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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세계의 심장부이자
‘이란의 진주‘로 알려진 이스파한은 사파비 왕조(1501~1732)의수도였고, 이 왕국이 시아파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오늘날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스파한의 영화는 사파비 왕조를 부흥시킨압바스 1세(1571~1629)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598 년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압바스 1세는왕조의 수도를 북쪽 변방 카즈빈에서 이란 대륙의 중심부인이스파한으로 옮겼다. 뛰어난 외교술과 리더십으로건국 군벌집단인 키질바시(Qizilbashi) 정예군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고,
동쪽 우즈베키스탄과 서북쪽 오스만제국에 맞서든든한 국경 정비에 성공했다.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열린 정책을 펼친 그는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학자들과장인들을 초청했고, 실크로드를 잇는 교역망을 확충해세상의 부와 문화를 이곳으로 흘러들게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스파한은 인구 100만에 160개의 모스크,
학교 48개, 대상을 위한 여관 1800여 개, 공중목욕탕 273개가 있는세계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17세기에 이스파한은
‘네스페이 자한(Nesfe-i Jahan)‘, 곧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다.
얼마나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라.

이스파한이 사파비 왕조 때 처음 등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이곳은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고도였다. 기원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는 ‘가발’이라 불리며 번성했고, 7세기 이후에도 수많은 왕조와 국가가 거쳐갔다. 이스파한이라는 이름은 군영 도시를 의미하는 세파한(Sepaha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앙과 건축 예술의 정수,이맘 모스크

이스파한의 상징인 이곳은 압바스 1세의 명령으로 1612년에 공사를 시작해 1638년에 완성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가운데 하나다. 모스크의 문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국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꽃 모양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디자인하여, 은은하고 절제된 색감의 청색 타일로 표현해놓았다. 과연 건축 예술의 금자탑이라 불릴 만했다. 차가운 기운이 도도한 색감을 타고 심장을 파고드는 듯했다.

이란 전통 마을에는 좁은 골목이 많이 있다. 좁은 골목은 화해의 공간이다. 이웃과 다투었어도 좁은 골목에서 수시로 마주치게 되니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시선을 피할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좀처럼 이웃과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이 없다. 싸우고 난 후의 민망함을 감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은 그래서 정겨움이 넘쳐나는 화해의 공간이다.

페르시아라는 말은 수 세기 동안 주로 서구에서 사용해왔으며 그 기원은 과거 페르시스로 알려진 이란 남부 지역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스는 파르스Pars 또는 파르사Parsa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파르스Fars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을 가리킨다. 파르사인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844년 아시리아 왕인 샬마네세르 3세가 편찬한 연대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9~330)가 영토를 확장하며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에 이란 고원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스의 거주민과 접촉했다. 고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서구인들도 점차 페르시스라는 말을 이란 고원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그들의 조국을 가리켜 ‘아리아인의 땅’이라 부른다.

중앙아시아에는 실크로드가 있어항상 우리의 호기심과 낭만을 자극한다.
그곳에는 찬연한 도시 문화가 있었고,
함께 살아 더욱 아름다웠던 인류의 지혜가 번뜩였다.
고대부터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젖줄을 통해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과 정보, 신화와 종교,
진귀한 물품과 발명품이 몰려들고 재창조되는그리고 소중한 결실을 사방팔방으로 실어나르는 문명의 허브였다.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도 그런 도시였다.
신라와 중국에서 출발한 비단이나 인삼 같은 동방의 교역품은사마르칸트를 경유해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로 향하고,
지중해와 동부 아프리카의 값비싼 물품 역시사마르칸트를 거쳐 아시아 전역에 전달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티무르는 한때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해 술탄을 생포할 정도로 강성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사마르칸트를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독특한 도시로 만들었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는 사마르칸트는 부하라와 함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가장 오래된 교역 도시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14~15세기 티무르 제국 시대의 작품이지만, 이 도시의 역사는 2500년이 넘는다. 1996년 사마르칸트는 유네스코 주관으로 도시 건설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기념식과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어 2001년 실크로드를 이어주는 문명의 교차로로서의 역사적 역할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 길쭉하게 못생긴 큰 멜론 하나를 5000숨(약 500원)에 사서 입에 넣어본다. 달고 부드럽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사마르칸트의 멜론이다. 수박과 참외, 포도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란다.

사마르칸트는 푸르름을 머금은 중세의 보석 같은 도시다.

소그드인도 페르시아 문명권 종족이고 보면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화는 오랜 전통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의 많은 지역에서는 페르시아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8세기 중엽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슬람 압바스 제국의 동진으로 이번에는 당나라와 이 도시를 두고 격돌을 벌이게 된다. 751년 탈라스 전투가 그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사마르칸트는 새로운 이슬람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중앙아시아 전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스탄’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포로들을 통해 중국의 제지술, 비단 직조술, 나침판, 화약 제조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이런 과학적 결실이 후일 유럽 세계로 건너가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칭기즈칸의 사마르칸트 및 부하라 침공과 약탈을 이슬람 문화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묘사한다.

