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정복자들의 대결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정착하던 여러 푸에블로 인디언 중 한 부족이었던 타노아족은 서기 900년 이후부터 현재의 산타페 시내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오그란데강의 지류인 산타페강은 교역과 이동 등 지리적으로 그들 삶의 중심지였다. 산타페 지역 푸에블로 인디언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부족인 나바호족과 아파치족의 조상은 서기 1400년경 캐나다 북서부와 알래스카 동부에서 남서부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디언과 유럽인들의 행로에서 미국의 행로가 된 산타페 행로
‘재정복’ 이후 스페인과 인디언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스페인 정부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지위와 안전을 약속했고, 인디언들 역시 뉴멕시코 정착민들과 평화롭게 교역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 말미암아 산타페는 세인트루이스의 촉타우 부족들과의 모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803년 미국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할 당시에도 산타페는 세인트루이스와의 모피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고 있었다.

1840년대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 미국의 서부 팽창의 슬로건이 되면서 자유 토지를 소유할 기회를 찾는 정착민들은 남서부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산타페 행로는 이들 이주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1846년 멕시코와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인들은 뉴멕시코도 ‘명백한 운명’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대부분의 뉴멕시코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계속된 ‘명백한 운명’의 기치에 따라 남부 대륙횡단철도 건설 계획이 세워졌다. 1853년 미국은 뉴멕시코의 남은 남서쪽 영토와 애리조나의 남부 영토를 매입했다.

‘명백한 운명’의 버림받은 개척지
‘명백한 운명’은 뉴멕시코에서 이중적인 운명을 맞았다.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뉴멕시코를 차지하자 미국인들은 이것이 ‘명백한 운명’의 당연한 결과라고 자축했다. 하지만 뉴멕시코를 연방에 합병시키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 아니라고 보았다.

1848년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뉴멕시코가 미국의 영토가 되자 다음 해에 뉴멕시코 대표자들은 준주의 대표 자격으로 연방의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방의회는 그들을 거부했다. 다음 해에 뉴멕시코는 정식으로 준주 헌법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 정부는 그 헌법을 거부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뉴멕시코에 여전히 스페인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기에 진정한 미국의 영토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1850년 타협’이 통과되면서 뉴멕시코의 준주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뉴멕시코가 준주의 자격을 갖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 대 노예주 대결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타협의 일환일 뿐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합류하는 대신 유타와 뉴멕시코 준주는 주민들 스스로 자유주 혹은 노예주로 선택해서 연방에 가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남부 주들의 타협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1912년, 무려 62년의 오랜 기다림 끝에 뉴멕시코는 마흔일곱 번째 주로서 미국 연방에 편입되게 되었다.

남서부 인디언 문화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 그리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문화를 접하면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건축과 예술을 볼 수 있는 작은 남서부의 도시, 과거와 현재가 수려한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도시, 마치 환상의 세계에 들어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과거의 도시를 보고자 한다면 산타페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귀신 타운에서 ‘에덴동산’으로
현재의 피닉스 지역에 최초로 거주했던 원주민들은 호호캄Hohokam 부족으로서 기원전 300년 정도부터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이 남긴 대규모 관개시설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그들이 상당한 규모의 부락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1200년경에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왜 갑자기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호호캄이라는 이름도 ‘사라진 사람들’ 혹은 ‘떠나간 사람들’이라는 인디언의 말에서 유래했다.

1867년 솔트강 계곡을 탐사하던 잭 스윌링Jack Swilling은 호호캄 인디언들이 만들었던 관개수로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활용해서 관개수로 공사를 확장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마을이 들어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솔트강 계곡 관개 운하 공사로 밀, 보리, 옥수수 수확에 성공하게 되었다. 정착민들은 그곳을 피닉스라고 명명했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와 연계된 불사조에 얽힌 신화적 의미에다 나일강의 홍수와 창조의 이미지를 생각해서였다. 스윌링으로 말미암아 피닉스는 황량한 서부의 땅에서 ‘미국의 에덴동산’이 된 것이다. 이것이 피닉스의 시작이며 피닉스 정착민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골드러시의 붐타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1만 년 전부터 시애틀 지역에 거주했다. 최초의 유럽 정착민이 도착했을 때 두와미시Duwamish 부족은 엘리엇만 안쪽과 워싱턴 호수 사이에서 17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시애틀 지역을 탐사한 최초의 유럽인은 조지 밴쿠버였다. 영국 해군 장교로서 그는 태평양 북서부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1791~1795년 원정을 하던 중에 1792년 5월에 시애틀을 발견했다.

그레이스하버 주변의 애버딘과 호퀴엄 등은 가장 악명이 높은 범죄 도시가 되었다. 한 해에 40명이 넘는 시체가 이곳으로 떠내려오기도 했다.

빌리 골Billy Gohl은 전설적인 연쇄살인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살인뿐만 아니라 강도, 도둑, 방화 등 갖가지 범죄에 연루되었던 시애틀의 대표적인 범죄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특히 애버딘을 항해하는 선원들을 주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1910년 그가 체포되고 종신형을 받으면서 ‘골의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골에 대한 혐의는 근거가 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레이스하버에서 발견된 수많은 시체들은 골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벌목 현장과 운송 과정의 위험한 환경 때문에 발생한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연쇄살인범의 악명을 받게 된 것은 기업가들이 노조 활동을 주도했던 골을 악마로 만들고자 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애틀이 탄생시킨 또 한 명의 기업가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한 빌 게이츠이다. 그는 시애틀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그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했던 폴 알렌 역시 시애틀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을 견인했다.

시애틀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기업가는 현재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이조스이다. 베이조스는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서 출생했고 휴스턴과 마이애미에서 자랐지만, 1994년 뉴욕에서부터 시애틀에 이르는 대륙 횡단 여행을 하고 나서 아마존을 설립했다.

시애틀을 대표하는 ‘스리 B’는 보잉, 베이조스, 빌 게이츠이다. 회사와 창업주의 알파벳 B를 따서 만든 개념이다.

1971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커피 볶는 사업으로 시작해서 에스프레소 카페로 유명해진 스타벅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커피 볶는 사업과 관련 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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