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버댐과 헬도라도 퀸 축제 1931년은 라스베이거스 발전에 기폭제가 된 역사적인 해였다.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했고, 이혼 필요조건으로서 거주하는 기간을 6주로 단축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그해에 후버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라스베이거스 인구는 순식간에 5,000명 정도에서 2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가족이 없는 남자들이어서 대규모 유흥 시설이 필요했다. 라스베이거스 사업가들과 마피아 큰손들은 카지노와 쇼걸 극장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후버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부 사람들 사이에서 라스베이거스는 남자들의 환락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호텔-카지노와 ‘원자폭탄’의 도시 후버댐 성수기는 지났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라스베이거스는 계속 성황을 이루었다. 1941년 후반에 라스베이거스에 육군 공항이 완공되었다. 1만 1,000명의 장교들과 약 5,000명의 조종사 훈련생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렀다. 1950년 이곳은 넬리스 공군기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60차례의 주요 공중전에 참전했던 윌리엄 넬리스 중위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951년부터 라스베이거스는 원자폭탄 실험 장소로 유명하게 되었다. 원자폭탄 관련 실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북서쪽으로 10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었는데, 폭탄이 투하된 후 피어오르는 버섯 모양의 구름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1963년부터 실험이 지하로 들어가서 더 이상 버섯구름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라스베이거스는 한동안 ‘원자폭탄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최고의 휴가지가 되었다. 주변의 그랜드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2008년에 발표된 흥미로운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1,100명의 라스베이거스 방문객이 사망하는데 그중 15퍼센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이미 라스베이거스 도시 자체도 ‘미국의 자살 수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데, 이는 외부 방문객의 자살률까지 더해진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랫동안 ‘죄악의 도시’로 알려졌다. 도박과 술, 마약 등 각종 성인 유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스트립 거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뒤에 숨겨진 라스베이거스의 어둠이 미국 자본주의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미친 말’과 커스터의 전설적인 대결, 리틀 빅혼 전투
1874년, 사우스다코타의 검은 언덕Black Hills에서 금이 발견됐다. 서부 개척 시대에 금이란 황무지를 순식간에 노다지로 바꿔 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검은 언덕도 마찬가지였다. 언덕의 입구에 위치한 래피드시티는 전국에서 몰려든 야심가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백인들이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땅과 인디언들을 유린했다. 라코타 부족은 연방 정부가 약속을 깨고 그들을 쫓아내려 한다며 결사 항쟁의 의지를 보였다. 이것이 1876년부터 2년간 계속된 ‘위대한 수족의 전쟁’이었다.
1876년 6월 25일~26일 ‘미친 말(크레이지 호스)’이 이끄는 수족 전사들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연방군 간에 전설적인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졌다. 예상을 뒤엎고 ‘미친 말’의 대승이었다. 600명 규모의 커스터의 군대 중 무려 268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커스터도 포함되었다. 미국 역사상 인디언 최대의 승리로 기억되는 전투이다.
운디드니 학살 사우스다코타 수족의 운명은 결국 미국 대평원에서 벌어진 최악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1890년 12월 9일, 미국 기병대는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던 수족을 무장 해제하려고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젊은 전사 ‘검은이리’는 총을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그 과정에서 한 발의 총알이 발사되고 말았다. 기병대는 인디언들이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약 300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했다. 기병대는 큰 구멍을 파서 인디언 사망자 시체들을 몰아넣었고, 부상자들을 방치한 채 떠나 버렸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눈발이 휘날리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 하나둘 동사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큰 발 추장’도 포함되었다.
래피드시티는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인디언들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서부 사우스다코타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만약 래피드시티를 방문해서 한 곳만을 둘러본다면 어디를 갈까.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마운트 러시모어를 갈지, 좀 더 서쪽으로 가서 미친 말 기념지로 갈지, 아니면 남쪽으로 가서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둘러볼지. 미국 서부 개척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보려면 가능하면 이 모든 곳을 다 봐야 할 것이다.
