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란?
日本史, Japanese History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본의 역사를통해, 일본 및 일본인에 대한 이해 도모를 목표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교류가 가장 많았던 일본을 바로 알기 위한 전제로서 일본의 역사에 대한정확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한국에서의 일본사 연구는 한국사 연구가 보다유기적이고 비교사학적으로 발전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의 해석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는 데기여하고 있다. - P5

연호(年號)
특정 군주 즉위 후 통치 기간을 일컫는 용어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천황의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로, 일본 역사상 천황의 가문이 한 번도 바뀐적이 없기에 천 년이 넘게 이어져오는 전통이다. 근대 일본이 만들어진 과정을 ‘메이지(여성) 혁명‘이 아닌 ‘메이지유신‘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연호로는 ‘메이지‘, ‘헤이세이‘, 서기 2019년부터 사용하고있는 ‘레이‘ 등이 있다. - P6

막부(幕府)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천황을 신앙적 존재로 두면서 실질적으로 국가를다스렸던 무사 정권을 말한다. 이는 각 지방에 영주를 보내 통솔케 하는 일본식 봉건제 체제였으며, 막부의 수장인 ‘장군(정이대장군이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에도(도쿠가와) 막부를 끝으로 막부 시대는 막을 내리고메이지유신이 선포되면서 근대 일본이 열리게 된다. - P6

사무라이(侍)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 계급을 말한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 모습은 그이전 시대와 많이 달라진다.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게 되었고, 토지를 소유하는 대신 주군에게서 봉록을 받는 존재로 변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봉건제가 폐지되면서 사무라이 계층은 소멸되었다. - P6

번(藩)
막부 시대 당시 봉건제의 기반이 되었던 영지를 가리킨다. 이때 각 지방의영주를 ‘번주‘ 혹은 ‘대명‘이라고 한다. 막부의 영향력이 약해질수록 반대로번의 세력이 강해졌다. 번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번을 ‘웅번‘이라고 하며, 대표적인 웅번인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후 막부를 무너뜨리게 된다. - P6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명치유신‘이라고도 하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정치·경제·사회·군사 전 분야에 걸쳐 서구화에 성공한 일련의 대변혁 과정을말한다. 보통 1853년의 개항부터 1868년 메이지 원년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서양의 아래로부터 시작된 시민 혁명과는 달리 지배 계급인 하급 사무라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개혁이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 P7

흑선 사건(黑船事件)
1853년과 1854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함선이 일본으로 와 문호 개방을 강제한 사건을 말한다. 함선의 선체가 검은색이었기에 ‘흑선내항‘이라고도불리며, 결국 미일화친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는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막부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 P7

존왕양이尊王攘夷)
‘존황양이‘라고도 하며 ‘천황의 이름을 높이고(존왕), 외세를 배격(양이)‘하자는 표어로,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존왕‘과 ‘양이‘는 막부 타도를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를 옹호하는 좌파들이 정리되면서 존왕양이 또한 유명무실해졌다. - P7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반납한 사건이다. 이전까지 ‘대정위임론‘을 토대로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장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면서, 에도 막부와 막부 시대의종언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곧이어 메이지유신이 선포된다. - P7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선 우선 일본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지금의 일본을 만든 메이지유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 P10

일본역사 중에서도 근대 일본의 출발점인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던 네인물을 통해 일본 역사와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한다.
이들 네 인물은 요시다쇼인,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다. - P11

분발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허세를낳기도 한다. 전자는 "까짓 것 일본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해"라는 자세고, 후자는 "일본 역사에서 배울 게 뭐 있나"
라는 태도다. 그러나 어느 나라 역사이건 간에 배울 게 없는 역사는 없다. 더구나 2000년 동안 나름대로 고도의 문명을 일궈온 이웃나라 역사에서 배울 게 없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평소 매사에 지성적인 자세를 취하는 분들도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를 가끔 보았다. 피해의식이 이성적 태도를 방해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 P16

