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의 옛모습
고구려의 옛땅(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으며, 장수왕 2년(414년)에 세웠다.
비의 높이는 6.34m, 폭 1면은1.53m이고 2면은 1.15m이다. 비의4면에 1,8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니다. 웃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무(無)의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다. 말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여자에 가깝다.
본문 중에서

호류지를 탐방하는 작가 최인호
무슨 탑이 남아 있으랴. 무슨 궁이 남아 있으랴. 무슨 절이 남아 있으랴.
멸망된 왕국에 무슨 왕관이 남아 있으랴….
그런데 뜻밖에도 백제인들이 만든 탑이, 절이, 그림이 일본에 남아 있었다.

이소노카미신궁 배전(拜殿)
나는 칠지도를 발견한 대궁사 간 마사토모의 행적을 나름대로 파헤치기 위하여,
그가 1873년에서부터 4년 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로 파견되어 있던 동안무엇을 어떻게 조작하고 어떠한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던가를 추적하기 위하여….

금족지
금족지는 조상 대대로 그 누구도 저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신성한 숲이다. 저 숲 안에 신검 (神劍)이 파묻혀 있다는 전설은 천 년 이상 내려오고 있다. 누구든지 그 신검을 본 사람은 큰재앙을 만나거나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분명히 <일본서기> 속에는 그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천년에 걸친 증오심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 P5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내 소설의 소재는 역사로, 종교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길 없는 길》이나 《상도》 같은 장편소설도 결국《잃어버린 왕국》을 그 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 P7

<잃어버린 왕국》의 초판본이 나온 것은 1986년 겨울. 그러고 보면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는데, 내가 이 작품을 아끼는 것은<별들의 고향>이 26세 때 쓴 처녀작이라면, 《잃어버린 왕국>은 40세에 갓 접어들었을 때 심봉사처럼 역사에 눈을 뜨고 쓴 또 하나의 처녀작이기 때문인 것이다. - P7

토마스 제퍼슨은 말하였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을 평가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판단케 한다." - P7

다행히 2001년 12월 24일, 일본의 왕 아키히토는 한일 월드컵을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해온사람들, 초빙되어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왔습니다. 국내청 악부(樂部)들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 이주자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악사를 지냈고, 지금도 때로 아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에 전래됐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 간무천황(桓武皇)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武王)의 자손이라고《속(續)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어 이때부터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되어 왔습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달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한국과의 교류는 이런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일본 역사 속의 검은 비밀을 밝히는 데 극히미약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전 일본이 침묵해온 왕실의 뿌리에대해서 왕 스스로 입을 열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는 데서 큰 의미를지니고 있다.
<잃어버린 왕국>은 아키히토 왕의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고백성사의 전문이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왕국》의 모든 내용이 그들의 입을 통해 고백될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왕국》에 나오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진실이므로 - P8

로마서를 쓴 리비우스는 말하지않았던가.
"진리의 빛은 자주 차단되지만 결코 꺼지는 일은 없다."
리비우스의 이 말처럼 진실된 역사는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가릴 수는 있지만 절대로 사라지는 법은 없는 것이다.
새로운 독자를 또다시 만날 기쁨으로 나는 연지곤지 찍고 초례청에 앉아 있는 새색시 처럼  마음이 설렌다.

2003년 여름 해인당에서 최인호 - P9

이끼가 벗겨지자 딱딱한 바위가 드러났다. 그 바위 위에는 1천 8백여 자의 글씨가 가득히 메워져 있었다. 막연히 청의 옛 황성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압록강변의 이 일대가 그로부터 천오백 년 전 고구려의 옛 도읍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보이는 무언의 절규였었다. 뿐 아니라 이 비석은 만주의 전부와 요동반도, 북으로는 소련의 영토, 그 모든 곳을 나라로 삼고 통일했던 광개토왕(廣開土王)의391년부터 413 년까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기념비였던 것이다. - P24

그러나 뉘 알았으랴.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장수왕은 짐작이나 했었으랴. 천오백 년 만에 부활한 이 환상의 비석이 그의 소중한 자손 한(韓)민족이 남의 나라의 노예로 짓밟히는 그 무기로 사용되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었으랴.
그것은 무서운 출발의 신호였다. 천오백 년 세월의 덫을 깨고 일어선 광개토왕의 비는 옛 영광의 찬란한 재현보다는 우리에게 검은 음모의 시작을 알리는 만가(歌)의 조종(鐘) 소리였다.
모든 비극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음모는 그곳에서부터 이렇게 시작되었다. - P25

그렇다. 이 기사 뒤에는 ‘뭔가 떳떳하지 못한 역사의 조작을 눈치채고 있는 오늘날 일본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불안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안간힘‘이 숨어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 역사에서는 그들이 391년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을 쳐서 이겨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일본인 스스로 그들의 역사는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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