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에 개봉된 영화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은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로 시애틀은 낭만적인 도시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노숙자와 범죄, 그리고 주택난과 교통난 등으로 현재 시애틀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잠 못 이루는 도시’로 변해 가고 있다.

예르바 부에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1769년 포톨라Don Gaspar de Portolá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록상으로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유럽인들이었다. 현재의 프리시디오 샌프란시스코에 소규모 군대가 주둔했고, 미션 돌로레스에 선교사들이 기거했다. 그들과 맞닥뜨린 원주민들은 올로니족의 옐라무 부족으로서 유럽인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지진과 대공황을 극복한 기적의 도시
1906년 4월 18일 새벽에 리히터 규모 8.3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샌프란시스코와 북부 캘리포니아를 강타했다. 지진과 지진에 따른 화재로 도시의 4분의 3이 무너지거나 불에 타 버렸다. 특히 도심은 80~90퍼센트가 잿더미로 변했다.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 인구 40만 명의 절반 이상이 집을 잃었으며, 집을 잃은 이들은 골든게이트 공원, 프리시디오, 해변 등의 임시 거처에서 기거했다. 상당수는 이스트 베이로 이사를 했고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로스앤젤레스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골든게이트 브리지 인근에 골든게이트 공원이 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원이다. 그 공원을 덮고 있는 수많은 노숙자 천막들이 미국 자본주의의 어둠을 대변하고 있다.

인디언, 스페인, 멕시코의 작은 마을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은 통바Thongva 부족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5,000년 전부터 로스앤젤레스강 서쪽과 국도 101번 도로 아래에 위치한 현재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스페인 미션이 설립될 당시 5,000명 정도의 통바 부족이 살고 있었다.

1781년 네베Felipe de Neve는 로스 포블라도레스Los Pobladores로 알려진 44명의 정착민 그룹과 함께 지금의 로스앤젤레스를 건설했다.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천사의 여왕의 도시El Pueblo de Nuestra Señora la Reina de los Angeles’라고 불렀다.

미국인 개척자들과 멕시코 전쟁, 그리고 골드러시

동부에서 건너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샌프란시스코와 북부의 광산 마을에서 쫓겨난 도박꾼, 무법자, 매춘부들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채우면서 도시는 ‘서부에서 가장 거친 무법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멕시코인에 대한 린치는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1850년과 1870년 사이에 폭도들은 약 서른다섯 번의 멕시코인 린치를 가했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수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 1847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10만 명당 평균 158명(연간 13명)의 살인이 발생했다. 이는 뉴욕의 연간 살인율의 열 배에서 스무 배에 해당한다. 로스앤젤레스는 서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치안이 불안한 대표적인 도시로 오명을 얻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소유자이자 토지 개발자였던 해리 챈들러가 1923년 부동산 홍보용으로 할리우드라는 거대 간판을 내걸었다. 1년 반 정도만 세워 놓고자 했는데 할리우드 주민들이 간판이 맘에 들어 그대로 놔두도록 했다. 이후 할리우드 간판은 몇 번의 보강 공사를 거쳐서 지금까지 미국과 전 세계에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간판이 되었다.

스페인 신부들의 마을로 시작한 캘리포니아 최초의 정착촌
8,000여 년 전부터 산데이기이토San Deiguito와 라호야La Jolla 부족이 지금의 샌디에이고 지역에 살았다. 유럽인들과 최초로 마주하게 된 샌디에이고 원주민은 쿠메야이Kumeyaay 부족으로 서기 1,000년경에 샌디에이고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602년 11월, 비스카이노Sebastián Vizcaíno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돌아오는 스페인 함대의 기착지를 위해서 캘리포니아 해안 탐사를 시작했다. 비스카이노는 세 척을 이끌고 탐사에 나섰는데 기함의 이름이 샌디에이고였다. ‘샌디에이고 데 알칼라’로 더 잘 알려진 가톨릭 성자 디다쿠스의 이름을 따서 샌디에이고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쿠메야이의 타격도 컸다. 1769년에 3만 명 규모였던 쿠메야이는 1846년 멕시코 통치가 끝날 때까지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더욱 줄어들어서 1890년에는 900명 미만이 되었다.

천혜의 자연과 기후, 안정된 치안, 해군기지와 방위산업, 생명공학 산업, 수많은 관광 인프라 등으로 말미암아 샌디에이고는 대형 도시 중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은퇴지가 되었다. 샌디에이고는 미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미국의 대형 도시들이 겪고 있는 도심의 문제들을 심하게 겪고 있지 않다. 인구 200만 명 이상의 도시들 중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다. 샌디에이고는 밤에 돌아다녀도 비교적 안전한 도시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리베라와 프리몬트, 그리고 브리검 영의 개척지
라스베이거스 인근에 남겨진 암각화로 추정하건대 1만 년 전부터 유목민 원주민들이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전에는 투디뉴족이 콜로라도강 남부 계곡과 네바다, 캘리포니아, 유타의 모하비사막의 산과 협곡에서 생활했다. 투디뉴의 의미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로서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거주했던 주요 부족인 파이우트들의 조상이다.

2주 후에 라스베이거스 스프링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을 라스베이거스라 명명했다. ‘목초지’라는 뜻이다. 스프링스 인근의 비옥한 땅에 자라는 야생 목초들을 보고 지은 이름이었다. 지금도 라스베이거스 일대에는 리베라를 기리는 수많은 길, 공원, 건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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