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란?
日本史, Japanese History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본의 역사를통해, 일본 및 일본인에 대한 이해 도모를 목표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교류가 가장 많았던 일본을 바로 알기 위한 전제로서 일본의 역사에 대한정확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한국에서의 일본사 연구는 한국사 연구가 보다유기적이고 비교사학적으로 발전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의 해석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는 데기여하고 있다. - P5

연호(年號)
특정 군주 즉위 후 통치 기간을 일컫는 용어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천황의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로, 일본 역사상 천황의 가문이 한 번도 바뀐적이 없기에 천 년이 넘게 이어져오는 전통이다. 근대 일본이 만들어진 과정을 ‘메이지(여성) 혁명‘이 아닌 ‘메이지유신‘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연호로는 ‘메이지‘, ‘헤이세이‘, 서기 2019년부터 사용하고있는 ‘레이‘ 등이 있다. - P6

막부(幕府)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면서 실질적으로 국가를다스렸던 무사 정권을 말한다. 이는 각 지방에 영주를 보내 통솔케 하는 일본식 봉건제 체제였으며, 막부의 수장인 ‘장군(정이대장군이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에도(도쿠가와) 막부를 끝으로 막부 시대는 막을 내리고메이지유신이 선포되면서 근대 일본이 열리게 된다. - P6

사무라이(侍)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 계급을 말한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 모습은 그이전 시대와 많이 달라진다.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게 되었고, 토지를 소유하는 대신 주군에게서 봉록을 받는 존재로 변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봉건제가 폐지되면서 사무라이 계층은 소멸되었다. - P6

번(藩)
막부 시대 당시 봉건제의 기반이 되었던 영지를 가리킨다. 이때 각 지방의영주를 ‘번주‘ 혹은 ‘대명‘이라고 한다. 막부의 영향력이 약해질수록 반대로번의 세력이 강해졌다. 번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번을 ‘웅번‘이라고 하며, 대표적인 웅번인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후 막부를 무너뜨리게 된다. - P6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명치유신‘이라고도 하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정치·경제·사회·군사 전 분야에 걸쳐 서구화에 성공한 일련의 대변혁 과정을말한다. 보통 1853년의 개항부터 1868년 메이지 원년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서양의 아래로부터 시작된 시민 혁명과는 달리 지배 계급인 하급 사무라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개혁이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 P7

흑선 사건(黑船事件)
1853년과 1854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함선이 일본으로 와 문호 개방을 강제한 사건을 말한다. 함선의 선체가 검은색이었기에 ‘흑선내항‘이라고도불리며, 결국 미일화친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는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막부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 P7

존왕양이尊王攘夷)
‘존황양이‘라고도 하며 ‘천황의 이름을 높이고(존왕), 외세를 배격(양이)‘하자는 표어로,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존왕‘과 ‘양이‘는 막부 타도를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를 옹호하는 좌파들이 정리되면서 존왕양이 또한 유명무실해졌다. - P7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반납한 사건이다. 이전까지 ‘대정위임론‘을 토대로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장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면서, 에도 막부와 막부 시대의종언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곧이어 메이지유신이 선포된다. - P7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선 우선 일본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지금의 일본을 만든 메이지유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 P10

일본역사 중에서도 근대 일본의 출발점인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던 네인물을 통해 일본 역사와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한다.
이들 네 인물은 요시다쇼인,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다. - P11

분발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허세를낳기도 한다. 전자는 "까짓 것 일본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해"라는 자세고, 후자는 "일본 역사에서 배울 게 뭐 있나"
라는 태도다. 그러나 어느 나라 역사이건 간에 배울 게 없는 역사는 없다. 더구나 2000년 동안 나름대로 고도의 문명을 일궈온 이웃나라 역사에서 배울 게 없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평소 매사에 지성적인 자세를 취하는 분들도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를 가끔 보았다. 피해의식이 이성적 태도를 방해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 P16

우리는 모두 하늘이 펼쳐놓은 그물망 속에서 산다. 달리 말하면 시대적 제약이다. 역사상 위업을 이룬 인물들은 이 그물망의 한 부분을 뚫고 나간 사람들이다. 이들의 영웅적 활약에만 흥미본위로 집중하다 보면 영웅사관에 빠지거나 궁중사극의 재판이 될 것이고, 그물망 분석에만 치중하다 보면 역사에서 인간의 주체성은희미해질 것이다. 이 책은 이 양자 간의 긴장관계를 항상 염두에 둘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20

