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앙과 하이테크 산업이공존하는 ‘동양의 스위스‘
스와 諏訪
• 해당 지역 나가노현
• 도시 인구 약 5만 명(2020년 기준)

산악 지대가 많은 일본에는 내륙 분지에 지어진 도시가 많다. 산지가 85퍼센트를 넘는 나가노현 중부에 자리한 스와는 대표적인 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스와호 주변에는 고대에 스와 대사가 지어져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참배객이 찾고 있다. 스와 대사의 신작을 맡은 스와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중세부터 스와의 지배권을 줄곧 유지했다. 평지가 적어 벼농사에는 부적합하지만 긴키 혼슈 중앙부를 차지(일본하는 지방으로 미에현, 시가현, 교토부, 오사카부 효고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의 총칭옮긴이)에서 간토, 도호쿠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스와는 해안 도시에는 없는 독자적인 역사가 있다.

13 일본을 넘어 세계로뻗어 나간 국제 무역항
니가타 新潟
• 해당 지역 니가타현
• 도시 인구 약 81만 명(2020년 기준)

근세 이전의 니가타는 동해 연안에 흩어져 있는 항구 마을의 하나였다. 그러나 니가타에는 수량이 풍부한 시나노강이 흐르고 있었고, 이후 수운의 중심지가되어 동해 연안 굴지의 항구로 발전했다.
현대에 이르러 니가타는 외국과 많은 항로로 연결되어 국제 무역항을 둔, 동해 연안에서 으뜸가는 항만도시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니가타가 항구와 더불어커졌는지 역사를 더듬어 보자.

14 사찰에서 발전한유네스코 창조 도시
가나자와 金沢
• 해당 지역 이시카와현
• 도시 인구 약 46만명(2020년 기준)

일항종一同宗 (신란을 종조로 하는 일본 불교 일파 오늘날에는 정토진종 혹은 진종이라고 불린다 - 옮긴이)의  지나이초(무로마치 시대에 정토진종 등의 사찰이나 도량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치 취락 - 옮긴이)에서  출발한 가나자와였지만, 마에다 가문의 통치 아래 122만 석 영지의 가가번에 걸맞은 조카마치가 형성되어 간다. 그렇지만 그 도시 건설 과정의 이면에서는 에도 막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심을 엿볼 수 있다.
역대 번주의 문화 진흥 정책으로 가나자와에는 금박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 공예가 뿌리를 내렸다. 이런 공예 문화는 이도 시대의 분위기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시가지의 경관과 더불어, 가나자와 고유의 매력을 보여 주고 있다.

15 화려한 문화가 녹아 있는일본 제1의 신도시
나고야 名古屋
• 해당 지역 아이치현
• 도시 인구 약 230만 명(2020년 기준)

도카이 지방의 경제·문화의 중심지인 나고야는 고대부터 아쓰타 신궁의 소재지였다. 이 땅이 요충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센고쿠 시대에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 서부 - 옮긴이) 출신이던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에도 시대 나고야에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조카마치로서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어 간다.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드물게 폭이 100미터나 되는 도로가 놓이는 등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특한 도시를 만들었다. 에도(도교)의 방침에 얽매이지 않으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상술이 빼어난 나고야 문화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16 일본의 모든 공물이모이는 신의 도시
이세 伊勢
• 해당 지역 미에현
• 도시 인구 약 13만 명(2020년 기준)

이세는 일본의 도시 중에서도 신사를 중심으로 발전한 몬젠마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승에 따르면 2,000년쯤 전에 왕실의 선조로 알려진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시는 신궁(이세 신궁)이 이세평이 남단에 지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도카이도추히자쿠리게東海道中膝毛(야시로와 기타하치라는 두 남자가 도카이도를 따라 여행하면서 겪는 이야기 - 옮긴이)에 적혀 있듯이
‘이세 참배‘가 유행하여 전국에서 많은 참배자가 모여든다. 그러나 중세까지 이세 신궁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에게만 참배가 허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에도 시너역참 마을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몬젠마치 이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17 천황이 선택한1,300년 역사의 시작
나라 奈良
• 해당 지역나라현
• 도시 인구 약 36만 명(2020년 기준)

겐메이 천황에 의해 건설된 나라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 그 모델은 당의 수도 장안이며, 건설지 선정과 도시계획도 고대 중국의 사상에서 버워 왔다. 당시 헤이조쿄에는 고위 귀족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생활 수준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이윽고 수도로서 부족한 면이 다양하게 드러나면서 헤이조쿄는 버림을 받는다. 헤이조쿄가 있던 자리는 오랜 세월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들판이 되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장인의 발안으로 옛 도시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자는 운동이 일어나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8 육지의 중계무역으로번영한 금융의 중심지
이마이 今井
• 해당 지역 나라현
• 도시 인구 약 12만 명(2020년 기준)

일향종 사찰의 지나이초로 탄생한 이마이는 사카이와 나라를 연결하는 가도를 따라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물류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에도 시대에는 그 재력에 눈독을 들인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지만, 조닌(에도 시대에 도시에 사는 상공인의 총칭 - 옮긴이)에 의한 자지 또한 여전히 인정되었다.  부호들은 금융업으로 더욱 부를 쌓아 ‘야마토의 돈은 이마이에 7할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번성하게 된다. 이러한 번영의 배경에는 조닌에게 부과된 상세한 생활 규칙이 있었다.