환상의 지역으로만 남겨진 불모지 1540년, 스페인의 코로나도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가 이끄는 탐험대가 유타 남부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이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적인 시볼라Chibola의 ‘7개의 도시’ 중 일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금은 없었다. 백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랜드캐니언과 콜로라도강을 탐험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776년 도밍구에즈Atanasio Domínguez와 에스카란테Silvestre Vélez de Escalante 두 명의 가톨릭 사제가 이끄는 원정대가 산타페를 떠나 캘리포니아 해안 몬트레이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유타를 탐험했다. 그들은 북쪽 유타 호수까지 갔지만 다시 되돌아갔다. 대부분이 사막 불모지인 데다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몬교도의 성지가 된 솔트레이크시티 본격적으로 유타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미국 서부 개척사에서 가장 독특한 그룹이었다. 바로 말일 성도 그리스도, 이른바 ‘모르몬교’ 신자들이다. 유타와 솔트레이크시티를 얘기할 때 이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연방 주로 편입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그렇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나는 유타 준주가 오랫동안 연방에 편입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였고, 그중에서도 그들이 오랫동안 실행하고 있었던 일부다처제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유타 준주를 연방에 가입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77년 브리검 영이 사망한 이후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연방 정부의 일부다처제 폐지에 대항해서 투쟁했고, 이는 유타가 계속 연방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1890년 9월 모르몬교회 회장인 윌포드 우드러프가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 1896년에 드디어 연방의회는 유타를 연방의 마흔다섯 번째 주로 받아들였다.
종교적으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분명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티 크리크 센터가 보여 주듯이 그곳은 미국적 자본주의가 깊게 배어 있는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영토가 된 에스키모의 땅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5,000년 전에 알루티크 에스키모Alutiiq Eskimos 부족이 카약을 타고 현재의 알래스카에 건너왔다. 서기 500년경에 알래스카 남부에 정착했던 에스키모족은 추가치 알루티크Chugach Alutiiq였는데, 그들은 알래스카 중앙의 산길을 통해 디나이나 아타바스칸스Dena’ina Athabaskans 에스키모가 들어오면서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다. 디나이나족은 정해진 정착지가 없었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연안의 개울과 강을 따라 낚시를 하고, 초가을에는 큰사슴과 산양을 사냥하고, 늦가을에는 열매를 땄다.
알루티크 에스키모들은 그곳을 알래스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본 땅Mainland’이고 의미는 ‘바다가 향하는 곳’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동쪽 끝에 연결되는 반도라고 생각해서 ‘알래스카반도’라고 불렀는데, 이를 알래스카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미국이 매입한 ‘얼어붙은 황무지’ 알래스카는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관심도 크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은 알래스카를 팔아 버리려고 했고 1867년에 미국에 팔았다.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H. Seward의 노력으로 미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매입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거래를 ‘수어드의 어리석음’이라고 비웃었지만 수어드는 알래스카 매입을 성사시켰다. 그는 미국의 향후 운명이 태평양에 있다고 보았고, 그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알래스카를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알래스카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알래스카 골드러시 ‘혹시 금이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하는 기대는 얼마 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1880년에 주노에 가까운 지역인 실러보 유역과 더글러스섬에서 금이 발견되더니 몇 년 사이를 두고 계속 알래스카와 인근 캐나다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1896년 알래스카와 인접한 캐나다 북서부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이른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1896년에서 1899년 사이에 약 10만 명의 광부들이 클론다이크 지역으로 이주했다.
세계 운송의 허브가 된 앵커리지 앵커리지는 그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송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앵커리지에서 뉴욕, 도쿄, 그리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는 거의 같은 거리이다. 전 세계의 선진 산업국가들은 앵커리지에서 항공으로 열 시간 이내로 연결된다. 특히 냉전 시기에 앵커리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알래스카는 면적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주로서, 그다음으로 큰 3개 주(텍사스, 캘리포니아, 몬태나)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총면적을 갖고 있다. 인구로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주이며, 인구가 가장 분산되어 있는 주이기도 하다. 2022년 알래스카 인구는 72만여 명이고, 약 절반이 앵커리지 대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앵커리지는 미국의 ‘마지막 프런티어’라고 불리는 알래스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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