우리가 역사상 인물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 영웅전, 위인전을 읽는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어떤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았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위인도 자신의 시대적 제약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웅과 위인은 그 시대적 제약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한 겹, 두겹, 혹은 세 겹 벗겨낸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인물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당시 일본의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 P21

18세기 전반 조선에서 영조가 통치하던 무렵, 일본 인구는 3000만 명이 넘는다. 우리 인구가 그에 이르는 것은해방 무렵이다. 당시 조선 인구는 많이 잡으면 1500만 명이지만 대략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지금 한일 인구 비율과 일치한다. - P22

다음으로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는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 이게 조선과 가장 다른 점이다.
조선도 농업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밭작물 생산력은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힘으로 1000만 명이나되는 인구를 유지했던 것이다. - P23

예를 들어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했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반드시 사회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당시 그들의 생각이그렇게 틀린 것도 아닌 것 같다. - P24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건재했지만, 막부는 다르다. 장군의 원래 이름은 정이 대장군 征夷大將軍 아닌가. 말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있는 자리다. 전쟁에서 지면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게 막부가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이유다. 실제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조슈번長州藩과의 전쟁에서 패한 게 결정타였다.  무력이 정통성의 원천이다. - P36

계급사관이 학계에서 유행할 때에는 변혁은 반드시 피지배계급이 일으킨다는 전제 같은 것이 있었다. 역사학에서 실증도 하기 전에 전제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땐 그랬다. 이 사관에 잘들어맞는 게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었다. 귀족지배는 부르주아가 부르주아 지배는 프롤레타리아가 타도했기 때문이다. 중국혁명은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농민이 수행했다. 이러니 기존의 계급사관과 맞지 않아 만들어진 것이마오쩌둥 이론이었다. - P43

요시다 쇼인은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불렀다. 내가 봐도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젊은 인재들이 그에게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는 그물코를하나하나 찾아가며 그물망을 돌파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온몸으로 거기에 들이받은 사람이었다. 무모하다면무모했다. "지성을 다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신조다. 쇼인은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지성 탓인지 그가 죽은 직후부터세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P48

뒤에 나오겠지만 사카모토료마도 이 무렵 고향의 난학자에게서 해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이어 일본 해군 탄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가쓰 가이된다.
의제자가사무라이는 원래 해군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창검술, 기마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만큼해군 육성이라는 발상의전환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쇼인도, 료마도 이런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어버리고해군 양성의 절박성을 바로 간파했다. 역사의 갈림길은 이런 데서 비롯된다. - P63

팽창의 발판으로 주목한 울릉도
흥미로운 것은 쇼인이 해외팽창을 하기 전에 그 발판으로울릉도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그는 울릉도가 조선에 속해 있어 진출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76

1885년에는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거하는 사건으로 일본이 바짝 긴장한 적도 있다. 한반도 어딘가에 서양세력이거점을 만드는 것은 근대 일본이 초지일관 반대해왔던 일이었는데, 그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 P80

독립불가지 3천 년이 된 대일본이 하루아침에 다른한사람의 속박을 받는 것을, 혈기가 있는 자가 보고도 참을 수있겠는가. 나폴레옹을 일으켜 ‘프라이하잇! vrijheid, 자유의 네덜란드어‘ 이라고 부르짖지 않으면 뱃속의 갑갑함을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본디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작년 이후 미력이나마 분골쇄신해왔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헛되이감옥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이런 내 생각을 함부로 말했다가는 일족에 화가 미치겠지만 지금의 막부나 제후는 이미 취인이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망굴기하는 사람이나오길 바라는 것 말고는 믿을 게 없다.(기타야마 야스요에게보낸 서한) - P89

그 유명한 초망굴기론이다. ‘초망‘이란 우거진 풀, 잡초라는 뜻이니 권력을 지니지 않은 재야나 시정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 P89

사형판결을 예상한 10월 말, 쇼인은 『유혼록』을 쓰기 시작하여 하루만에 완성했다. 맨 끝에는 ‘10월 26일 황혼에 쓰다‘라고 쓰여 있다. 처형 하루 전이었다. 다음 날 형장으로 가면서는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해 죽는다. 죽어서도주군과 부모를 배신하지 않는다. 천지의 일은 유유하며 신명이 모든 걸 비추고 계신다"라는 시를 읊었다. - P93

