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전사
마이클 크라이튼 외 감독, 안토니오 반데라스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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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보고서] 『13번째 전사』
― 야만인의 땅에서 전우를 만나다

“내 이름은 아메드 이븐 파할란, 이븐 알라바스, 이븐 라시드 이븐 하마드.”

1999년 존 맥티어난 감독의 『13번째 전사』는 오래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거칠고 묵직한 바이킹 액션영화였다.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벤돌, 곰가죽을 뒤집어쓴 전사들, 산등성이를 거대한 불의 용처럼 내려오는 횃불의 행렬,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발할라를 이야기하는 불바이와 북구 전사들의 모습이 강하게 남았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이 영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실제 10세기 아랍 여행가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의 기록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 위에 고대 영웅서사시 『베오울프』의 이야기를 얹었다. 실존 인물을 전설 속으로 밀어 넣고, 신화 속 괴물을 인간으로 바꾸고, 서로 말조차 통하지 않던 아랍인과 북구인들을 열세 명의 전사로 묶는다.

한쪽에는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자부하는 바그다드에서 온 시인 아메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가 처음에는 야만인이라고 여겼던 북구의 전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사람인지 괴물인지조차 알 수 없는 벤돌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영화는 단순하지만 꽤 묵직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믿는 신도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과연 서로를 이해하고 목숨까지 맡길 수 있는가.

『13번째 전사』는 그 답을 열세 명의 전사들에게 맡긴다.


1. 바그다드의 시인, 사실상의 유배길에 오르다

아메드 이븐 파들란에게 세상의 중심은 바그다드다. 글을 읽고 시를 쓰며, 예법과 문명을 알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권력자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은 것이 문제가 되면서 머나먼 북쪽으로 사절 임무를 받아 떠나게 된다. 명목은 외교사절이지만 영화 속 아메드의 처지에서 보면 사실상 추방이고 유배다.

그렇게 문명의 중심에서 살던 시인이 자신이 ‘야만인의 땅’이라고 여기는 곳으로 밀려난다.

아메드가 처음 만난 북구인들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너무 다르다. 술을 마시고, 큰소리로 웃고, 싸우고, 죽은 왕을 불태우며 죽음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인다. 식사와 위생에 관한 습관조차 아메드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그에게 북구인들은 야만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구인들에게도 아메드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들보다 작은 몸집에, 그들이 보기에는 개만 한 아라비아 말을 타고 나타난 남쪽 사람이다. 커다란 북구식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본다.

영화는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메드가 북구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면 처음의 이 거리감이 더욱 중요하다.

처음에는 문명인과 야만인이었다.

마지막에는 전우가 된다.


2. 열세 번째 전사는 북구인이 아니어야 한다

불바이가 등장하면서 아메드의 개인적인 유배 이야기는 갑자기 영웅서사로 넘어간다.

불바이는 북구 전사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그가 말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떠벌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판단을 기다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그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다.

그런 불바이에게 흐로스가르의 나라에서 전령이 찾아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며,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무녀가 뼈를 던져 점을 친다.

그곳으로 갈 전사는 열세 명이어야 한다.

전사들이 하나씩 정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열세 번째.

열세 번째 전사는 북구인이 아니어야 한다.

그 한마디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던 아메드가 갑자기 전쟁에 끌려 들어간다. 아메드는 전사가 아니다. 불바이나 다른 북구인들처럼 전투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음을 명예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열세 번째 전사가 된다.

그래서 『13번째 전사』는 처음부터 강했던 영웅들이 괴물을 무찌르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사가 아니었던 아메드가 어떻게 그들 사이의 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 서로 목숨을 맡기는 전우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3. 벤돌, 괴물의 얼굴을 한 인간

흐로스가르의 사람들에게 벤돌은 평범한 적이 아니다.

안개와 함께 나타난다. 사람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가져간다. 시체를 먹는다.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공격한다. 산등성이를 따라 수많은 횃불을 들고 내려오는 모습은 거대한 불의 용처럼 보인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이 끝난 다음이다.