철저하게 폐허가 되고 잊힌 사마르칸트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티무르 제국(1370~1507)이 이곳을 수도로 삼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오늘날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티무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이처럼 뛰어난 영웅이나 성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수피즘이라 하는데 이슬람이 토착종교와 섞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와 신의 섭리를 담은 아라베스크 문양의 독특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묘당 내부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티무르의 별명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절름발이’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1841년 소련 발굴팀은 티무르 무덤을 조사하면서 그가 이란과의 전쟁 때 부상당해 오른쪽 팔과 오른쪽 발이 부자유스러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잔혹한 파괴자’로 티무르를 묘사한 서구 학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실제로 티무르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통치자였다.

티무르 묘역 앞뜰에서는 우즈베크 아낙네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토마토 절임(피클)을 만들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접한 절임문화는 우리 음식문화와 너무나 비슷해 더욱 친근감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화보집을 펼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실크로드의 노인’은 사마르칸트 여행 내내 나에게 삶의 참맛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특히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고구려 사절로 보이는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소그디아나 왕국 시절의 아프라시압 벽화에는 새 깃털이 달린 모자(조우관)를 쓰고 환두대도(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를 차고 이곳까지 찾아온 두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벽화는 현재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7세기 중엽) 고구려는 중국(당나라)이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기 위해 멀리 소그디아나 왕국에 사절을 보내 상호교역과 동맹을 논의했을 것이다. 여행 중 옛 조상을 만난 반가움에 가슴이 뭉클하다.

고구려-사마르칸트 교류사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다.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의 논문에서 제기된 바보 온달 장군의 사마르칸트 도래설이다. 오랫동안 고구려와 긴밀하게 상호교류를 해오던 사마르칸트 왕국의 온씨 지배층이 정치적 대격변기를 거치면서 고구려로 이주했고, 그 집단이 바로 온달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사료 부족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당시 양국 간의 교류 정황에 비추어 본다면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다.

1403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프랑스 사절 클라비호는 "바자르가 성을 가로질러 형성되어 세계의 사방에서 몰려든 물건으로 가득 차고 거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그 많은 상품이 금방 동이 나버리곤 했다"라고 묘사했다.

수박, 참외, 오이, 포도, 석류 외에도 참깨, 시금치, 파, 마늘 같은 먹을거리가 모두 이곳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애착이 간다.

더욱이 식품을 파는 이들 중에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한국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김치와 채소절임, 마늘장아찌를 팔고 있었다. 김치는 우즈베크인의 입맛을 고려해 고춧가루나 젓갈을 넣지 않은 백김치였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고 바쁜 중에도 고국의 소식이 궁금해 차 한잔을 권하며 소매를 잡아끈다. 따뜻한 동포의 정을 나누는 짧은 순간에 김옌나 할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85년 전 동부 시베리아에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강제 이주해와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한국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동서가 만나고 문화가 섞이던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우리 동포인 카레이스키를 만날 수 있어 사마르칸트는 더욱 정이 가는 도시였다.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는 인도의 델리,
아그라와 더불어 무굴시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1524 년 무굴 제국 창건자인바부르에게 정복당한 뒤 1584년 아크바르 대제 시기에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까닭에, 라호르에는 지금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많은이슬람 문화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바드샤히 모스크,
아름다운 궁정 요새인 라호르 성채 등 화려하고 장대한유물과 유적을 만나다 보면 무굴 제국의 영광이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다.
무굴 제국은 1526년부터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330년 넘게 인도 아대륙에 번성했던 이슬람 왕조다.
라호르는 그 무굴 제국의 중심 도시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라호르를 보지 않으면 세상에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라호르는 문화 유적과 예술품 등볼거리로 가득하다.

아크바르 대제 시대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던 중심 도시이자 수도가 라호르다. 라호르의 찬연한 문화적 성취를 바탕으로 아크바르 대제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한기르(Jahangir 1569~1627), 샤 자한(ShahJahan, 1592~1666),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로 이어지는 시기에 무굴 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슬람 집권세력은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통치를 위해 과감하게 피정복지의 문화와 습속을 수용하는 융합과 종교적 관용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메카를 기점으로 동서로 퍼져 나간 이슬람은 다양한 문화를 만나면서 건축에는 세련미가, 미술에는 화려함이 더해져 문화적 풍성함을 얻게 되었다. 이슬람의 성공과 위대성은 이처럼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힘에 있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두 문명을 일시에 제압하고 받아들인 이슬람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에스파냐 땅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걸출한 건축 예술을 남겼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는 인도의 토착 문화를 받아들여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건축을 남겼다. 우리는 타지마할만 기억하지만 무굴시대 모스크 건축은 라호르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무굴시대 라호르의 대표적인 건축이 바드샤히 모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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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막 봄철이 시작되는 어느 날 유학을 위해 이스탄불 이을드즈 공원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스탄불을 찾았다. 그리고 이스탄불과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올해 169번째.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 기준이다. 매년 네다섯 차례 다녔나 보다. 대체 무슨 매력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많다. 무언가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겠는데, 한마디로 그 매력을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이스탄불을 그렇게 평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탄불은 그냥 그런 도시가 아니다.