우리는 모두 하늘이 펼쳐놓은 그물망 속에서 산다. 달리 말하면 시대적 제약이다. 역사상 위업을 이룬 인물들은 이 그물망의 한 부분을 뚫고 나간 사람들이다. 이들의 영웅적 활약에만 흥미본위로 집중하다 보면 영웅사관에 빠지거나 궁중사극의 재판이 될 것이고, 그물망 분석에만 치중하다 보면 역사에서 인간의 주체성은희미해질 것이다. 이 책은 이 양자 간의 긴장관계를 항상 염두에 둘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20

우리가 역사상 인물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 영웅전, 위인전을 읽는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어떤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았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위인도 자신의 시대적 제약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웅과 위인은 그 시대적 제약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한 겹, 두겹, 혹은 세 겹 벗겨낸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인물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당시 일본의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 P21

18세기 전반 조선에서 영조가 통치하던 무렵, 일본 인구는 3000만 명이 넘는다. 우리 인구가 그에 이르는 것은해방 무렵이다. 당시 조선 인구는 많이 잡으면 1500만 명이지만 대략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지금 한일 인구 비율과 일치한다. - P22

다음으로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는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 이게 조선과 가장 다른 점이다.
조선도 농업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밭작물 생산력은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힘으로 1000만 명이나되는 인구를 유지했던 것이다. - P23

예를 들어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했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반드시 사회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당시 그들의 생각이그렇게 틀린 것도 아닌 것 같다. - P24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건재했지만, 막부는 다르다. 장군의 원래 이름은 정이 대장군 征夷大將軍 아닌가. 말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있는 자리다. 전쟁에서 지면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게 막부가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이유다. 실제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조슈번長州藩과의 전쟁에서 패한 게 결정타였다.  무력이 정통성의 원천이다. - P36

계급사관이 학계에서 유행할 때에는 변혁은 반드시 피지배계급이 일으킨다는 전제 같은 것이 있었다. 역사학에서 실증도 하기 전에 전제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땐 그랬다. 이 사관에 잘들어맞는 게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었다. 귀족지배는 부르주아가 부르주아 지배는 프롤레타리아가 타도했기 때문이다. 중국혁명은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농민이 수행했다. 이러니 기존의 계급사관과 맞지 않아 만들어진 것이마오쩌둥 이론이었다. - P43

요시다 쇼인은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불렀다. 내가 봐도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젊은 인재들이 그에게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는 그물코를하나하나 찾아가며 그물망을 돌파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온몸으로 거기에 들이받은 사람이었다. 무모하다면무모했다. "지성을 다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신조다. 쇼인은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지성 탓인지 그가 죽은 직후부터세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P48

뒤에 나오겠지만 사카모토료마도 이 무렵 고향의 난학자에게서 해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이어 일본 해군 탄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가쓰 가이된다.
의제자가사무라이는 원래 해군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창검술, 기마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만큼해군 육성이라는 발상의전환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쇼인도, 료마도 이런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어버리고해군 양성의 절박성을 바로 간파했다. 역사의 갈림길은 이런 데서 비롯된다. - P63

팽창의 발판으로 주목한 울릉도
흥미로운 것은 쇼인이 해외팽창을 하기 전에 그 발판으로울릉도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그는 울릉도가 조선에 속해 있어 진출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76

1885년에는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거하는 사건으로 일본이 바짝 긴장한 적도 있다. 한반도 어딘가에 서양세력이거점을 만드는 것은 근대 일본이 초지일관 반대해왔던 일이었는데, 그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 P80

독립불가지 3천 년이 된 대일본이 하루아침에 다른한사람의 속박을 받는 것을, 혈기가 있는 자가 보고도 참을 수있겠는가. 나폴레옹을 일으켜 ‘프라이하잇! vrijheid, 자유의 네덜란드어‘ 이라고 부르짖지 않으면 뱃속의 갑갑함을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본디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작년 이후 미력이나마 분골쇄신해왔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헛되이감옥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이런 내 생각을 함부로 말했다가는 일족에 화가 미치겠지만 지금의 막부나 제후는 이미 취인이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망굴기하는 사람이나오길 바라는 것 말고는 믿을 게 없다.(기타야마 야스요에게보낸 서한) - P89

