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이 권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 세워진 나라는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배반당한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한韓이다.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 하나였던 한이 마한과 진한과 변한으로 갈라진 것인지, 아니면 한이 곧 마한이며 진한과 변한은 별도로 형성된 것인지, 아예 준왕의 남하설 자체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등이 모두 불분명하다. 아무튼 그 시점에 한강 남쪽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다면 구석기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 짓고 살아온 강동구 권역은 뭐가 되었든 한 나라의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단순한 토성이었든 목책을 높이 올려 방어력을 높인 것이든, 공성기기를 갖춘 대군의 집중 공격에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결과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풍납토성의 남은 부분에서 불에 심하게 탄 것 같은 곳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공성전의 흔적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북성이 풍납토성이자 위례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므로, 위례성이 견디지 못할 것 같자 개로왕이 몽촌토성으로 헐레벌떡 도망쳤지만 그 성도 함락되면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혔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중심에서 한반도의 중심이 되다
지금의 서울 지역은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한주는 너무 넓은 땅을 대충 하나로 묶은 변방 지대였고, 군사적 중심지인 중원경中原京은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지금의 충주에 들어섰다. 그래서 고구려가 위례성을 무너뜨린 5세기 말부터 10세기 초까지 서울은 역사적 암흑기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 조정은 3경 체제를 유지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1308년에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했다. 한양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부터 한양군으로 불렸다고 하나, 이때부터 널리 쓰였다. 다시 원나라가 기울어지며 반원 정책을 쓰자 세력 판도를 바꿔보려는 군주가 으레 그러하듯 공민왕이 한양 천도를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1390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대에 와서 실현되지만 불과 반년도 못 채우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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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댐과 헬도라도 퀸 축제
1931년은 라스베이거스 발전에 기폭제가 된 역사적인 해였다.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했고, 이혼 필요조건으로서 거주하는 기간을 6주로 단축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그해에 후버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라스베이거스 인구는 순식간에 5,000명 정도에서 2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가족이 없는 남자들이어서 대규모 유흥 시설이 필요했다. 라스베이거스 사업가들과 마피아 큰손들은 카지노와 쇼걸 극장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후버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부 사람들 사이에서 라스베이거스는 남자들의 환락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호텔-카지노와 ‘원자폭탄’의 도시
후버댐 성수기는 지났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라스베이거스는 계속 성황을 이루었다. 1941년 후반에 라스베이거스에 육군 공항이 완공되었다. 1만 1,000명의 장교들과 약 5,000명의 조종사 훈련생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렀다. 1950년 이곳은 넬리스 공군기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60차례의 주요 공중전에 참전했던 윌리엄 넬리스 중위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951년부터 라스베이거스는 원자폭탄 실험 장소로 유명하게 되었다. 원자폭탄 관련 실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북서쪽으로 10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었는데, 폭탄이 투하된 후 피어오르는 버섯 모양의 구름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1963년부터 실험이 지하로 들어가서 더 이상 버섯구름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라스베이거스는 한동안 ‘원자폭탄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최고의 휴가지가 되었다. 주변의 그랜드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2008년에 발표된 흥미로운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1,100명의 라스베이거스 방문객이 사망하는데 그중 15퍼센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이미 라스베이거스 도시 자체도 ‘미국의 자살 수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데, 이는 외부 방문객의 자살률까지 더해진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랫동안 ‘죄악의 도시’로 알려졌다. 도박과 술, 마약 등 각종 성인 유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스트립 거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뒤에 숨겨진 라스베이거스의 어둠이 미국 자본주의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미친 말’과 커스터의 전설적인 대결, 리틀 빅혼 전투

1874년, 사우스다코타의 검은 언덕Black Hills에서 금이 발견됐다. 서부 개척 시대에 금이란 황무지를 순식간에 노다지로 바꿔 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검은 언덕도 마찬가지였다. 언덕의 입구에 위치한 래피드시티는 전국에서 몰려든 야심가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백인들이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땅과 인디언들을 유린했다. 라코타 부족은 연방 정부가 약속을 깨고 그들을 쫓아내려 한다며 결사 항쟁의 의지를 보였다. 이것이 1876년부터 2년간 계속된 ‘위대한 수족의 전쟁’이었다.