나는 특히 슐레이마니예 모스크 뒷골목을 좋아한다. 가장 튀르키예적이고 가장 이슬람다운 향취가 가득하다.

너무나 인간적인 튀르키예 사람들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과 정치·경제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날 튀르키예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고, 동서 문화의 교차로에 자리하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심성과 문화적 바탕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두 민족이 비록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일구었지만, 오랜 역사적 정통성과 주체적 문화의 계승이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시간쯤 지나 휴게소에 들른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우리 버스 앞을 막아서는 거예요.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은 내가 묵은 집 주인 아저씨였어요. 너무 놀라 버스에서 내려 인사를 하러 갔어요. 아저씨는 나를 보자 딸에게 들었다며, 보름 동안 저를 식구로 대접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네, 돈을 받을 수 없다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는 거예요. 제가 드린 돈을 내밀면서 말린 살구 꾸러미까지 주시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 튀르키예를 다녀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열렬한 튀르키예 팬이 되고 만다.

이스탄불 골목길

이스탄불 골목길에는 사람 사는 정이 넘친다. 골목길 아파트 생활에는 따로 시계가 필요 없다. 일정한 시각에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침 7시, 갓 짠 신선한 양유를 노새 등에 실은 아저씨가 제일 먼저 지나간다. 따로 외치지는 않는다. 노새 목에 달린 딸랑이 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바구니에 줄을 매달아 창문으로 그릇이나 병을 내려주면, 필요한 양을 담아준다. 줄을 당기기만 하면 된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낮과 밤이 이어져 하나가 되는 인류 역사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동서 학문의 산실, 이스탄불대학교

국립 이스탄불대학의 웅장한 정문 위에는 라틴어와 아라비아 숫자로 1453년이라는 설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 1453년은, 1113년간의 동로마 제국 수도에서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이스탄불로 운명이 바뀐 해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튀르크가 병든 비잔틴을 멸함으로써 중세가 종식되고 근세가 열렸다. 튀르크인은 유럽과 동양을 동시에 통치하려는 거대한 이상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의 혼이 어린 옛터에 이슬람식 전문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것이 초기 오스만 왕궁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탄불대학의 시초다. 그 뒤 오스만 제국이 600년에 걸쳐 세 대륙에 강대한 위세를 떨치면서, 이스탄불대학은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인류 문화 창출의 산실이 되었다.

옛 튀르키예의 정치·상업 중심지

코냐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에서는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 번성했다. 그 토양 위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슬람 문화를 향유하는 튀르크인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아나톨리아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물론 튀르크인들이 1만 년 역사의 아나톨리아반도에 뿌리를 내린 기간은 고작 1000년 정도다. 10세기 말, 셀주크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그리스·로마 문명의 요람이라 여겨지던 아나톨리아가 전혀 새로운 문명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튀르키예 중부의 비옥한 평원에 위치한고대도시 코나는 11세기 이후(1097~1243) 셀주크튀르크의룸술탄국(Seljuk Sultanate of Rum)의 수도였다.
50년경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했던초기 기독교의 전통이 남아 있는 성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장 튀르키예다운 도시로 불린다.
중세 이슬람 시기 이후 메블라나라고 불리는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의 총본산으로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실크로드 대상(카라반)들이 멀리 동방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반드시 거쳐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런 점에서 코냐 역시 인류 문명의 본류인아나톨리아반도의 문명사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번성했던메소포타미아 상류 문명으로서 고대 왕국은 물론 리디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동로마(비잔틴 등 강대국들의침략과 지배를 고스란히 경험했다.
코냐라는 명칭도 로마시대 이 도시의 이름인이코니움(Iconium)에서 비롯되었다.

그 변곡점은 1071년이었다. 꺾일 줄 모르던 천년 제국 동로마가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의외의 적에게 허를 찔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1071년 셀주크튀르크와 동로마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다. 중세 최대 규모의 세계대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패배하고 말았다.

만지게르트 전투 승리는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에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 기점이 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8000만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의 농작물을 이곳에서 생산한다고 하니 정말 은총의 땅이다. 풍성한 식탁과 세계 최고라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넉넉한 인정은 모두 코냐 평원에서 솟아나는 듯하다.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 차탈회위크 유적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신석기시대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문명을 구가했던 차탈회위크는 인류 최초의 계획 도시이자 도시 문명의 뿌리로 여겨진다. 1958년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93년부터 영국 고고학자 이안 호들러의 발굴 작업이 25여 년 만에 성과를 내면서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발굴 지점 옆에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진흙집이 있어서 9000년 전 주민들의 삶을 상상해보기에 충분했다.