그 유명한 초망굴기론이다. ‘초망‘이란 우거진 풀, 잡초라는 뜻이니 권력을 지니지 않은 재야나 시정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 P89

사형판결을 예상한 10월 말, 쇼인은 『유혼록』을 쓰기 시작하여 하루만에 완성했다. 맨 끝에는 ‘10월 26일 황혼에 쓰다‘라고 쓰여 있다. 처형 하루 전이었다. 다음 날 형장으로 가면서는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해 죽는다. 죽어서도주군과 부모를 배신하지 않는다. 천지의 일은 유유하며 신명이 모든 걸 비추고 계신다"라는 시를 읊었다. - P93

형장에 도착하여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는 다시 절명시를남겼다.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일본 혼 " - P94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화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걸 주저하고 있을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우리가 한국병합을 생각할 때는 이토히로부미뿐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 휘하의 가쓰라 타로내각을 연구해야 할 이유다. - P99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리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근엄하고 살벌한 메이지유신 시기에 드문 일이다.
그는 "난 일부러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다"는 희대의 낙천가였다. 대단한 검객이면서도 암살이나 할복보다는 바다와 무역을 좋아했다. 막부를 미워하면서도무력토벌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선호했다. 삿초맹약과대정봉환은 그의 스타일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메이지유신이 그의 명랑함을 닮았더라면 근대 일본은 좀 더세련됐을 거다. - P102

"세상에 태어난 것은무언가를 이루기위해서다"
사카모토 료마 - P103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매진했던 박정희에게도 이순신은 좋은 대상이었다.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요소인 반일주의에 그만한 좋은 소재는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순신도 무인이라는 덤도 있었을 것이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김유신이 민족통일의 화신이 된 것도 비슷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상 유명인물이란 것은 특정 시기에, 특정 세력에 의해, 특정한 이유로 현창된 것이 쌓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가 ‘역사적 (historic이 아닌historical) 산물‘인 것이다. - P105

어떤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리고 동상과 지폐초상으로 등장하는가는 그 사회의 사상과 지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분들이 훌륭한 건 분명하지만, 그 많고 많은 위인들 중 하필 그분들인 것은 우리사회의 열망이 그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이퇴계, 이율곡, 신사임당, 이순신, 세종대왕.……  이들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이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에 무슨 문제는없는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 P106

· 한시라도 충효를 잊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것
• 물건에 마음 빼앗겨 돈을 낭비하는 일이 없을 것
· 여자에 빠져 국가대사를 잊는 일이 없을 것(『사카모토 료마 전집』, 이하 료마관련 서한은 이 책에 의거함) - P111

 ‘오늘밤 남몰래 계획한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공께서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공을 찔러 죽이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지금 공의설을 듣고 나니 제 고루함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부터 공의 문하생이 되겠습니다.‘(『추찬일화追贊一話』) - P125

이때 료마는 새로운 국가 구상을 적은 「선중팔책」을 만들고, 이에 기반해 사쓰마를 끌어들였다.

정권을 천황에 반환한다.
상하의회를 설치하여 의원을 선출한다.
천하의 인재를 두루 등용하고 유명무실한 관직은 없앤다.
외국과의 교역을 확대한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다.
해군을 확대한다.
친병親兵, 친위대을 두어 교토를 수비한다.
금은 비율을 외국과 같게 한다. - P154

사이고는 ‘최후의 사무라이‘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이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급격한 서구화 변혁을 수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사무라이들의상실감을 그는 이해했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고 그 사이에 끼어 죽었다.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무도 그를 ‘반란의 수괴‘로 여기지 않았다.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사이고의 동상은 그에 대한 일본인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 P172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거다. 그 주인공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다. 물론 픽션이 많이 가미돼 있지만. 그 영화에서 보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모습이 지금 일본 사람들이 그에게갖고 있는 이미지라고 보면 된다. 사쓰마번 출신으로 다음에서 다룰 오쿠보 도시미치와는 한동네 죽마고우였다. 막부 토벌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메이지 정부의 개명정책(반사무라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무라이들과 함께 반란(서남전쟁을 일으켰다가 오쿠보에게 진압되었다. 전투 중 총탄을 맞자 옆의 부하에게 자기 목을 쳐줄 것을 부탁해 전사했다. 오랫동안 최후를 직감한 사이고가 할복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할복할 기력은 이미 없었던 것 같다. - P175