1876년 6월 25일~26일 ‘미친 말(크레이지 호스)’이 이끄는 수족 전사들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연방군 간에 전설적인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졌다. 예상을 뒤엎고 ‘미친 말’의 대승이었다. 600명 규모의 커스터의 군대 중 무려 268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커스터도 포함되었다. 미국 역사상 인디언 최대의 승리로 기억되는 전투이다.

운디드니 학살
사우스다코타 수족의 운명은 결국 미국 대평원에서 벌어진 최악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1890년 12월 9일, 미국 기병대는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던 수족을 무장 해제하려고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젊은 전사 ‘검은이리’는 총을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그 과정에서 한 발의 총알이 발사되고 말았다. 기병대는 인디언들이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약 300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했다. 기병대는 큰 구멍을 파서 인디언 사망자 시체들을 몰아넣었고, 부상자들을 방치한 채 떠나 버렸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눈발이 휘날리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 하나둘 동사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큰 발 추장’도 포함되었다.

래피드시티는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인디언들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서부 사우스다코타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만약 래피드시티를 방문해서 한 곳만을 둘러본다면 어디를 갈까.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마운트 러시모어를 갈지, 좀 더 서쪽으로 가서 미친 말 기념지로 갈지, 아니면 남쪽으로 가서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둘러볼지. 미국 서부 개척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보려면 가능하면 이 모든 곳을 다 봐야 할 것이다.

환상의 지역으로만 남겨진 불모지
1540년, 스페인의 코로나도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가 이끄는 탐험대가 유타 남부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이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적인 시볼라Chibola의 ‘7개의 도시’ 중 일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금은 없었다. 백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랜드캐니언과 콜로라도강을 탐험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776년 도밍구에즈Atanasio Domínguez와 에스카란테Silvestre Vélez de Escalante 두 명의 가톨릭 사제가 이끄는 원정대가 산타페를 떠나 캘리포니아 해안 몬트레이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유타를 탐험했다. 그들은 북쪽 유타 호수까지 갔지만 다시 되돌아갔다. 대부분이 사막 불모지인 데다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몬교도의 성지가 된 솔트레이크시티
본격적으로 유타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미국 서부 개척사에서 가장 독특한 그룹이었다. 바로 말일 성도 그리스도, 이른바 ‘모르몬교’ 신자들이다. 유타와 솔트레이크시티를 얘기할 때 이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연방 주로 편입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그렇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나는 유타 준주가 오랫동안 연방에 편입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였고, 그중에서도 그들이 오랫동안 실행하고 있었던 일부다처제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유타 준주를 연방에 가입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77년 브리검 영이 사망한 이후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연방 정부의 일부다처제 폐지에 대항해서 투쟁했고, 이는 유타가 계속 연방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1890년 9월 모르몬교회 회장인 윌포드 우드러프가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 1896년에 드디어 연방의회는 유타를 연방의 마흔다섯 번째 주로 받아들였다.

종교적으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분명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티 크리크 센터가 보여 주듯이 그곳은 미국적 자본주의가 깊게 배어 있는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영토가 된 에스키모의 땅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5,000년 전에 알루티크 에스키모Alutiiq Eskimos 부족이 카약을 타고 현재의 알래스카에 건너왔다. 서기 500년경에 알래스카 남부에 정착했던 에스키모족은 추가치 알루티크Chugach Alutiiq였는데, 그들은 알래스카 중앙의 산길을 통해 디나이나 아타바스칸스Dena’ina Athabaskans 에스키모가 들어오면서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다. 디나이나족은 정해진 정착지가 없었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연안의 개울과 강을 따라 낚시를 하고, 초가을에는 큰사슴과 산양을 사냥하고, 늦가을에는 열매를 땄다.

알루티크 에스키모들은 그곳을 알래스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본 땅Mainland’이고 의미는 ‘바다가 향하는 곳’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동쪽 끝에 연결되는 반도라고 생각해서 ‘알래스카반도’라고 불렀는데, 이를 알래스카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미국이 매입한 ‘얼어붙은 황무지’
알래스카는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관심도 크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은 알래스카를 팔아 버리려고 했고 1867년에 미국에 팔았다.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H. Seward의 노력으로 미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매입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거래를 ‘수어드의 어리석음’이라고 비웃었지만 수어드는 알래스카 매입을 성사시켰다. 그는 미국의 향후 운명이 태평양에 있다고 보았고, 그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알래스카를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알래스카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알래스카 골드러시
‘혹시 금이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하는 기대는 얼마 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1880년에 주노에 가까운 지역인 실러보 유역과 더글러스섬에서 금이 발견되더니 몇 년 사이를 두고 계속 알래스카와 인근 캐나다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1896년 알래스카와 인접한 캐나다 북서부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이른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1896년에서 1899년 사이에 약 10만 명의 광부들이 클론다이크 지역으로 이주했다.