독수리와 머리 없는 사람의 형상이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독수리에게 시신을 바치고 하늘과 가까이 다가가려는 하늘 사상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신이 내린 유한한 자원을 당대는 물론 후세를 위한 자원으로 여겨 적게 욕망하고 적게 생산하며 살아간 차탈회위크의 생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교훈을 준다.

‘살아 있는 사자’란 음부티라는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태어난 응고르라는 아이가 할아버지 사후에도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산 사람과 똑같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개념이다. 즉, 할아버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공동체의 일을 상의하면서 할아버지의 지혜와 경륜을 유지하고 계승한다. 응고르가 죽고 그 마을에 음부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음부티는 ‘자마니’, 즉 과거의 시간, 망각의 세계로 돌아간다.

메블라나를 만나는 시간

코냐 시내에 들어서자 곧바로 메블라나 기념관으로 달려갔다. 메블라나는 코냐 여행의 핵심이다.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1207~ 1273)는 종교적 관용과 깊은 사랑을 전한 인류의 대스승이었다.

페르시아 태생의 루미는 셀주크 술탄의 요청으로 튀르키예로 와서 이슬람 신비주의의 중요한 갈래인 메블라나 수피즘을 열었다. 아랍어로 쓰인 꾸란은 비아랍권의 일반인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워 신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명상, 노래, 염원, 수도 생활 등을 통해 신을 만나는 다양한 대중적 방식을 펼쳐 보였다. 루미가 창시한 메블라나 종단은 세마라는 회전춤을 통해 신과 합일하는 독특한 수피즘이다.

유럽 지성계에도큰 영향을 미친 루미의 사상
대스승 메블라나 루미는 인류에게 일곱 가지 교훈을 남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을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도 직접·간접적으로 루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지성이었다.

호메이니와 이란 시민혁명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1902~1989)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이자, 모함메드 샤 레자 팔레비 왕정의 독재에 맞서 민중혁명을 이끈 정치 지도자이다. 그는 시아파 성지 도시 콤에 사는 평범한 성직자였으나 1963년 팔레비 국왕이 추진한 이슬람 모스크의 토지와 재산 몰수, 여성 참정권 허용 정책에 반대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1979년 2월 이란으로 귀국해 이슬람 민중혁명을 이끌었다. 그가 초석을 다진 이슬람 신정정치 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9년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인 과격파 학생들은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급습해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444일 동안 억류하면서 강한 반미노선을 표명했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되었다.

1979년 2월 1일 테헤란 공항에는 이미 발포 명령이떨어진 가운데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파리를 출발한 비행기에는 15년 긴 망명 생활 끝에귀국하는 호메이니라는 백발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테헤란 시민들은 물론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만 군중은호메이니 옹의 귀국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공항과 베헤슈티 자흐라 순교자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지난 15년 동안팔레비 왕정의 압제와 극심한 탄압을 견디게 한 힘은 오직 하나,
신에 대한 믿음과 이맘 호메이니에 대한 확고한 신뢰였다.
파리에서 녹음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며칠 만에수십만 개의 테이프로 복사되어 이란 전역에생생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왕정의 매서운 감시에도 불구하고그들은 호메이니의 육성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호메이니가 트랩에 모습을 드러내자 북받치는 흐느낌과감격의 환호가 교차되었다. 그들은 목메어 외쳤다.
"신은 위대하다! 이맘 호메이니 만세! 이슬람 이란에 영광을!"
경찰은 이미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날 발포는 일어나지 않았고, 호메이니는 향리인 콤시로 향했다.
정부는 즉각 전군을 동원해 24시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을 급습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탱크 앞을 가로막으며호메이니 옹의 집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호메이니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가 없는 이란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25년간 이란을 폭정과 방탕으로 몰아 넣었던 레자 팔레비(왕)는 부인과 함께 이란을 빠져나갔다. 군부는 드디어 발포를 중지하고 호메이니 옹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1979년 2월 11일 이란 시민혁명은 성공했다. 이슬람 정신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성과 국민 경제의 자립을 표방하는 새로운 이란이 탄생한 것이다.

국제정치의 역설이 항상 그렇듯이 이란의 신정체제를 유지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우군은 미국의 극단적인 이란 제재와 고강도 압박 정책이다. 40년 봉쇄와 제재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내성만 강해진 이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미국이 잘 알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기에는 이란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전격적인 핵 평화 협정을 체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핵 협정 합의를 파기했다. 그로 인해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다시 원점에서 관계 복원을 힘들게 모색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적 대치 기간이 너무 길어 완전한 신뢰 회복까지는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이슬람으로!"