집은 사쓰마번의 성하정이자 인구 7만2000명으로 당시로서는 대도시였던 가고시마의 시모가지야초라는 동네였다. 이 동네를 답사하다 보면 ‘~의 탄생지‘ 라는 표지가 발길에 차일 정도로 많다. 하급 사무라이 집들이 70여 가구 모여 있던 이곳에서 사이고뿐 아니라 오쿠보도시미치, 오야마 이와오, 무라타 신파치, 도고 헤이하치로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해군대장이자 1874년대만 침공을 한 사이고 쓰구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둘째 동생으로 그 역시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 - P179

사족이지만 한국의 태극기는 참 독특한 국기다. 국기라는 것은 ‘national flag‘이니 그 나라의 민족성이나 고유성을 잘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일장기, 즉 히노마루인데,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일본의 시조가 아마테라스오미가미神, 태양의 여신이다. 일본의 국명을 보라. 일본日本, 해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본 국기에 해가그려져 있는 것은 정말 일본답다고 할 수 있다. - P184

반면 우리 국기에는 태극과 팔괘가 있다. 태극이라는 것은 성리학에서 이 우주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천이 되는어떤 요소를 가리킨다. 그게 서로 음양이 얽혀서 발현된 것이 이 세계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팔괘는 알다시피 삼경 중하나인 『주역』에서 우주의 구성 원리를 설명할 때 나오는도안이다. 그러한즉 태극기에는 한국을 표상하는 것이 없다. - P184

훗날 세계 공화국이 만들어지면 그에 적합할 깃발이다.
그럴 정도로 보편적인 의미를 담은 문양이다. 태극기를 볼때마다 한국의 사상, 문화에서 민족주의란 과연 어떤 개념이고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 P185

막부 측은 사쓰마, 조슈와 친한 가쓰 가이슈를 총사령관에임명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사이고와 가쓰는 회담을열어 평화적으로 에도성을 넘겨줄 것을 합의했다. 처절한내전을 코앞에 두고 이뤄진 극적인 타협이었다. - P199

흔히 권력자는 목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붕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위기가 심해질수록 더욱 강경한수단을 써서 권력을 유지하려 하다 문자그대로 붕괴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역사의 상례다. 그런데 이때 막부는좀 달랐다. 막부라기보다는 신임 장군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 P203

메이지 정부군이 에도성을 접수하고 나서 시내 치안이문제가 되었을 때 사이고는 이를 가쓰에게 부탁했다. "대담한 사이고는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이 난국 타개를 내게 맡겨버리고는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고 하고는 에도를 떠나버렸다. 이 막연한 ‘해주시겠지요‘라는 말에나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오쿠보 도시미치였다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일일이 지시했을 것이다.
사이고와 오쿠보의 우열은 여기에 있다." ‘사이고는 막연한사람‘, 사이고에 대한 가쓰의 평가다. - P211

거하다 삼걸이 다 죽은 후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고 사면을받은 후 화족, 귀족의 최고 지위인 공작의 작위를 받고 귀원 의장까지 역임한다. 또 은거 후에는 사진에 취미를 붙여 처첩을 대동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촬영과 온천즐기기에 열중했다. 인생은 새옹지마,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 P212

그러나 사이고는 급격한 정책에는 소극적이었다. 특히사무라이 계층에는 동정적이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 권력자들, 특히 죽마고우 오쿠보가 사치를 일삼는다고 불평을 했다. 천황 알현을 할 때 사이고가 평범한 옷차림으로나타나자 오쿠보는 나무랐지만, 사이고는 "촌놈이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어봤자다. 이대로 괜찮다"고 일갈했다. 이런 검소함과 도덕성이 사람들을 더욱 매료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는 도덕성만 가지고는 안 되는 법. 당시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은 기도와 오쿠보가 더 정확히 판단하고있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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