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 별 소득이 없자 그는 다시 저널리즘으로 돌아와 친구 플리니오 아폴레요 멘도사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 등지를 비밀리에 여행하며 소비에트사회주의를 맛보았다. 석 달 뒤 여행에서 돌아온 가보는 오랫동안 자신과의 결혼을 기다려 온 메르세데스에게 청혼했다. 메르세데스와 결혼할 마음을 먹은 지 16년, 처음 청혼한 지 12년이나 지났을 때였다. 1958년, 두 사람은 드디어 바랑키야에서 결혼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메르세데스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 P129
어느 날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그는 서른다섯 살의 카를로스 푸엔테스를만났다. 이미 15년간 가보는 문학에 헌신했는데 무엇을 보여 줄게없었던 반면, 푸엔테스는 1958년 당시 라틴아메리카 붐 세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 P130
가보식 ‘썰‘의 결정판 백 년의 고독 초판 가보는 1967년 마흔 살에 백 년의 고독을 발표하기 이전까지는 무명 작가였다. 그가 1년 6개월에 걸쳐 『백 년의 고독을 쓰는 동안 메르세데스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원고를 다 쓰고도 출판사에 부칠돈이 모자라 절반만 보내야 했을 만큼 부부는 너무나 가난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년의 고독이 세상의 빛을 보면서 가보는 첫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와함께 세계문학의 중심축도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넘어갔다. - P131
(현재 환율로 약 6,000원)가 없어 원고의 반만 보내야 했다. 하지만 출판 담당자가 나머지도 읽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해 돈을 부쳐 주는 바람에 『백 년의 고독』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 P132
백 년의 고독이 출판되었을 때, 내가 아마 가장 놀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성공할 줄 몰랐다.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가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가보는 이렇게 말했다. 1967년은 가보가 첫 번째로 맞이한 전성기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카르멘발체스에이전시에 의해 국제 문학 시장에 소개되었다. 초판 500부에서 시작된책은 이제 남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문학의 왕좌는 자연스럽게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넘어갔고, 그는 무명 작가에서갑자기 남미의 세르반테스가 되었다. 나아가 그는 라틴아메리카의고독을, 아니 익사 직전의 문학 전체를 구해 냈다. 그리하여 1982년에는 그 공헌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에게는평생 믿지 못할 마법 같은 일이었다. - P132
"저는 여자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과 더 잘 소통합니다. (…) 결혼에 관한 핵심적인 조언을 하자면 여자들은 부부 사이의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끝내는 논쟁으로 끝납니다. 그들을 믿고잊어버리고 앞으로 나가세요. 절대 논쟁하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가요." - 이브 빌런 외, 다큐멘터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중 - P133
1980년대까지 선배들이 험난한 민주화 투쟁 끝에 얻어 낸 평화 속에서 내가 안전하게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처럼, 콜롬비아의 20대들도 불완전하지만충분히 안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보았다. - P138
마약왕파블로 에스코바르 ‘은 아니면 납‘, 즉 ‘내게 협조하여 돈을 벌든지, 아니면 나를 반대하여 죽든지 하나를 택하라‘ 는 구호 아래 한때 전 세계 코카인 시장의 80퍼센트를 점유한 인물이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건설, 자동차 등의 사업에도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하지 못한 사회 인프라 구축과 빈민 구제 사업도 벌여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에 정계로까지 진출하여 한때 대통령을 꿈꾸기까지 했지만,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의 공조 작전으로 인해 범죄자로 쫓기다 결국 사살되고 말았다. - P147
바랑키야에서 본 마그달레나강 마그달레나강은 콜롬비아 서쪽에서 남북으로 관류하다가 바랑키야에 이르러 마침내 카리브해로 흘러든다. 가보는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보고타의 폭력적 현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카리브 최대 해안 도시 바랑키야로 강물처럼 흘러들어 저널리스트이자 문학인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헤미안 같았던 이 시절의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윤락가 여성들과 문학인들의 모임인 바랑키야 그룹이었다. - P160
피델과 쿠바에 대한 사랑 가보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글을 쓰는 데 의미를 두었다. - P165
가보와 피델 카스트로 가보는 보고타 사태 때 피델 카스트로와 우연히 마주친 이래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혁명에 동조하는 이들과 본격적인 사회주의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카스트로가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지식인들의 비판이 이어질 때도 가보는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붐세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가보를 ‘카스트로의 궁정 작가‘라 비난하기도 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가보의 지극한 사랑은 1976년에 발표한 『족장의 가을』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 P169
가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칠레 인구의 10퍼센트로 하여금 망명길에 오르게 한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을 비롯하여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학살을 비판했다. 그런 그가 카스트로에 대해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낸 것에는 어쩐지 석연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권력과 명예욕이었는지, 아니면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듯하다. - P171
카르타헤나의 중심 렐로흐성 내전으로 쑥대밭이 된 보고타를 뒤로 하고 카르타헤나에 온 가보는 "고통 없는 고독과 바다가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관문으로 건설된 이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카리브를 대표하는 도시가 된 카르타헤나는 가보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20대의 많은 날을 보냈다. 그가 소유한 저택과 그의 유해도 이곳에 있다. 또한 부모님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소설화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 P174
카르타헤나의 거리 식민지풍의 건물,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오래된 성벽, 화려한 색깔로 페인트칠한 집 등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가운데 원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카르타헤나는 마치 1년 내내 축제 중인 도시 같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가보의 소설을 영화화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 P179
리오아차의 바다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식민지 마을인 리오아차는 16세기에 영국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가습격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가보의 부모님이 신혼 생활을 한 곳이고, 백 년의 고독에서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가보의어머니 루이사는 리오아차의 바다보다 넓은 바다는 없다고 했다. 여행자는 이 바다 앞에서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졌다. - P187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은 적 없음.) 가슴 아픈 젊은 부부의 사연이 담겼을 것 같은 헤밍웨이의 이 소설은 단문을 무기로 내세우던 작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 P195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의 가보 1982년, 가보는 영국의 그레이엄 그린과 독일의 귄터 그라스와 경합한 끝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재단은 그가 약자들의 편에 서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서구의 경제적착취와 국내의 압제적 상황에 강력하게 대항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카리브 지역의 예복을 입고 시상대에 선 가보는 수상 연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고독을 웅변적으로 설파했다.
반복이 과장법과 함께 사용되면 유머는 증폭된다. 하지만 과장은자칫 잘못 사용하면 거부감을 낳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꽤 많은 장치다. 하지만 가보는 특유의 이야기 재능을 통해 이 산을 가볍게 넘어 버린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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