이란은 찬연했던 페르시아 문화의 본바탕이고 계승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전성기를 누린 고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 오리엔트와 그리스, 인도와 동양의 문화를 고루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란의 한 교수는 이란 혁명은 위대한 여성의 승리였다고 강조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기꺼이 조국을 위해 바친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이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대제국의 심장

테헤란에 온 이상 이란 문명의 진수이자 인류 문명의 자존심이 걸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페르세폴리스로 날아갔다.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500여 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 대제국의 수도다. 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으로 서양을 실어 날랐던 알렉산드로스의 도도한 행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 정신의 심장부였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드로스의 광풍을 견뎌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최고의 약탈 대상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불태워졌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창고’(재무성 창고)의 재물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책에 따르면 당나귀 2만 마리와 낙타 5000 마리를 동원해서 보물을 실어날랐다. 고대 역사학자들의 과장과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부의 규모였던 것 같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자 자신의 후계자였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시아의 대왕은 온몸이 열 군데 이상 칼에 찔린 채 마케도니아 병사에게 발견되었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에게 물 한 모금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페르시아 대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도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대제국이 남긴 유산,다문화 정책과 지방 분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제국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그 후에도 계승되었다. 세계 최초 대제국의 거버넌스의 핵심은 로마 제국 성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000년경에 살았던 성인이나 예언자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로아스터 자신은 스스로 선지자나 특별한 존재로 내세운 적이 없다. 그는 철학자에 가까웠다. 그의 출생 시기나 생애, 구체적인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77세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니체의 철학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이맘 호메이니 탄생 100주년

한 민족이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가. 나는 이란 사람들이 호메이니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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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랍 제국,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커스

메카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메디나 시대를 거쳐 661년 드디어 다마스커스에 최초의 아랍 왕조를 탄생시켰다. 우마이야 왕조(661~750)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파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정치 투쟁이 벌어졌고,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이자 사위였던 알리가 후계 논쟁에서 밀리다가 656년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던 무아위야(재위 661~680) 장군은 3대 칼리파이자 그의 사촌 우스만을 살해한 데 불만을 품고 알리의 칼리파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61년 알리가 극단적인 이슬람 종파인 하와리지에 의해 살해당한 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로 자칭하며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를 새롭게 열었다.

관용과 화합의 상징, 살라딘의 묘 앞에서

다른 출구로 나오니 핑크빛 돔 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술탄이기에 앞서 용기와 지혜, 덕을 겸비한 장군이었던, 십자군 전쟁의 아랍 영웅 살라딘*의 묘다.

유럽이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무슬림과 유대인 등 이교도는 대량 살육을 당했다. 이교도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교황청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말이 성스러운 전쟁이지, 1099년(1차 십자군 전쟁)에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뒤 벌어진 나머지 여덟 차례의 전쟁은 주로 동방 여러 나라나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치고받는 탐욕스러운 약탈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십자군의 포위를 세 차례나 물리치고 성채를 지켰던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다시 힘을 규합해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본거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로, 살라딘은 유럽식 호칭이며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다.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술을 도입하여 1187년 팔레스타인 북동부 하틴(Hattin) 전투에서 십자군을 무찌르고 약 90년 만에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특히 그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가장 강력하고 관대한 왕으로,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187년 10월 2일 금요일,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 살라딘은 성안에 갇혀 보복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몸값 10디나르만 내면 재산을 챙겨 성안을 탈출하도록 허용했다. 살라딘의 관용에 기독교인들은 머리를 숙였고 존경을 표했다.

바로 그 시각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 폭격을 가하고 있고,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살라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강하게 솟구쳐 올랐다.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영광과 좌절을함축적으로 상징하는 도시다.
티그리스강 변의 바그다드는고대 아카드 왕국의 바빌론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크테시폰과 맞닿아 있는 고도 중의 고도다.
이슬람 제국의 번성기라고 할 수 있는압바스 대제국(750~1258)의 500년 수도로서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세계 각지에서 인재가 몰려들었고유프라테스-티스리스강을 끼고 자리한천혜의 입지 덕분에 세상의 물자와 지식, 정보가 넘쳐났다.
이 시기 바그다드는 ‘마디나트 알살람(Madinat al-Salam)‘,
즉 평화의 도시로 불렸다. 바그다드는 오늘날에도 이슬람교시아파의 중심지로, 이웃한 카르발라를 중심으로핵심적인 시아파 성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는 이슬람의 시대였다. 그 중심이 바그다드였다. 유럽이 스스로의 표현대로 ‘암흑의 시대’라는 깊은 질곡에 빠져 있을 때,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과 문명 시대를 열어준 첨단 도시가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10세기 한때 인구 120만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도시로서 당시 인류 문명의 최첨단을 선도해 갔다.

세계 문명을 주도하는 학문의 전당은 ‘바이트 알히크마(Bait ul-Hikma, 지혜의 집)’였다.

도시 안과 밖을 연결하는 4개의 문은 쿠파 문, 호라산 문, 다마스커스 문, 바스라 문으로 명명되었다. 각 성문을 나서면 향하게 되는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카르발라의 비극

바그다드를 이야기하면서 시아파 최대의 성지 카르발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680년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세인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잔혹하게 처형당한 사건이다. 그 장소가 다름 아닌 카르발라였다.