세계 운송의 허브가 된 앵커리지
앵커리지는 그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송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앵커리지에서 뉴욕, 도쿄, 그리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는 거의 같은 거리이다. 전 세계의 선진 산업국가들은 앵커리지에서 항공으로 열 시간 이내로 연결된다. 특히 냉전 시기에 앵커리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알래스카는 면적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주로서, 그다음으로 큰 3개 주(텍사스, 캘리포니아, 몬태나)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총면적을 갖고 있다. 인구로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주이며, 인구가 가장 분산되어 있는 주이기도 하다. 2022년 알래스카 인구는 72만여 명이고, 약 절반이 앵커리지 대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앵커리지는 미국의 ‘마지막 프런티어’라고 불리는 알래스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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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개봉된 영화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은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로 시애틀은 낭만적인 도시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노숙자와 범죄, 그리고 주택난과 교통난 등으로 현재 시애틀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잠 못 이루는 도시’로 변해 가고 있다.

예르바 부에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1769년 포톨라Don Gaspar de Portolá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록상으로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유럽인들이었다. 현재의 프리시디오 샌프란시스코에 소규모 군대가 주둔했고, 미션 돌로레스에 선교사들이 기거했다. 그들과 맞닥뜨린 원주민들은 올로니족의 옐라무 부족으로서 유럽인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지진과 대공황을 극복한 기적의 도시
1906년 4월 18일 새벽에 리히터 규모 8.3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샌프란시스코와 북부 캘리포니아를 강타했다. 지진과 지진에 따른 화재로 도시의 4분의 3이 무너지거나 불에 타 버렸다. 특히 도심은 80~90퍼센트가 잿더미로 변했다.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 인구 40만 명의 절반 이상이 집을 잃었으며, 집을 잃은 이들은 골든게이트 공원, 프리시디오, 해변 등의 임시 거처에서 기거했다. 상당수는 이스트 베이로 이사를 했고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로스앤젤레스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골든게이트 브리지 인근에 골든게이트 공원이 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원이다. 그 공원을 덮고 있는 수많은 노숙자 천막들이 미국 자본주의의 어둠을 대변하고 있다.

인디언, 스페인, 멕시코의 작은 마을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은 통바Thongva 부족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5,000년 전부터 로스앤젤레스강 서쪽과 국도 101번 도로 아래에 위치한 현재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스페인 미션이 설립될 당시 5,000명 정도의 통바 부족이 살고 있었다.

1781년 네베Felipe de Neve는 로스 포블라도레스Los Pobladores로 알려진 44명의 정착민 그룹과 함께 지금의 로스앤젤레스를 건설했다.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천사의 여왕의 도시El Pueblo de Nuestra Señora la Reina de los Angeles’라고 불렀다.

미국인 개척자들과 멕시코 전쟁, 그리고 골드러시

동부에서 건너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샌프란시스코와 북부의 광산 마을에서 쫓겨난 도박꾼, 무법자, 매춘부들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채우면서 도시는 ‘서부에서 가장 거친 무법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멕시코인에 대한 린치는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1850년과 1870년 사이에 폭도들은 약 서른다섯 번의 멕시코인 린치를 가했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수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 1847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10만 명당 평균 158명(연간 13명)의 살인이 발생했다. 이는 뉴욕의 연간 살인율의 열 배에서 스무 배에 해당한다. 로스앤젤레스는 서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치안이 불안한 대표적인 도시로 오명을 얻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소유자이자 토지 개발자였던 해리 챈들러가 1923년 부동산 홍보용으로 할리우드라는 거대 간판을 내걸었다. 1년 반 정도만 세워 놓고자 했는데 할리우드 주민들이 간판이 맘에 들어 그대로 놔두도록 했다. 이후 할리우드 간판은 몇 번의 보강 공사를 거쳐서 지금까지 미국과 전 세계에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간판이 되었다.