분명히 죽였는데 벤돌의 시체가 남아 있지 않는다. 자기편의 시체를 모두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벤돌은 점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칼에 맞아도 죽지 않는 놈들.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놈들.
죽은 사람을 먹는 놈들.
곰인지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놈들.

공포는 실제보다 더 큰 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불바이와 전사들이 벤돌을 상대하면서 그 공포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진다. 그리고 결국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다.

벤돌은 인간이다.

곰가죽을 벗기면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칼에 맞으면 피를 흘리고 죽는다.

나는 이 순간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괴물이라고 믿는 동안에는 싸울 방법이 없다.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싸울 수 있다.

『베오울프』에 등장하는 초자연적 괴물 그렌델을 영화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진짜 괴물을 등장시키는 대신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괴물이라고 믿게 된 인간 집단을 등장시켰다.

괴물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은 곧 공포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다.


4. 아메드는 귀로 배우고, 불바이는 눈으로 배운다

이 영화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북구인들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던 아메드가 모닥불 주변에 앉아 그들의 말을 계속 듣는다.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소음이다. 하지만 아메드는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반복되는 말을 듣고, 같은 상황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연결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단어가 들린다.

조금 뒤에는 문장이 들린다.

마침내 자신과 자기 어머니를 두고 농담하는 북구인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의 언어로 받아친다. 놀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말을 배웠느냐고 묻자 아메드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들었다고.

실제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외국어를 완벽하게 습득한다는 것은 영화적 과장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현실적인 어학학습을 보여주려는 장면이 아니다.

아메드가 북구인들의 세계 바깥에서 구경하던 사람에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아메드만 배우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메드가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불바이가 아메드의 글에 관심을 가진다.

불바이는 아메드에게 소리를 글자로 그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묻는다. 말을 소리로만 기억하는 사람의 눈에 문자는 ‘소리를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메드가 땅에 글을 쓴다.

불바이는 그것을 유심히 본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도 그 모양을 기억해 바닥에 써본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익힌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메드가 사용하는 문자를 보고 그것을 스스로 따라 써본 것이다.

이 장면이 참 좋다.

아메드는 귀로 북구인의 세계에 들어갔고, 불바이는 눈으로 아메드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다.

한쪽만 배우는 관계가 아니다.

아메드가 북구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불바이가 아랍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다만 상대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조금씩 들여다본다.

나중에 두 사람이 서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는 출발점은 어쩌면 칼을 함께 휘두른 순간보다 이런 작은 장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5. 벤돌보다 먼저 무너져 있던 나라

그러나 벤돌이 강한 이유를 벤돌에게서만 찾으면 안 된다.

흐로스가르의 나라는 이미 내부에서 약해져 있다.

마을은 제대로 된 방어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더 답답한 것은 밖에서 벤돌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데도 안에서는 권력과 후계를 둘러싼 의심과 다툼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 불바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정작 불바이가 도착해 백성들의 신뢰를 얻자 이번에는 불바이를 경계한다.

저 사람이 우리를 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왕국을 차지하려는 것인가.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왕자리 걱정부터 한다.

나는 이 대목이 단순한 곁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벤돌은 단결해 있다.

흐로스가르 쪽은 갈라져 있다.

벤돌은 자신들의 지도자와 신앙을 믿는다.

흐로스가르 쪽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벤돌의 정체조차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니 공포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불바이가 상대해야 했던 것은 벤돌의 칼만이 아니었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 서로를 믿지 못하는 내부의 불신까지 함께 상대해야 했다.

외부의 적 앞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권력욕과 의심.

어쩌면 벤돌보다 먼저 이 나라를 약하게 만든 진짜 적은 그쪽이었는지도 모른다.


6. 모두 죽일 수 없다면 뿌리를 친다

불바이는 벤돌을 한 명씩 모두 죽여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는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열세 명의 전사가 아무리 강해도 수적으로 압도적인 벤돌족 전체를 칼로 베어 없앨 수는 없다. 첫 전투부터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그러자 방향이 달라진다.