바그다드는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춘 대도시로 우뚝 빛났다. 골목마다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같은 공간이 들어섰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바자르(시장)가 있어 상품과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유로움이 가져다주는 해학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주요 무대가 된 것도 이 시기의 번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1401년 티무르가 동방 원정 과정에서 바그다드를 공격함으로써 또 한 번 참상을 겪었다. 이때 약 2만여 명의 바그다드 시민이 학살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바그다드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는 사원도, 신도도 없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시장도 열리지 않는다. 야자수 대부분은 말라비틀어졌다. 이곳은 이제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다." 아랍 역사학자 알 마크리지(Al-Maqrizi, 1364~1442)의 전언이다. 이제 바그다드는 이 도시를 탐하는 수많은 왕조를 위한 보급기지나 지방 소도시로 전락했다.

1001일 밤이나 계속되는 《천일야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년은 바그다드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만큼 매력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도시다. 《천일야화》의 주무대는 바그다드이지만, 스토리 콘텐츠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대표하는 토후국이자 국제무역 중심 도시이지만 석유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하던 자그마한 어촌이 반세기 만에 최고의 첨단 창의 도시로 우뚝 섰다.
두바이에는 3개의 브랜드만 존재한다.
"The Best, The Most, The First."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라는 세 브랜드만으로 지구촌이 부러워하는21세기 개혁 도시 모델을 창출해냈다.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카타르 등 다른 아랍 왕정 산유국들은두바이 성공을 모델로 삼아 미래 도시를 설계해나가고 있다.
두바이 성공의 배경에는 ‘오아시스 싱크탱크‘로 불리는 2000여 명의 글로벌 브레인이 창안해내는 탁월한 콘텐츠도 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매직 리더십의 주인공 무함마드 막툼 왕세자의 헌신과 역할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술과 돼지고기가 허용되는 아랍 도시

슈퍼마켓에서는 술을 팔고 고급 호텔 레스토랑 뷔페 코너에서는 돼지고기 음식이 나온다. 다른 문화와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라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이 정상일 리는 없어 보인다. 두바이가 더 이상 아랍 도시가 아니라 글로벌 도시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전통시장에서 만나는 또 다른 두바이

아랍 커피의 본산지에 왔으니 쓰디쓴 모카커피 오리지널 한 잔 마셔보고 싶으나, 스타벅스 커피와 인스턴트 커피에 밀려 어느 카페에서도 튀르키예 커피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카르다몸과 향을 섞어 우려낸 은은한 아랍 커피로 기분을 돋우며 다시 무더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텐트를 칠 공간마저 부동산 개발로 빼앗긴 두바이 사람들은 모래 대신 아파트의 화려한 카펫 위에서 전혀 새로운 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꿈속에서나마 신드바드 꿈을 꾸면서 옛날을 희미하게 기억하려나?

오만은 아프리카와 유럽, 인도양을 잇는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고대에 이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주도한 민족은 예멘인이었다.
‘솔로몬과 시바‘로 유명한 시바국의 여왕은 현재 예멘의 수도인사나 근처에 도읍해 해상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장미수, 안식향, 유향을 비롯한 진귀한 향료와 모카커피는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오만의 주요 교역품이다.
오만인은 선박 제조 기술을 개발해 8~9세기경 아랍인이 주도하는해양 교통 혁명을 일으켜 동서의 만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뛰어난 항해 기술과 앞선 과학 문명을 바탕으로한반도 신라에까지 진출했다.
무엇보다 오만은 세계 최대의 최고급 유향 산지다.
아라비아반도 남쪽, 인도양을 바라보는오만의 항구 살랄라에는 향료 냄새가 그득하다.
살랄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인천에서 두바이까지 가서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한 후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물론 시간이 되면 육로도 가능하지만12시간이 넘게 걸린다. 살랄라 도심을 벗어나사막으로 몇 시간 낙타를 타고 들어가야 비로소유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메마른 사막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습기를 머금어 생존을 유지한다.
유향나무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수액이 응고된 것이 유향이다.
날카로운 금속 끝으로 나무껍질을 가볍게 벗겨내니우유 같은 하얀 수액이 망울망울 맺힌다.
송진 같은 독특한 향이 은은하게 코에 스며든다.

살랄라는 한때 고대 로마나 오늘의 뉴욕처럼 번성했던 세계적 교역 도시였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인도에서 출발해 로마와 지중해로 흐르는 향료의 젖줄은 살랄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곳의 유향과 몰약이 인도에서 몰려오는 육계, 후추, 육두구, 정향, 백단향 같은 다양한 향료와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런 점에서 살랄라는 인류의 입맛과 의약품, 삶의 형태를 뒤바꾼 문화혁명의 진원지였다.