형장에 도착하여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는 다시 절명시를남겼다.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일본 혼 " - P94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화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걸 주저하고 있을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우리가 한국병합을 생각할 때는 이토히로부미뿐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 휘하의 가쓰라 타로내각을 연구해야 할 이유다. - P99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리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근엄하고 살벌한 메이지유신 시기에 드문 일이다.
그는 "난 일부러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다"는 희대의 낙천가였다. 대단한 검객이면서도 암살이나 할복보다는 바다와 무역을 좋아했다. 막부를 미워하면서도무력토벌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선호했다. 삿초맹약과대정봉환은 그의 스타일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메이지유신이 그의 명랑함을 닮았더라면 근대 일본은 좀 더세련됐을 거다. - P102

"세상에 태어난 것은무언가를 이루기위해서다"
사카모토 료마 - P103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매진했던 박정희에게도 이순신은 좋은 대상이었다.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요소인 반일주의에 그만한 좋은 소재는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순신도 무인이라는 덤도 있었을 것이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김유신이 민족통일의 화신이 된 것도 비슷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상 유명인물이란 것은 특정 시기에, 특정 세력에 의해, 특정한 이유로 현창된 것이 쌓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가 ‘역사적 (historic이 아닌historical) 산물‘인 것이다. - P105

어떤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리고 동상과 지폐초상으로 등장하는가는 그 사회의 사상과 지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분들이 훌륭한 건 분명하지만, 그 많고 많은 위인들 중 하필 그분들인 것은 우리사회의 열망이 그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이퇴계, 이율곡, 신사임당, 이순신, 세종대왕.……  이들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이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에 무슨 문제는없는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 P106

· 한시라도 충효를 잊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것
• 물건에 마음 빼앗겨 돈을 낭비하는 일이 없을 것
· 여자에 빠져 국가대사를 잊는 일이 없을 것(『사카모토 료마 전집』, 이하 료마관련 서한은 이 책에 의거함) - P111

 ‘오늘밤 남몰래 계획한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공께서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공을 찔러 죽이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지금 공의설을 듣고 나니 제 고루함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부터 공의 문하생이 되겠습니다.‘(『추찬일화追贊一話』) - P125

이때 료마는 새로운 국가 구상을 적은 「선중팔책」을 만들고, 이에 기반해 사쓰마를 끌어들였다.

정권을 천황에 반환한다.
상하의회를 설치하여 의원을 선출한다.
천하의 인재를 두루 등용하고 유명무실한 관직은 없앤다.
외국과의 교역을 확대한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다.
해군을 확대한다.
친병親兵, 친위대을 두어 교토를 수비한다.
금은 비율을 외국과 같게 한다. - P154

사이고는 ‘최후의 사무라이‘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이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급격한 서구화 변혁을 수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사무라이들의상실감을 그는 이해했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고 그 사이에 끼어 죽었다.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무도 그를 ‘반란의 수괴‘로 여기지 않았다.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사이고의 동상은 그에 대한 일본인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 P172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거다. 그 주인공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다. 물론 픽션이 많이 가미돼 있지만. 그 영화에서 보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모습이 지금 일본 사람들이 그에게갖고 있는 이미지라고 보면 된다. 사쓰마번 출신으로 다음에서 다룰 오쿠보 도시미치와는 한동네 죽마고우였다. 막부 토벌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메이지 정부의 개명정책(반사무라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무라이들과 함께 반란(서남전쟁을 일으켰다가 오쿠보에게 진압되었다. 전투 중 총탄을 맞자 옆의 부하에게 자기 목을 쳐줄 것을 부탁해 전사했다. 오랫동안 최후를 직감한 사이고가 할복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할복할 기력은 이미 없었던 것 같다. - P175

집은 사쓰마번의 성하정이자 인구 7만2000명으로 당시로서는 대도시였던 가고시마의 시모가지야초라는 동네였다. 이 동네를 답사하다 보면 ‘~의 탄생지‘ 라는 표지가 발길에 차일 정도로 많다. 하급 사무라이 집들이 70여 가구 모여 있던 이곳에서 사이고뿐 아니라 오쿠보도시미치, 오야마 이와오, 무라타 신파치, 도고 헤이하치로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해군대장이자 1874년대만 침공을 한 사이고 쓰구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둘째 동생으로 그 역시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 - P179

사족이지만 한국의 태극기는 참 독특한 국기다. 국기라는 것은 ‘national flag‘이니 그 나라의 민족성이나 고유성을 잘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일장기, 즉 히노마루인데,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일본의 시조가 아마테라스오미가미神, 태양의 여신이다. 일본의 국명을 보라. 일본日本, 해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본 국기에 해가그려져 있는 것은 정말 일본답다고 할 수 있다. - P184