19 히데요시가 초석을 다진일본 유수의 경제 일번지 오사카 大阪
• 해당 지역 오사카부 • 도시 인구 약 269만명(2020년 기준)

세토 내해 동쪽 끄트머리에 면한 오사카는 예부터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의 교류 거점으로 번영하였고, 고대에는 도성이 세워지기도 했다. 중세에 들어서자종교 세력인 혼간지가 사상 최대 규모의 지나이초를 구축한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 오사카성을 짓고, 전국의 다이묘를 지배했다.
상인의 도시이기도 했던 오사카는 에도 막부도 중시하여 전국에서 물자와 돈이 모이는 경제 도시로서 발전했다. 이 시기에 양성된 상인 기질과 활기 넘치는풍토는 현대의 오사카에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을까?

20상인의 자치로 발전한 ‘동양의 베네치아‘
사카이 堺
• 해당 지역 오사카부
• 도시 인구 약 84만 명(2020년 기준)

오사카와 교토, 고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간사이의 중핵 도시 사카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카이는 무로마치 시대 일본 최대의 상업 도시였다. 그 성장 과점을 더듬어 보면, 산업이 융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점은 고훈 시대(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 각지에서 거대한 고분이 축조되던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 약 400년 동안을 가리킨다 - 옮긴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사카이는 자치 도시로서의 측면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 상인들은 100년 동안이나 권력자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다양한 지배층이 난입한 나이에 있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자치를 확립한 것일까?

21 일본을 간직한 천년의 도시
교토 京都
• 해당 지역 교토부
• 도시 인구 약 147만 명(2020년 기준)

헤이안 천도 이래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신사와 사찰을 비롯한 각지의 유적과 예스러운 제례는 지금도 문화유산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황족, 공가(조정에 출사하여 공무를 맡아 하는 문신 귀족과 관리 - 옮긴이), 무가(군사를 주무로 하는 관직을 가진 가문의 총칭 - 옮긴이)가 혼재하는 교토는 여러 차례 동란의  무대가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교토는 어떤 역사를 밟으며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로 부활하게 되었을까?

22 이국적 낭만과 지진의 아픔이공존하는 국제 도시
고베 神戸
• 해당 지역 효고현
• 도시 인구 약 154만명(2020년 기준)

긴키 지방의 도시 중에서도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인 이진칸이 늘어선 고베는 세련된 항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고베는 고대부터 기나이의 도읍에 가까운 무역항으로 활용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일본의 수도가 될 뻔한 위상에 있었다. 막부 말기 무역항으로 개항되기 전에도 고베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연결하는 전국적인 해운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1,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항만도시가 숨기고 있는 갖가지 일화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23 원폭 투하에 가려진일본 최대의 상업지
히로시마 広島
• 해당 지역 히로시마현 • 도시 인구 약 119만 명(2020년 기준)

원자폭탄으로 도시가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지만, 시민의 노력으로 비약적인 부흥을 이루어 낸 히로시마, 그 역사는 세토 내해로 흘러들어 가는 오타강의 치수와 간척이 쌓이고 쌓인 결과이다.
하천이 많고 수운이 편리했던 히로시마는 센고쿠 시대에 모리 가문이 하구를 간척해서 히로시마성을 쌓았으며, 에도 시대에는 세토 내해에서 으뜸가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메이지유신 후에는 주고쿠 지방에서 육상 운송의 거점이 되어 번영을 누렸다. 삼각주에 펼쳐진 물의 도시는 어떻게 쌓여진 것일까?

24 미야자키 하야오에게영감을 준 작은 어촌
도모노우라 鞆の浦
• 해당 지역 히로시마현
• 도시 인구 약 45만 명(2020년 기준)

동서 방향에서 세토 내해로 흘러들어 오는 조수는 히로시마현 동부에 자리한 도모노우라에서 맞부딪친다. 그래서 도모노우라는 조류를 이용하여 배를 띄우기에 적합했다.
고대부터 기나이와 규슈를 연결하는 해로의 요충지였던 도모노우라는 여러 차례 전장이 되기도 했다. 센고쿠 말기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이곳으로 도망쳐 오는 등 도모노우라는 일본사의 다양한 장면에 등장한다. 에도 시대 후기 이후에는 조류에 의존하지 않는 항해술의 발달로 점차 쇠퇴하지만, 도모노우라에는 옛날의 풍경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25 오우치 문화가 꽃피운 ‘서쪽의 교토‘
야마구치 山口
• 해당 지역 야마구치현
• 도시 인구 약 19만 명(2020년 기준)

