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이 권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 세워진 나라는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배반당한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한韓이다.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 하나였던 한이 마한과 진한과 변한으로 갈라진 것인지, 아니면 한이 곧 마한이며 진한과 변한은 별도로 형성된 것인지, 아예 준왕의 남하설 자체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등이 모두 불분명하다. 아무튼 그 시점에 한강 남쪽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다면 구석기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 짓고 살아온 강동구 권역은 뭐가 되었든 한 나라의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단순한 토성이었든 목책을 높이 올려 방어력을 높인 것이든, 공성기기를 갖춘 대군의 집중 공격에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결과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풍납토성의 남은 부분에서 불에 심하게 탄 것 같은 곳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공성전의 흔적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북성이 풍납토성이자 위례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므로, 위례성이 견디지 못할 것 같자 개로왕이 몽촌토성으로 헐레벌떡 도망쳤지만 그 성도 함락되면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혔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중심에서 한반도의 중심이 되다 지금의 서울 지역은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한주는 너무 넓은 땅을 대충 하나로 묶은 변방 지대였고, 군사적 중심지인 중원경中原京은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지금의 충주에 들어섰다. 그래서 고구려가 위례성을 무너뜨린 5세기 말부터 10세기 초까지 서울은 역사적 암흑기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 조정은 3경 체제를 유지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1308년에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했다. 한양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부터 한양군으로 불렸다고 하나, 이때부터 널리 쓰였다. 다시 원나라가 기울어지며 반원 정책을 쓰자 세력 판도를 바꿔보려는 군주가 으레 그러하듯 공민왕이 한양 천도를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1390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대에 와서 실현되지만 불과 반년도 못 채우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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