반면 우리 국기에는 태극과 팔괘가 있다. 태극이라는 것은 성리학에서 이 우주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천이 되는어떤 요소를 가리킨다. 그게 서로 음양이 얽혀서 발현된 것이 이 세계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팔괘는 알다시피 삼경 중하나인 『주역』에서 우주의 구성 원리를 설명할 때 나오는도안이다. 그러한즉 태극기에는 한국을 표상하는 것이 없다. - P184

훗날 세계 공화국이 만들어지면 그에 적합할 깃발이다.
그럴 정도로 보편적인 의미를 담은 문양이다. 태극기를 볼때마다 한국의 사상, 문화에서 민족주의란 과연 어떤 개념이고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 P185

막부 측은 사쓰마, 조슈와 친한 가쓰 가이슈를 총사령관에임명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사이고와 가쓰는 회담을열어 평화적으로 에도성을 넘겨줄 것을 합의했다. 처절한내전을 코앞에 두고 이뤄진 극적인 타협이었다. - P199

흔히 권력자는 목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붕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위기가 심해질수록 더욱 강경한수단을 써서 권력을 유지하려 하다 문자그대로 붕괴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역사의 상례다. 그런데 이때 막부는좀 달랐다. 막부라기보다는 신임 장군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 P203

메이지 정부군이 에도성을 접수하고 나서 시내 치안이문제가 되었을 때 사이고는 이를 가쓰에게 부탁했다. "대담한 사이고는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이 난국 타개를 내게 맡겨버리고는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고 하고는 에도를 떠나버렸다. 이 막연한 ‘해주시겠지요‘라는 말에나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오쿠보 도시미치였다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일일이 지시했을 것이다.
사이고와 오쿠보의 우열은 여기에 있다." ‘사이고는 막연한사람‘, 사이고에 대한 가쓰의 평가다. - P211

거하다 삼걸이 다 죽은 후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고 사면을받은 후 화족, 귀족의 최고 지위인 공작의 작위를 받고 귀원 의장까지 역임한다. 또 은거 후에는 사진에 취미를 붙여 처첩을 대동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촬영과 온천즐기기에 열중했다. 인생은 새옹지마,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 P212

그러나 사이고는 급격한 정책에는 소극적이었다. 특히사무라이 계층에는 동정적이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 권력자들, 특히 죽마고우 오쿠보가 사치를 일삼는다고 불평을 했다. 천황 알현을 할 때 사이고가 평범한 옷차림으로나타나자 오쿠보는 나무랐지만, 사이고는 "촌놈이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어봤자다. 이대로 괜찮다"고 일갈했다. 이런 검소함과 도덕성이 사람들을 더욱 매료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는 도덕성만 가지고는 안 되는 법. 당시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은 기도와 오쿠보가 더 정확히 판단하고있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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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앙과 하이테크 산업이공존하는 ‘동양의 스위스‘
스와 諏訪
• 해당 지역 나가노현
• 도시 인구 약 5만 명(2020년 기준)

산악 지대가 많은 일본에는 내륙 분지에 지어진 도시가 많다. 산지가 85퍼센트를 넘는 나가노현 중부에 자리한 스와는 대표적인 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스와호 주변에는 고대에 스와 대사가 지어져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참배객이 찾고 있다. 스와 대사의 신작을 맡은 스와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중세부터 스와의 지배권을 줄곧 유지했다. 평지가 적어 벼농사에는 부적합하지만 긴키 혼슈 중앙부를 차지(일본하는 지방으로 미에현, 시가현, 교토부, 오사카부 효고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의 총칭옮긴이)에서 간토, 도호쿠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스와는 해안 도시에는 없는 독자적인 역사가 있다.

13 일본을 넘어 세계로뻗어 나간 국제 무역항
니가타 新潟
• 해당 지역 니가타현
• 도시 인구 약 81만 명(2020년 기준)

근세 이전의 니가타는 동해 연안에 흩어져 있는 항구 마을의 하나였다. 그러나 니가타에는 수량이 풍부한 시나노강이 흐르고 있었고, 이후 수운의 중심지가되어 동해 연안 굴지의 항구로 발전했다.
현대에 이르러 니가타는 외국과 많은 항로로 연결되어 국제 무역항을 둔, 동해 연안에서 으뜸가는 항만도시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니가타가 항구와 더불어커졌는지 역사를 더듬어 보자.