오늘날에는 대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야마구치지만, 한때는 교토와 견줄 만한 선진 도시인 시대가 있었다. 그 번영은 오우치 가문에서 시작된 것이며 교토를모방한 도시에서는 ‘오우치 문화‘가 꽃을 피웠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역에도 정력적이었던 오우치 가문은 막대한 재력과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지만, 이윽고 중신의 모반을 계기로 멸망한다. 그들을 대신해 보초 2국(나가토국과 스오국을 합쳐 이르는 말, 조슈번을 가리킨다 - 옮긴이)을 다스렸던 모리 가문은 막부 말기에 하기에서 야마구치로 정청을 옮기고.
이 땅에서 막부 타도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26 나쓰메 소세키가 사랑한시코쿠의 온천 마을
마쓰야마 松山
• 해당 지역 에히메현
• 도시 인구 약 50만 명(2020년 기준)

세토 내해는 규슈 지방과 긴기 지방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로로서 번성했다. 시코쿠 서부에 자리한 이요(현재의 에히메현) 북부는 해상 교역의 중계지였다. 이요 북부에서도 도고온천이 있는 마쓰야마는 고대부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중세 동안 이요국 주변 바다를 지배한 고노 가문은 센고쿠 말기에 멸망하고, 에도 시대에는 가토 요시아키가 마쓰야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마쓰야마는 문화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며, 메이지 시대에는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 등을 배출한다. 시키의 친우였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도 한때 마쓰야마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27 한국, 중국의 역사·문화가살아 숨 쉬는 교역의 창구
후쿠오카 福岡
• 해당 지역 후쿠오카현
• 도시 인구 약 153만 명(2020년 기준)

규슈 서북부에 자리한 후쿠오카시는 일본의 대도시 중에서도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 가장 가까워 고대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어 왔다.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견당사의 파견, 가마쿠라 시대에 일어났던 원나라의 공격, 센고쿠 시대에 이루어진 포르투갈 상인과의 무역 등 역사의 많은 장면에서 해와의 관계가 발견된다.
후쿠오카라는 지명이 태어난 것은 에도 시대에 이 땅을 다스린 구로디 나가마사가 하카타 서쪽에 새롭게 후쿠오카성을 지은 이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지금도 ‘하카타‘라는 이름에 애착이 간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28 일본 속의 세계, 서양 문화와 종교의 출발지
나가사키 長崎
• 해당 지역 나가사키현
• 도시 인구 약 43만 명(2020년 기준)

기독교의 교회와 중국풍의 불교 사원 등으로 이국적인 정서가 감도는 나가사키는 항구에 적합한 리아스식 해안을 갖추고 있어 중세부터 무역항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포르투갈인이 내항하여 기독교 문화가 퍼지지만, 에도 막부가 성립되면서 기독교는 탄압 받고 서양과의 무역 창구는 인공섬 데지마의 상관商館으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사키는  귀중한 외래문화의 발신지가 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메이지유신 지사들이 모여들고, 메이지 이후에으로만도 최신 조선소가 지어진다. 그야말로 일본의 근대 문화를 크게 견인했던 항구도시이다.

29 일본을 바꾼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고향
가고시마 鹿児島
• 해당 지역 가고시마현
• 도시 인구 약 58만 명(2020년 기준)

고대의 가고시마현 일대(사쓰마국, 오스미국)는 하야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다. 그 토양은 2만 년 이전의 칼데라 대분화 때문에 화산회토 등의 분출물로  뒤덮여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에 사쓰마와 오스미의 지배자가 된 시마즈 가문은 남쪽 바다로 트인 입지를 살려 류큐, 대륙 등과의무역에 힘을 쏟고 가고시마에 도시를 건설했다. 실무 능력이 뛰어나고 최신 기술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던 사쓰마번은 메이지유신을 이끌어 내는 세력이 되었다.

30 400년 류큐 왕국의문화와 얼을 간직한 도읍
나하 那霸
• 해당 지역 오키나와현
• 도시 인구 약 31만 명(2020년 기준)

난세이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오키나와 본섬은 고대부터 일본 열도와 대륙,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계지로서 번영해 왔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를 가진 오키나와에서는 15세기에 슈리를 통치 조직의 중심인 왕부로 삼은 류큐 왕조가 세워지고, 슈리 바로 서쪽에 자리한 나하가 무역항으로서 발전해 간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러 섬 전역이 격전지가 되었던 오키나였지만, 오늘날에는 재건된 슈리성을 비롯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에 이끌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2019년의 화재로 인해 슈리성의 주요 건물은 재차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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