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는 헤밍웨이 및 세계 유명 인사들의 사진과 사인판이 빼곡이 걸려 있다. 땀을 식히려고 엘리베이터로 6층에 올라갔더니, 거기에 있는 까페테리아도 만원이다. 냉커피한잔을 선 채로 마시고 나서 5층으로 걸어 내려와 511호실에 들렀다.
작가는 이 방에 7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7개월 만에 완성했다. 방에는 침대와 타자기, 서가가 유물로남아 있다. - P282

쿠바만이 아닌,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닌, 전세계의 변혁을 위한 그의 원대한 구상과 굳은 의지 및 예지가 돋보이는 유물과자료들이다. 지구상의 대륙마다에 게바라 같은 사건창조적 인물이 더도 말고 서너명만 있어도 세계의 면모는 변혁과 더불어 탈바꿈되어갈 것이다. - P290

수도 아바나에서277km나 떨어진 중부 쿠바의 중심도시 싼따끌라라를 하루 품이나 들여 가보려는 것은 그곳이 체 게바라가 이끌어 성공한 혁명의 성지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대끼는 도시를 벗어나 시원한 자연과 시골의추억을 담고파서이기도 했다. 사실 싼따끌라라는 ‘체 게바라 맨‘이라면 누구나 찾아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거기에 그가 쿠바혁명과 라틴아메리카혁명, 그리고 세계의 변혁을 위해 한생을 바치다가 영면한유택(幽宅)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체 게바라 시(市)‘라고도 부른다. - P308

1953년 7월 26일, 당시 26세이던 피델 까스뜨로는 뜻을 같이하는165명의 열혈청년들과 함께 쿠바의 동단 싼띠아고에 있는 몬까다 병영을 습격, 까스로 혁명의 첫 횃불을 지펴올렸다. 까스뜨로는 붙잡혀 11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까스뜨로 형제를 비롯한 일군의 추종자들은 멕시코로 망명한다. 거기서한창 미래의 꿈을 키워가던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의 청년 체 게바라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 P315

그렇지만 까스뜨로는 애당초 미국과 맞설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혁명 직후 그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즉 "미국에게 단 하나 바라고 싶은 점은 우리를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미국과 손잡고 나아간다면 쿠바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싶다면 환영한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우리의
자주권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을 일으킨다면 쿠바를 방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까스뜨로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풍파 없이 혁명과업을 수행하려고 했다. 사실이 입증하다시피 이얼마나 실현불가의 순진한 환상이었던가. 쿠바의 자주권 수호와 미국의 압살 시도는 숙명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판결이고불가피한 현실이었다. - P316

기념관을 나와 맞붙은 광장을 둘러봤다.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오른손으로는 장총을 으스러지게꽉 잡고 멀리 내다보는 게바라의 동상이 하늘을 향해 우뚝서있다. 동상 앞면에는 "영원히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철석같은 신념이 밴 세 단어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 P331

‘자유로의 길은 오로지 하나, 투쟁의길 뿐이다‘ - P341

15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해상교역이 급증하자, 이때까지는 순수 민간집단으로서 약탈행위를 감행해온 해적의 사회적 관계는 복잡해진다. 이제부터는 국가라는 권력기관이 나서서 해상무역을 관장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해적들에게 적의 선박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항해의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 재부의 약탈도 위임하게 된다. 이른바 ‘약탈면허장‘ (Letter of Marque)의 발부다. 위임을 받은 해적들은 국가를 대신해 해적행위를 합법적으로 단행한다. 이러한 민간해적들을 사략선업자掠船業者, privateer)라고 한다. 그런데 사략선업자들은 국가의 위임계약은 무시한 채, 사리사욕만 채우면서 국가의 공익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1690~1720년대의 황금시대를 비롯해 해적사상 최대의 번영기를 맞는다. - P480

한편, 재력과 무력이 막강해진 국가는 더이상 해적에 불과한 사략선업자들을 대리로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면서 양자 간에는 갈등과충돌이 발생했으며, 급기야 국가는 무력으로 해적들을 제압하고 해체한다. 그 과정은 자그마치 200~300년(1500~1800년)이라는 긴 세월이걸렸다. 이것이 중세의 굴절된 해적사의 단면이다. 해적사는 여기서그치지 않고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당장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선진문명을 공유하고 공정한 글로벌 해상교역이 실현될 때 해양사의 암적 존재인 해적,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 P480

이 시대의비극은 문명의 진화가 인성(人性)의 
퇴화를 불러도 치지도(度外)하는 것이다. 
문명과 인성은 쌍쌍진화(雙雙進化)해야 한다. - P502

귀족의 지위를 얻고 자신을 ‘돈‘ (don, 영어의 Sir)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각서에 따르면, 그는 발견한 땅의 소유자는 아니며, 소유자는 국왕이다. 이 각서에 사람이나 땅에 대한 정복과 지배와 종교전도에 관한 언급은 없으며, 아시아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아마 원래의 의도가 정복이나 전도가 아닌 교역에 있었으며, 아시아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이목표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P5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