14 사찰에서 발전한유네스코 창조 도시
가나자와 金沢
• 해당 지역 이시카와현
• 도시 인구 약 46만명(2020년 기준)

일항종一同宗 (신란을 종조로 하는 일본 불교 일파 오늘날에는 정토진종 혹은 진종이라고 불린다 - 옮긴이)의  지나이초(무로마치 시대에 정토진종 등의 사찰이나 도량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치 취락 - 옮긴이)에서  출발한 가나자와였지만, 마에다 가문의 통치 아래 122만 석 영지의 가가번에 걸맞은 조카마치가 형성되어 간다. 그렇지만 그 도시 건설 과정의 이면에서는 에도 막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심을 엿볼 수 있다.
역대 번주의 문화 진흥 정책으로 가나자와에는 금박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 공예가 뿌리를 내렸다. 이런 공예 문화는 이도 시대의 분위기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시가지의 경관과 더불어, 가나자와 고유의 매력을 보여 주고 있다.

15 화려한 문화가 녹아 있는일본 제1의 신도시
나고야 名古屋
• 해당 지역 아이치현
• 도시 인구 약 230만 명(2020년 기준)

도카이 지방의 경제·문화의 중심지인 나고야는 고대부터 아쓰타 신궁의 소재지였다. 이 땅이 요충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센고쿠 시대에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 서부 - 옮긴이) 출신이던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에도 시대 나고야에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조카마치로서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어 간다.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드물게 폭이 100미터나 되는 도로가 놓이는 등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특한 도시를 만들었다. 에도(도교)의 방침에 얽매이지 않으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상술이 빼어난 나고야 문화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16 일본의 모든 공물이모이는 신의 도시
이세 伊勢
• 해당 지역 미에현
• 도시 인구 약 13만 명(2020년 기준)

이세는 일본의 도시 중에서도 신사를 중심으로 발전한 몬젠마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승에 따르면 2,000년쯤 전에 왕실의 선조로 알려진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시는 신궁(이세 신궁)이 이세평이 남단에 지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도카이도추히자쿠리게東海道中膝毛(야시로와 기타하치라는 두 남자가 도카이도를 따라 여행하면서 겪는 이야기 - 옮긴이)에 적혀 있듯이
‘이세 참배‘가 유행하여 전국에서 많은 참배자가 모여든다. 그러나 중세까지 이세 신궁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에게만 참배가 허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에도 시너역참 마을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몬젠마치 이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17 천황이 선택한1,300년 역사의 시작
나라 奈良
• 해당 지역나라현
• 도시 인구 약 36만 명(2020년 기준)

겐메이 천황에 의해 건설된 나라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 그 모델은 당의 수도 장안이며, 건설지 선정과 도시계획도 고대 중국의 사상에서 버워 왔다. 당시 헤이조쿄에는 고위 귀족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생활 수준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이윽고 수도로서 부족한 면이 다양하게 드러나면서 헤이조쿄는 버림을 받는다. 헤이조쿄가 있던 자리는 오랜 세월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들판이 되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장인의 발안으로 옛 도시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자는 운동이 일어나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8 육지의 중계무역으로번영한 금융의 중심지
이마이 今井
• 해당 지역 나라현
• 도시 인구 약 12만 명(2020년 기준)

일향종 사찰의 지나이초로 탄생한 이마이는 사카이와 나라를 연결하는 가도를 따라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물류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에도 시대에는 그 재력에 눈독을 들인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지만, 조닌(에도 시대에 도시에 사는 상공인의 총칭 - 옮긴이)에 의한 자지 또한 여전히 인정되었다.  부호들은 금융업으로 더욱 부를 쌓아 ‘야마토의 돈은 이마이에 7할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번성하게 된다. 이러한 번영의 배경에는 조닌에게 부과된 상세한 생활 규칙이 있었다.

19 히데요시가 초석을 다진일본 유수의 경제 일번지 오사카 大阪
• 해당 지역 오사카부 • 도시 인구 약 269만명(2020년 기준)

세토 내해 동쪽 끄트머리에 면한 오사카는 예부터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의 교류 거점으로 번영하였고, 고대에는 도성이 세워지기도 했다. 중세에 들어서자종교 세력인 혼간지가 사상 최대 규모의 지나이초를 구축한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 오사카성을 짓고, 전국의 다이묘를 지배했다.
상인의 도시이기도 했던 오사카는 에도 막부도 중시하여 전국에서 물자와 돈이 모이는 경제 도시로서 발전했다. 이 시기에 양성된 상인 기질과 활기 넘치는풍토는 현대의 오사카에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을까?