신라 사찰을 정화한 아라비아 유향

유향은 신라에도 전해졌다. 불교 사찰에서 향불이 널리 쓰이면서 향료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인류 역사는 오랫동안 향료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교역과 전쟁의 시기를 맞게 된다. 금에 맞먹는 향신료를 찾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험난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를 찾아 나섰다.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고대 오만은 조선술의 선진국이었다. 교역의 지역답게 수르(Sur) 항구에서는 일찍부터 교역선 제조가 발달했다. 오만은 신드바드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향 교역으로 출발한 국제 경제 경험과 비즈니스 노하우로 주변 아랍 국가와 로마는 물론 인도와 멀리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튀르키예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표현했다.
최근까지 연구된 결과와 학문적 결실을 종합해보면토인비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제국과 수많은 군소 왕국이 거쳐가면서 이스탄불은그야말로 지구 속의 작은 지구, 고대-중세의코즈모폴리턴이었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베야지트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안에인류가 이룩한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히타이트, 프리기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그리스·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진수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는 한 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일생에 딱 한 번 여행할 수 있다면,이스탄불!

가보고 싶은 곳이 참으로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꿈꾸기 어려웠던 세상 구경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볼 수도 없다. 일생에 딱 한 곳을 갈 수 있다면 단연 이스탄불이다. 주저없이 나는 이스탄불을 추천한다. 그곳은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요람인 메소포타미아에 오리엔트 문화가 깊이 뿌리 내린 곳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틴-셀주크-오스만 제국 등이 연이어 화려한 꽃을 피운 무대다. 인류 문명 5000년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과거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유적이 있고, 자연이 있다.

육상 실크로드의 끝이고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곳에서 동방 상인들에게 건네졌다. 떠들썩한 흥정과 환락과 사치가 있었고, 전 세계 미녀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 그리하여 피부색이 다른 각양의 민족, 수많은 종교와 사상, 신화가 이스탄불이라는 용광로에서 하나가 되어 공존과 화해라는 문화를 일구어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로마의 새 수도로 정하면서 화려한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태어나게 된다. 1000년간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이자 세계 부의 상징이었던 인구 100만의 콘스탄티노플이 만들어낸 문화유산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로마 교회(그리스 정교)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이 도시는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결국 성문 열쇠를 내주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처연하게 결사 항전하며 자신의 모든 영예를 마쳤지만 오갈 데 없는 시민들은 새로운 술탄을 맞아 일상을 이어가야만 했다.

1935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성 소피아 성당 특별법’에 의해 박물관으로 선포하면서 정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번뜩이는 꾸란 장식 뒤로 회칠을 벗겨낸 장엄한 기독교 성화들이 찬연한 금빛을 발하고 있다.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관용의 미덕 앞에 독선에 빠진 현대인은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성 소피아는 2020년 7월 10일, 또다시 정치적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슬람 성향이 강한 튀르키예 정부가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모스크로 개조하고 이슬람식 종교의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시간 이외에 외부인의 관람을 허용하고 성당 내 기독교 유물을 보호하고는 있지만 성 소피아 성당은 다시 한번 역사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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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루살렘만큼 폭력과 전쟁으로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한국인이 성지순례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는 기적을 보여주신 절절한 장소들, 특히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묘교회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가 간절하다.
애환과 눈물이 가득하다.
예루살렘은 박해와 고통의 유랑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유대인의 영적인 고향이다. 인류의 원죄를 혼자서 짊어지고만민평등과 보편구원이라는 인류 최고 최대의가르침을 희생으로 증거한 예수의핏빛 고난의 발자취가 영롱한 체취로 되살아나는 성소다.
621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밤중 메카에서예루살렘으로 날아와서 이곳에서 승천해서신을 만나고 이슬람이란 종교를 구체화한다.
3대 일신교의 소중한 성지에서 방문객은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한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회개의 공간이다.

평화의 개념은 고대 가나안 지방의 신인 샬림 (Shalim)을 모시는신전에서 유래했고, 성경에서는 ‘예루샬라임 (Yerushalaim)‘이라는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랍어 알꾸두스(Al Qudus)는 ‘신성한 도시‘라는 뜻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아!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현을 연주할 수 없어도 좋다네.

내 생각, 내 기억에서 네가 잊혀진다면

내 혀가 굳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어도 좋다네.

(<시편> 136: 1-6)

이슬람의 예루살렘 형성과 의미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성지다. 이슬람의 역사적 전승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621년경 신의 부름을 받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꿈의 여행(이스라isra)을 하고 승천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내려온 사건(미라즈mi’raj)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 예루살렘의 가장 상징적인 종교 유적은 단연 황금색 돔이빛나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압둘말리크 왕에 의해 건축되었다. 무슬림들은 이곳이 무함마드가 신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 장소라고 믿는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번제로 바쳤던 자식이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그 자식이 이스마엘로 바뀌어 있다. 이슬람에서는 장자의 개념을 앞세우고 기독교에서는 적자의 적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1099년, 예루살렘은 결국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서양사에서는 이를 1차 십자군 전쟁이라고 한다. 실상은 성전(聖戰)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잔혹한 학살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던 주민들(대부분 무슬림과 유대인)은 남김없이 학살당했다.

