회와 국가의 최고지도역량이라고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 P271

섬에서 일어난 반외세 · 반독재 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온 라틴아메리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불길의 진원지는 바로 쿠바다, 그 열도를 현장에서 가늠하기 위해 어렵사리 대서양을 건너 이 땅을 찾았다.
쿠바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피델까스뜨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혁명의 젊은 기수들이 미래라틴아메리카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혁명의 요람이었던 몬까다(Moncada) 병영과 마에스뜨라산 유격구에는 혁명전사들의 얼과 혼이 빛나고 있었다. 오랜 군사독재를 뒤집은 혁명에 대한 쿠바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은 대단했다. - P272

사실 쿠바는 지구 서반구의 홍일점(紅一點, 사회주의국가)으로 그 존재 자체가 역사의 일대 이변이고 장거이며 또한 실험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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