20상인의 자치로 발전한 ‘동양의 베네치아‘
사카이 堺
• 해당 지역 오사카부
• 도시 인구 약 84만 명(2020년 기준)

오사카와 교토, 고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간사이의 중핵 도시 사카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카이는 무로마치 시대 일본 최대의 상업 도시였다. 그 성장 과점을 더듬어 보면, 산업이 융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점은 고훈 시대(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 각지에서 거대한 고분이 축조되던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 약 400년 동안을 가리킨다 - 옮긴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사카이는 자치 도시로서의 측면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 상인들은 100년 동안이나 권력자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다양한 지배층이 난입한 나이에 있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자치를 확립한 것일까?

21 일본을 간직한 천년의 도시
교토 京都
• 해당 지역 교토부
• 도시 인구 약 147만 명(2020년 기준)

헤이안 천도 이래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신사와 사찰을 비롯한 각지의 유적과 예스러운 제례는 지금도 문화유산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황족, 공가(조정에 출사하여 공무를 맡아 하는 문신 귀족과 관리 - 옮긴이), 무가(군사를 주무로 하는 관직을 가진 가문의 총칭 - 옮긴이)가 혼재하는 교토는 여러 차례 동란의  무대가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교토는 어떤 역사를 밟으며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로 부활하게 되었을까?

22 이국적 낭만과 지진의 아픔이공존하는 국제 도시
고베 神戸
• 해당 지역 효고현
• 도시 인구 약 154만명(2020년 기준)

긴키 지방의 도시 중에서도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인 이진칸이 늘어선 고베는 세련된 항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고베는 고대부터 기나이의 도읍에 가까운 무역항으로 활용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일본의 수도가 될 뻔한 위상에 있었다. 막부 말기 무역항으로 개항되기 전에도 고베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연결하는 전국적인 해운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1,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항만도시가 숨기고 있는 갖가지 일화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23 원폭 투하에 가려진일본 최대의 상업지
히로시마 広島
• 해당 지역 히로시마현 • 도시 인구 약 119만 명(2020년 기준)

원자폭탄으로 도시가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지만, 시민의 노력으로 비약적인 부흥을 이루어 낸 히로시마, 그 역사는 세토 내해로 흘러들어 가는 오타강의 치수와 간척이 쌓이고 쌓인 결과이다.
하천이 많고 수운이 편리했던 히로시마는 센고쿠 시대에 모리 가문이 하구를 간척해서 히로시마성을 쌓았으며, 에도 시대에는 세토 내해에서 으뜸가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메이지유신 후에는 주고쿠 지방에서 육상 운송의 거점이 되어 번영을 누렸다. 삼각주에 펼쳐진 물의 도시는 어떻게 쌓여진 것일까?

24 미야자키 하야오에게영감을 준 작은 어촌
도모노우라 鞆の浦
• 해당 지역 히로시마현
• 도시 인구 약 45만 명(2020년 기준)

동서 방향에서 세토 내해로 흘러들어 오는 조수는 히로시마현 동부에 자리한 도모노우라에서 맞부딪친다. 그래서 도모노우라는 조류를 이용하여 배를 띄우기에 적합했다.
고대부터 기나이와 규슈를 연결하는 해로의 요충지였던 도모노우라는 여러 차례 전장이 되기도 했다. 센고쿠 말기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이곳으로 도망쳐 오는 등 도모노우라는 일본사의 다양한 장면에 등장한다. 에도 시대 후기 이후에는 조류에 의존하지 않는 항해술의 발달로 점차 쇠퇴하지만, 도모노우라에는 옛날의 풍경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25 오우치 문화가 꽃피운 ‘서쪽의 교토‘
야마구치 山口
• 해당 지역 야마구치현
• 도시 인구 약 19만 명(2020년 기준)

오늘날에는 대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야마구치지만, 한때는 교토와 견줄 만한 선진 도시인 시대가 있었다. 그 번영은 오우치 가문에서 시작된 것이며 교토를모방한 도시에서는 ‘오우치 문화‘가 꽃을 피웠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역에도 정력적이었던 오우치 가문은 막대한 재력과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지만, 이윽고 중신의 모반을 계기로 멸망한다. 그들을 대신해 보초 2국(나가토국과 스오국을 합쳐 이르는 말, 조슈번을 가리킨다 - 옮긴이)을 다스렸던 모리 가문은 막부 말기에 하기에서 야마구치로 정청을 옮기고.
이 땅에서 막부 타도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26 나쓰메 소세키가 사랑한시코쿠의 온천 마을
마쓰야마 松山
• 해당 지역 에히메현
• 도시 인구 약 50만 명(2020년 기준)