스페인 신부들의 마을로 시작한 캘리포니아 최초의 정착촌
8,000여 년 전부터 산데이기이토San Deiguito와 라호야La Jolla 부족이 지금의 샌디에이고 지역에 살았다. 유럽인들과 최초로 마주하게 된 샌디에이고 원주민은 쿠메야이Kumeyaay 부족으로 서기 1,000년경에 샌디에이고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602년 11월, 비스카이노Sebastián Vizcaíno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돌아오는 스페인 함대의 기착지를 위해서 캘리포니아 해안 탐사를 시작했다. 비스카이노는 세 척을 이끌고 탐사에 나섰는데 기함의 이름이 샌디에이고였다. ‘샌디에이고 데 알칼라’로 더 잘 알려진 가톨릭 성자 디다쿠스의 이름을 따서 샌디에이고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쿠메야이의 타격도 컸다. 1769년에 3만 명 규모였던 쿠메야이는 1846년 멕시코 통치가 끝날 때까지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더욱 줄어들어서 1890년에는 900명 미만이 되었다.

천혜의 자연과 기후, 안정된 치안, 해군기지와 방위산업, 생명공학 산업, 수많은 관광 인프라 등으로 말미암아 샌디에이고는 대형 도시 중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은퇴지가 되었다. 샌디에이고는 미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미국의 대형 도시들이 겪고 있는 도심의 문제들을 심하게 겪고 있지 않다. 인구 200만 명 이상의 도시들 중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다. 샌디에이고는 밤에 돌아다녀도 비교적 안전한 도시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리베라와 프리몬트, 그리고 브리검 영의 개척지
라스베이거스 인근에 남겨진 암각화로 추정하건대 1만 년 전부터 유목민 원주민들이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전에는 투디뉴족이 콜로라도강 남부 계곡과 네바다, 캘리포니아, 유타의 모하비사막의 산과 협곡에서 생활했다. 투디뉴의 의미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로서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거주했던 주요 부족인 파이우트들의 조상이다.

2주 후에 라스베이거스 스프링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을 라스베이거스라 명명했다. ‘목초지’라는 뜻이다. 스프링스 인근의 비옥한 땅에 자라는 야생 목초들을 보고 지은 이름이었다. 지금도 라스베이거스 일대에는 리베라를 기리는 수많은 길, 공원, 건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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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정복자들의 대결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정착하던 여러 푸에블로 인디언 중 한 부족이었던 타노아족은 서기 900년 이후부터 현재의 산타페 시내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오그란데강의 지류인 산타페강은 교역과 이동 등 지리적으로 그들 삶의 중심지였다. 산타페 지역 푸에블로 인디언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부족인 나바호족과 아파치족의 조상은 서기 1400년경 캐나다 북서부와 알래스카 동부에서 남서부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디언과 유럽인들의 행로에서 미국의 행로가 된 산타페 행로
‘재정복’ 이후 스페인과 인디언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스페인 정부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지위와 안전을 약속했고, 인디언들 역시 뉴멕시코 정착민들과 평화롭게 교역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 말미암아 산타페는 세인트루이스의 촉타우 부족들과의 모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803년 미국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할 당시에도 산타페는 세인트루이스와의 모피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고 있었다.

1840년대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 미국의 서부 팽창의 슬로건이 되면서 자유 토지를 소유할 기회를 찾는 정착민들은 남서부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산타페 행로는 이들 이주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1846년 멕시코와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인들은 뉴멕시코도 ‘명백한 운명’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대부분의 뉴멕시코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계속된 ‘명백한 운명’의 기치에 따라 남부 대륙횡단철도 건설 계획이 세워졌다. 1853년 미국은 뉴멕시코의 남은 남서쪽 영토와 애리조나의 남부 영토를 매입했다.

‘명백한 운명’의 버림받은 개척지
‘명백한 운명’은 뉴멕시코에서 이중적인 운명을 맞았다.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뉴멕시코를 차지하자 미국인들은 이것이 ‘명백한 운명’의 당연한 결과라고 자축했다. 하지만 뉴멕시코를 연방에 합병시키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 아니라고 보았다.

1848년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뉴멕시코가 미국의 영토가 되자 다음 해에 뉴멕시코 대표자들은 준주의 대표 자격으로 연방의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방의회는 그들을 거부했다. 다음 해에 뉴멕시코는 정식으로 준주 헌법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 정부는 그 헌법을 거부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뉴멕시코에 여전히 스페인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기에 진정한 미국의 영토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1850년 타협’이 통과되면서 뉴멕시코의 준주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뉴멕시코가 준주의 자격을 갖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 대 노예주 대결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타협의 일환일 뿐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합류하는 대신 유타와 뉴멕시코 준주는 주민들 스스로 자유주 혹은 노예주로 선택해서 연방에 가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남부 주들의 타협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1912년, 무려 62년의 오랜 기다림 끝에 뉴멕시코는 마흔일곱 번째 주로서 미국 연방에 편입되게 되었다.