예루살렘은 88년간의 기독교 지배를 종식하고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장군(1137~1193)에 의해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끔찍한 보복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던 성안의 기독교인들은 놀라운 관용을 경험했다. 폭력이나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정한 세금을 내고 모든 재산과 소지품을 챙겨 떠날 수 있었고, 머물러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생명과 재산, 예배 장소를 보장해주었다. 살라딘이 이슬람 역사에서보다 유럽 역사에서 크게 칭송받는 배경이다.

그 후에도 일시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12세기 이후 예루살렘은 줄곧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516년 셀림 1세의 점령 이후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이슬람식 이름이다. 솔로몬의 신전을 또 다른 이슬람의 솔로몬(술레이만)이 복원하고 정비했다는 것도 역사의 매력이다.

이슬람과 유대교라는 두 이질적인 종교와 민족이 1000년 이상 공생해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아랍과 유대인이 서로 반목하고 화합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돌변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이니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장한 분열과 갈등의 불행한 산물이다.

국제법상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하에 두는 완충 도시인데 이스라엘이 이를 위반하고 미국이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2세가 일찍이 주창한 대로 예루살렘은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일신교의 공동 성지로서 공존과 화해의 상징 도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성채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4개로 나뉜 구역에서 각각의 신앙과 의례,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수천 년간 살아가고 있다. 성안은 무슬림 구역, 크리스천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유대교 구역으로 구분된다. 편의상 구분일 뿐 거주민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이스라엘 당국이 문제다. 20세기 이후 정치적 시오니즘에 물들어 "모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자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갈등과 분쟁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영적 고향으로 남아 있어야 할 팔레스타인 땅을 현실적으로 되찾아야 할 국가 건설지로 치환하면서 모든 비극이 잉태되었다.

"저 앞마당에서 우리는 함께 공차고 놀았어요. 친구가 유대인인지, 아르메니아인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죠. 그저 깔깔대고 웃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함께 놀던 친구들이었으니까요."

다마스커스"는 여전히 많이 아프다.
아랍 민주화 시위 이후 2011년부터 시작된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와1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삶의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이제 겨우 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이 러시아와 이란 등의 지원으로정권 연장에 성공했고, 민주화와 개방을 꿈꾸던국가의 미래는 상당 부분 후퇴하게 되었다.
다마스커스는 최초의 아랍 왕조인 우마이야 시대의 수도였고,
가장 아랍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많은 이슬람의 역사적 성소가 자리하고 있어서이곳을 찾아오는 무슬림 순례자들에게 다마스커스는
‘낙원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꿈의 도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종교적 애틋함은 중세 에스파냐 출신의 무슬림 여행가이븐 주바이르(Ibn Zubayir, 1145∼1217) 의 여행기 《리흘라>에서도생생하게 전달된다. "진정한 낙원이 천국에 있다면,
지상의 낙원은 틀림없이 다마스커스일 것이다."
성스러움이 깃든 카시온 산에 올라 다마스커스를 내려다보면800년 전 이븐 주바이르의 탄성이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 표준 외국어 표기법에서는 현지어대로 적는 원칙에 따라 ‘다마스쿠스‘로 표기한다고 돼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현지어로는 디마스크, 시리아 지역은 샴이라 불린다. Damascus는라틴어(영어식 표기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마스커스로 읽어야 한다. 이를 다마스쿠스로읽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공존과 화해를 실천한 중동의 진주  
다마스커스는 비잔틴 제국의 아시아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중동의 대표적인 종교 공존의 도시다. 지금은 전쟁과 폐허의 연기만이 자욱하지만, 오랜 역사와 문명이 중첩되어 있고, 공존과 화해라는 덕목을 실천한 ‘중동의 진주’다. 그만큼 수많은 스토리와 다양성이 켜켜이 쌓인 향기롭고 영롱한 도시다. 5000년 전 고대 인류 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었던 도시다.

역사적으로 다마스커스는 지중해와 아라비아 사막의 내륙을 잇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북의 물류가 거쳐가는 전략적인 요충지였기에 5000년 오리엔트 역사에서 항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일상으로 만나는 문화 접점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우리는 똑같은 아랍인이고 시리아인이에요. 내 모국어는 아랍어이고 내 조국은 시리아죠. 무슬림은 내 형제이고 내 이웃이에요. 그래서 정숙의 상징인 히잡은 나에게도 정숙의 상징이죠."

눈물 나도록 고맙고 감동적인 말이었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야만과 탐욕의 시대에, 그 소녀의 마음은 영롱한 여름 석류와도 같았다.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다마스커스를 인류의 큰 스승으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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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꿈행자

수학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 간의 관계를 다룬다.
-푸앵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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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앵카레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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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2-08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라이트 쎈에 저런 문구가 써 있나요?^^ 와! 멋진 말이네요.
사물이 아닌 사물관의 관계라..


bookholic 2024-02-1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이 싫어하는, 집에서 자주 보이는 책을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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