세토 내해는 규슈 지방과 긴기 지방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로로서 번성했다. 시코쿠 서부에 자리한 이요(현재의 에히메현) 북부는 해상 교역의 중계지였다. 이요 북부에서도 도고온천이 있는 마쓰야마는 고대부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중세 동안 이요국 주변 바다를 지배한 고노 가문은 센고쿠 말기에 멸망하고, 에도 시대에는 가토 요시아키가 마쓰야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마쓰야마는 문화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며, 메이지 시대에는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 등을 배출한다. 시키의 친우였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도 한때 마쓰야마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27 한국, 중국의 역사·문화가살아 숨 쉬는 교역의 창구
후쿠오카 福岡
• 해당 지역 후쿠오카현
• 도시 인구 약 153만 명(2020년 기준)

규슈 서북부에 자리한 후쿠오카시는 일본의 대도시 중에서도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 가장 가까워 고대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어 왔다.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견당사의 파견, 가마쿠라 시대에 일어났던 원나라의 공격, 센고쿠 시대에 이루어진 포르투갈 상인과의 무역 등 역사의 많은 장면에서 해와의 관계가 발견된다.
후쿠오카라는 지명이 태어난 것은 에도 시대에 이 땅을 다스린 구로디 나가마사가 하카타 서쪽에 새롭게 후쿠오카성을 지은 이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지금도 ‘하카타‘라는 이름에 애착이 간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28 일본 속의 세계, 서양 문화와 종교의 출발지
나가사키 長崎
• 해당 지역 나가사키현
• 도시 인구 약 43만 명(2020년 기준)

기독교의 교회와 중국풍의 불교 사원 등으로 이국적인 정서가 감도는 나가사키는 항구에 적합한 리아스식 해안을 갖추고 있어 중세부터 무역항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포르투갈인이 내항하여 기독교 문화가 퍼지지만, 에도 막부가 성립되면서 기독교는 탄압 받고 서양과의 무역 창구는 인공섬 데지마의 상관商館으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사키는  귀중한 외래문화의 발신지가 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메이지유신 지사들이 모여들고, 메이지 이후에으로만도 최신 조선소가 지어진다. 그야말로 일본의 근대 문화를 크게 견인했던 항구도시이다.

29 일본을 바꾼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고향
가고시마 鹿児島
• 해당 지역 가고시마현
• 도시 인구 약 58만 명(2020년 기준)

고대의 가고시마현 일대(사쓰마국, 오스미국)는 하야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다. 그 토양은 2만 년 이전의 칼데라 대분화 때문에 화산회토 등의 분출물로  뒤덮여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에 사쓰마와 오스미의 지배자가 된 시마즈 가문은 남쪽 바다로 트인 입지를 살려 류큐, 대륙 등과의무역에 힘을 쏟고 가고시마에 도시를 건설했다. 실무 능력이 뛰어나고 최신 기술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던 사쓰마번은 메이지유신을 이끌어 내는 세력이 되었다.

30 400년 류큐 왕국의문화와 얼을 간직한 도읍
나하 那霸
• 해당 지역 오키나와현
• 도시 인구 약 31만 명(2020년 기준)