벤돌을 움직이는 뿌리를 찾아야 한다.

정신적 중심인 ‘어머니’, 그리고 뿔을 쓴 군사적 우두머리.

그 둘을 없애야 한다.

불바이 일행은 벤돌이 숨어 사는 동굴까지 들어간다. 폭포 뒤에 감춰진 동굴 안에는 그동안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상상했던 벤돌의 세계가 실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뼈와 시체, 식인의 흔적, 그리고 그 집단의 중심에 있는 벤돌의 어머니.

불바이는 마침내 그녀를 죽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에 당한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불바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런데 벤돌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벤돌을 전투로 이끄는 우두머리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에서 불바이는 죽어가는 몸으로 다시 일어나 그 우두머리와 맞선다.

우두머리가 죽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벤돌의 전사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물러난다.

열세 명의 전사가 벤돌족을 몰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싸움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었던 정신적 중심과 군사적 중심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이 전쟁의 승리는 숫자의 승리가 아니다.

적의 뿌리를 찾아 끊어낸 승리다.


7. 두 개의 기도, 그리고 불바이의 마지막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메드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한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고 적어두었던 기도문이 지금 다시 보아도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것과
생각하지 못한 모든 것,

우리가 말했던 모든 것과
말하지 않았던 모든 것,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과
행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신이시여, 부디 용서하소서!

아메드의 기도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는 전혀 다른 신을 믿는 북구 전사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보라, 저기 나의 아버지가 보인다.
보라, 저기 나의 어머니와 자매들, 형제들이 보인다.
보라, 태초까지 이어지는 내 민족의 혈통이 보인다.
보라, 그들이 나를 부른다.
그들은 내게 그들 가운데 자리를 잡으라 한다.
발할라의 전당에서,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그곳에서.

나는 이 기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살려달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적을 모두 죽이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다.

대신 죽은 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말한다.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있고, 태초부터 이어져 온 조상들이 기다리는 곳.

발할라의 전당.

죽음을 피하려는 기도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기도다.

이슬람교도인 아메드는 발할라를 믿지 않는다.

북구인들은 아메드가 믿는 알라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전투를 앞둔 순간 두 기도는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믿는 신과 죽은 자들에게 마음을 맡긴다.

같은 신을 믿어서 전우가 된 것이 아니다.

믿는 신이 다른 상태 그대로 서로를 위해 싸운다.

그리고 불바이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벤돌의 어머니에게 당한 독이 몸에 퍼져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자 불바이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불바이를 단순히 힘센 바이킹 전사로만 볼 수가 없다.

그에게 지도자는 뒤에서 사람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앞에 서는 사람이다.

불바이는 벤돌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린다.

그 순간 벤돌들은 싸움을 멈추고 물러난다.

나라를 구한 뒤 불바이도 조용히 죽는다.

왕좌처럼 보이는 자리에 앉아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 전 전사들이 읊었던 기도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발할라의 전당에서,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곳.

실제 바이킹들이 저 기도문을 그대로 읊었는가 하는 역사적 문제와는 별개다.

영화 속 불바이에게만큼은 그 기도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북구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바라보던 아메드도 이제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본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결국 목숨까지 내놓은 사람들이다.

종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살아온 세계도 달랐지만, 이제 그 차이보다 함께 흘린 피가 더 중요해졌다.

바그다드의 시인은 그렇게 열세 번째 전사가 되었다.


8. 볼가강의 롱십, 그래도 이것만은 못 넘어가겠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다가도 지도를 한번 펼치면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다.

불바이의 배다.

실제 이븐 파들란이 10세기 볼가강 유역에서 루스인들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스칸디나비아계 사람들이 발트해에서 동유럽의 강과 호수를 이용해 러시아 내륙으로 들어왔고, 볼가강 유역까지 교역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영화 화면에 실제로 등장하는 배다.