남서부 인디언 문화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 그리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문화를 접하면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건축과 예술을 볼 수 있는 작은 남서부의 도시, 과거와 현재가 수려한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도시, 마치 환상의 세계에 들어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과거의 도시를 보고자 한다면 산타페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귀신 타운에서 ‘에덴동산’으로
현재의 피닉스 지역에 최초로 거주했던 원주민들은 호호캄Hohokam 부족으로서 기원전 300년 정도부터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이 남긴 대규모 관개시설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그들이 상당한 규모의 부락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1200년경에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왜 갑자기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호호캄이라는 이름도 ‘사라진 사람들’ 혹은 ‘떠나간 사람들’이라는 인디언의 말에서 유래했다.

1867년 솔트강 계곡을 탐사하던 잭 스윌링Jack Swilling은 호호캄 인디언들이 만들었던 관개수로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활용해서 관개수로 공사를 확장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마을이 들어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솔트강 계곡 관개 운하 공사로 밀, 보리, 옥수수 수확에 성공하게 되었다. 정착민들은 그곳을 피닉스라고 명명했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와 연계된 불사조에 얽힌 신화적 의미에다 나일강의 홍수와 창조의 이미지를 생각해서였다. 스윌링으로 말미암아 피닉스는 황량한 서부의 땅에서 ‘미국의 에덴동산’이 된 것이다. 이것이 피닉스의 시작이며 피닉스 정착민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골드러시의 붐타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1만 년 전부터 시애틀 지역에 거주했다. 최초의 유럽 정착민이 도착했을 때 두와미시Duwamish 부족은 엘리엇만 안쪽과 워싱턴 호수 사이에서 17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시애틀 지역을 탐사한 최초의 유럽인은 조지 밴쿠버였다. 영국 해군 장교로서 그는 태평양 북서부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1791~1795년 원정을 하던 중에 1792년 5월에 시애틀을 발견했다.

그레이스하버 주변의 애버딘과 호퀴엄 등은 가장 악명이 높은 범죄 도시가 되었다. 한 해에 40명이 넘는 시체가 이곳으로 떠내려오기도 했다.

빌리 골Billy Gohl은 전설적인 연쇄살인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살인뿐만 아니라 강도, 도둑, 방화 등 갖가지 범죄에 연루되었던 시애틀의 대표적인 범죄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특히 애버딘을 항해하는 선원들을 주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1910년 그가 체포되고 종신형을 받으면서 ‘골의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골에 대한 혐의는 근거가 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레이스하버에서 발견된 수많은 시체들은 골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벌목 현장과 운송 과정의 위험한 환경 때문에 발생한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연쇄살인범의 악명을 받게 된 것은 기업가들이 노조 활동을 주도했던 골을 악마로 만들고자 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애틀이 탄생시킨 또 한 명의 기업가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한 빌 게이츠이다. 그는 시애틀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그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했던 폴 알렌 역시 시애틀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을 견인했다.

시애틀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기업가는 현재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이조스이다. 베이조스는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서 출생했고 휴스턴과 마이애미에서 자랐지만, 1994년 뉴욕에서부터 시애틀에 이르는 대륙 횡단 여행을 하고 나서 아마존을 설립했다.

시애틀을 대표하는 ‘스리 B’는 보잉, 베이조스, 빌 게이츠이다. 회사와 창업주의 알파벳 B를 따서 만든 개념이다.

1971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커피 볶는 사업으로 시작해서 에스프레소 카페로 유명해진 스타벅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커피 볶는 사업과 관련 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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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통계에 의하면 덴버의 백인 인구는 10만 7,000명이었는데그중에서 3만 명이 KKK 회원이었다. 당시 백인 인구 세 명 중 한 명은 KKK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콜로라도주 및 덴버의 주요 관직을 맞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KKK 회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콜로라도 주지사, 주 상하의원, 덴버 시장, 덴버 경찰서장, 은행장과 같은 주요 관료뿐만 아니라 병원, 약국, 철도, 공원, 우체국, 과일 및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KKK 회원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KKK 회원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KKK 행렬은 덴버의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도시에서 공직자나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KKK 회원으로 행세하는 것이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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