난세이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오키나와 본섬은 고대부터 일본 열도와 대륙,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계지로서 번영해 왔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를 가진 오키나와에서는 15세기에 슈리를 통치 조직의 중심인 왕부로 삼은 류큐 왕조가 세워지고, 슈리 바로 서쪽에 자리한 나하가 무역항으로서 발전해 간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러 섬 전역이 격전지가 되었던 오키나였지만, 오늘날에는 재건된 슈리성을 비롯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에 이끌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2019년의 화재로 인해 슈리성의 주요 건물은 재차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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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0년에 걸친센고쿠 호조 가문의 왕궁
오다와라 小田原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19만 명(2020년 기준)
간토를 대표하는 명성 오다와라성은 옛날에는 규모가 작은 성이었다. 간토로 내려간 호조 소운은 모락으로 이 성을 빼앗고 간토 제패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 자손들도 군사와 민정 양쪽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오다와라는 선진적인 도시가 된다.
에도 서쪽의 현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와라는 에도 막부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성 밑은 도카이도에서도 손꼽히는 역참 마을로서 번영을 구가했는데, 여행자들은 여기서 여장을 꾸려 험준한 하코네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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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초기에 15만 명 정도였던 에도의 인구는 18세기 전반에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통계 방법에 따라차이는 있지만, 당시 인구 100만의 도시는 베이징, 런던 등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808개의 마을을 거느린 대에도‘ 라는 말은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시대에 한 마을(가옥 20~30채 정도의 마을 공동체)당한 사람만 영업이 허가된 이발사가 808 명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후에도 에도는 확장을 거듭하여19세기에는 1,700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지진과 전쟁 속에서 지켜낸 번영
에도 시대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868년 7월, 에도는 ‘도쿄‘로 명칭을 바꾼다. 문자대로 교토의 동쪽에 있는 도읍‘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그때까지 교토에 있었던 천황의 거처가 에도성으로 옮겨지고 도쿄는 명실상부하게 일본의 수도가 된다. 이때 신정부의 수장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오사카에 수도를 두는 것도 고려했지만, 정무 청사도갖추어져 있는 도쿄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부흥을 이룩한 도쿄는 쇼와 시대에 다시 비극을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쿄 대공습이다. 1944년 11월 시작된 미군 비행기의 공중 폭격은 106회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3월의 대공습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패전 후 도쿄도의 부흥은 간토 대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구획 정리, 새로운 간선도로의 부설, 그리고 녹지대의 조성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가 주도하는 일본 부흥 계획에 저촉되는 사례도 있어 사업 규모는 어쩔수 없이 축소되었다. 그 결과 건설이 예정되어 있던 폭 100미터 규모의 도로는 실현되지 못했고, 번화가를 비롯한 도내각 지역에는 다시 목조 가옥의 밀집 지대가 생겨났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전후 일본과 도쿄의 경제 규모는 세제 개혁과 한국전쟁의 특수로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하나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에는 두 번째 하계올림픽이 개최되는 세계 도시 도쿄. 그 번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COVID-19로 인해 2021년여름에 개최됨).

09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고발신한 문화의 입구
요코하마横浜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376만 명(2020년 기준)
도쿄만 연안의 항구 중에서도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알맞고 대도시인 도쿄와 가까운 요코하마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무역항이 되었다.
가마쿠라와도 인접한 입지이기 때문에 요코하마 일대의 항만은 중세부터 이용되어 막부 말기의 개항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개항 후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고, 국가 프로젝트인 생사수출을 배경으로 철도가 부설되고 항구가 보수됨으로써 첨단 문화의 입구가 된 항구도시의 뿌리를 살펴보자.

꾸준한 발전으로 ‘일본 최초‘가 된 항구붉은 벽돌 창고가 늘어선 요코하마는 서양풍의 세련된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막부 말기에 개항한 이래 잇달아 서양의 물자가 유입된 요코하마는 첨단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발신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일간지 간행, 은행 설립, 철도와전화 부설, 맥주 양조장과 서양풍 호텔 건설 등 다수의 분야에서 ‘일본 최초‘의 땅이 되었다.

열강의 요구를 물리치고 개항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제독 페리가 우라가(현재의 요코스카시)에 내항하여 막부에 개국을 요구한다. 이듬해 페리가 다시 찾아와서 현재의 나카구에 있는 요코하마무라에서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름은 만 쪽으로 가로로 긴 곳이 툭 튀어나온 지라는지금은 매립으로 완전히 지형이 바뀌었지만, 요코하마무라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0. 유구한 역사와 문학의 향기가스며든 천혜의 요새
가마쿠라鎌倉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17만 명(2020년 기준)
수많은 명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도 가마쿠라. 도시의 상징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는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을 모신 신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 오래된 신사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거리를 만들었다. 입지 면에서는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산의 표면을 도려내 뚫은 길은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든 닛타 요시사다의 대군을 괴롭혔다.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가마쿠라는 차츰 쇠퇴기를 맞이한다. 근세에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메이지 이후에는 많은 문화인이 옮겨와 살았다.

가마쿠라의 매력을 세상에 널리 알린 미토 고몬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여행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마쿠라. 대표적인 관광지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와 고도쿠인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은 둘다 1,000년 가까운 역사가 있지만, 끊임없이 참배객으로 북적였던 것은 아니었다. 무로마치 후기의 가마쿠라는농업과 어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던 한촌이었다.
가마쿠라가 지금 같은 관광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든 것은미토 고몬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이다. 미쓰쿠니는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를 방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240개가 넘는 명소와 경승지를 정리하여 『신편 가마쿠라 지리지라는 서적을 펴내도록 했다. 이 문헌은 지금으로 보자면 여행 가이드북으로, 가마쿠라는 에도 중기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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