불바이가 타는 것은 몇 사람이 어깨에 둘러메고 옮길 수 있는 작은 카누나 하천용 조각배가 아니다.

분명 롱십 계열이다.

긴 선체에 여러 개의 노가 있고 돛대가 서 있다.

그리고 불바이 주변의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볼가강은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흐르는 강이 아니다.

발트해와 볼가강을 오가려면 여러 강과 호수를 이어가야 하고 수계가 끊기는 곳에서는 육상을 넘어야 한다.

흔히 바이킹의 동방교역로를 설명하면서 “배를 육지로 끌어 옮겼다”고 간단하게 말한다.

말은 쉽다.

배를 끌었다.

하지만 실제로 배를 물에서 육지로 꺼내는 순간부터 일이 시작된다.

짐을 내려야 하고, 선체를 물 밖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통나무나 썰매 같은 운반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으로 배를 끌어 분수령을 넘어야 하고, 다른 수계에 도착하면 다시 배를 물에 내려 띄워야 한다.

아무리 바이킹 배가 흘수가 얕고 다른 대형 선박보다 가볍다고 해도 영화에 나온 것은 분명 롱십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략 당시 메흐메드 2세가 함선을 육지로 넘겨 골든혼에 집어넣었던 일을 떠올린다.

오스만 제국은 국가였다.

군대가 있었다.

많은 인력과 물자, 가축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 국가가 비교적 짧은 육상구간을 넘기는 것조차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런데 불바이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다.

동인도회사처럼 곳곳에 지점과 인력과 물류망을 갖춘 거대한 상단의 주인도 아니다.

영화 화면에서 그 주변을 따라다니는 전사도 많지 않다.

그 인원으로 저 롱십을 몰고 볼가강과 발트해 사이의 수계를 오간다?

나는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바이킹이 볼가강까지 왔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올 수 있다.

물건도 올 수 있다.

실제로 교역망도 존재했다.

구간마다 배를 갈아탈 수도 있었을 것이고, 화물을 내려 육로로 옮긴 뒤 다른 강에서 다른 배에 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지의 인력과 현지 운송수단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복합적인 장거리 물류망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과 물자가 이동했다는 사실과 영화에 보이는 저 롱십 한 척을 소수의 불바이 일행이 그대로 끌고 다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길이 있다는 것과 저 배로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내게 이것은 단순한 옥의 티가 아니다.

실제 이븐 파들란이라는 인물을 끌어오고, 그가 실제로 볼가강에서 루스인들을 만났던 역사적 사실까지 이용한 영화라면 정작 그곳에서 다시 북유럽으로 이동하는 과정도 조금은 생각했어야 한다.

이 부분만큼은 지리와 수송에 관한 고증을 제대로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커다란 허점을 알고 난 뒤에도 『13번째 전사』가 싫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 이 영화가 결국 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여행가 이븐 파들란을 『베오울프』의 세계로 데려간 발상은 여전히 재미있다. 신화 속 괴물을 벤돌이라는 인간 집단으로 바꾼 것도 흥미롭다. 괴물의 공포를 벗겨내고 인간임을 확인한 뒤 그들의 정신적·군사적 중심을 무너뜨리는 과정도 좋다.

무엇보다 서로를 야만인과 이방인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함께 싸우면서 전우가 되는 과정이 좋다.

아메드는 북구인들의 말을 귀로 듣고 배운다.

불바이는 아메드가 쓰는 글자를 눈으로 보고 배운다.

아메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불바이는 마지막까지 발할라를 향한다.

어느 누구도 상대에게 자기 신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같은 신을 믿어서 친구가 된 것이 아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나누고, 같은 적과 싸우고, 서로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전우가 된다.

그래서 『13번째 전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도를 펼치면 롱십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지만, 불바이가 죽어가는 몸을 일으키는 순간 다시 영화를 보게 만드는 이야기.


발할라의 전당.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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