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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평점 :
[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로마 바로크
― 위대한 미술과 건축 뒤에 가려진 권력, 노동, 그리고 길
『난처한 미술이야기』 8권의 첫 번째 무대는 로마다.
책을 펼칠 때만 해도 바로크 미술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장 지나지 않아 미술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교황과 추기경이 나오고,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대응이 나오고, 성당과 광장, 도로와 수로가 이어졌다. 그림과 조각을 읽다 보니 어느새 도시와 권력의 역사를 읽고 있었다.
로마 바로크의 화려함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의 권력과 막대한 돈이 있었고, 예술가의 천재성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돌을 나르고 벽돌을 쌓고 높은 비계에 올라가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화려함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번 로마 바로크를 읽으면서 나는 자꾸 그 질문을 하게 되었다.
1. 위대한 건축물 아래에서 사라진 사람들
회화와 조각에는 대개 작가의 이름이 남는다.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베르니니라고 하면 작품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거대한 건축물은 다르다.
설계자의 이름은 남지만 실제 건물을 만든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이다. 돌을 채석한 사람, 운반한 사람, 비계를 세운 사람, 돌을 다듬은 사람, 벽돌을 쌓은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사라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공사를 서두르던 식스토 5세 시기에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투입되었고 야간에는 횃불을 밝히며 작업했다고 한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좋은 노동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완성된 돔을 올려다보며 미켈란젤로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서 횃불을 밝히고 일했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위대한 건축에는 늘 위대한 건축가가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건축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 예술을 사랑한다는 것과 문화유산을 존중한다는 것
앞서 『난처한 미술이야기』의 서문을 읽으면서 나는 ‘존중’이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 바로크를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를 아끼고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교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판테온 현관의 고대 청동이 뜯겨 나갔고, 상당량은 산탄젤로 성의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로마에는 이런 조롱까지 생겼다.
“야만인이 하지 않은 일을 바르베리니가 했다.”
예술을 사랑한 사람이 과거의 문화유산까지 존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 이르면 더 심하다. 뛰어난 미술품을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했지만, 갖고 싶은 작품을 얻는 방법은 권력자의 그것이었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페루자의 성당에 있던 제단화였지만 1608년 어느 밤 수도사들의 협조 아래 몰래 반출되어 로마로 옮겨졌고, 결국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소유가 되었다.
화가 주세페 체사리가 불법 무기 소지 혐의를 받자 그의 소장품 105점이 압수되었고, 교황 바오로 5세는 그것들을 조카 시피오네에게 넘겼다. 그 가운데에는 카라바조의 초기작도 들어 있었다.
도메니키노의 경우는 더욱 기가 막힌다. 보르게세가 그의 「아르테미스의 사냥」을 탐냈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라 도메니키노가 넘기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작품을 강제로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화가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림이 탐나는데 화가가 안 준다고 감옥에 처넣은 것이다.
이쯤 되면 미술 사랑이라기보다 권력을 이용한 소유욕에 가깝다.
오늘날 보르게세 미술관에 가면 수많은 명작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미술을 사랑하는 것과 미술을 존중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소유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 역시 같은 말이 아니다.
3.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십자가 아래 서기까지
로마 곳곳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했다.
로마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가운데 이집트에서 옮겨온 것들은 고대 로마에서 제국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수백 년이 흐른 뒤 교황들은 그것을 로마의 주요 광장과 성당 앞에 세우고 꼭대기에 십자가를 올렸다.
하나의 돌기둥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집트의 종교적 상징에서 로마 제국의 권력과 전리품의 상징으로, 다시 교황권의 상징으로.
식스토 5세가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옮겨 세우는 과정도 놀랍다. 수백 명의 인력과 수십 마리의 말, 수많은 권양장치를 동원해야 했다.
누군가는 저것을 미술사로 볼 것이고 누군가는 종교사로 볼 것이다.
나는 자꾸 공사부터 보였다.
저 무거운 돌을 어떻게 들었을까.
어떻게 운반했을까.
어떻게 세웠을까.
토목쟁이는 어쩔 수 없다.
4. 발로 뛴 개혁가, 카를로 보로메오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모든 사람이 권력과 예술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카를로 보로메오는 교구를 직접 돌아다니며 성당과 수도원을 살피고, 사제 교육을 정비하고, 교리교육을 확대했다. 책에 따르면 수백 개에 이르는 교리학교가 운영되었다.
그가 죽은 뒤 고향 아로나에는 높이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 내부로 들어가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동상이고, 훗날 자유의 여신상을 만든 바르톨디도 그 구조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거대한 동상도 흥미롭지만 나는 보로메오의 ‘발로 뛰는 개혁’ 쪽에 더 눈이 갔다.
교회가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성당을 짓던 시대에 직접 현장을 돌아다닌 성직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5. 식스토 5세가 한 일은 성당만이 아니었다
식스토 5세 역시 단순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권력을 과시했고 로마를 가톨릭의 중심도시로 재편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쿠아 펠리체 수로를 건설하고 도로망을 정비했다.
성당은 교황권의 얼굴을 만들었지만 수로는 시민에게 물을 공급했다.
여기서 나는 속으로 한마디 했다.
건축은 사치, 토목은 실용.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그래도 수로와 도로가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바꾼다는 점에서는 토목쟁이로서 괜히 어깨가 올라간다.
특히 식스토 5세는 주요 성당과 순례지를 도로로 연결했다. 의도는 종교적이었다. 순례자가 움직이고 교황권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야 했다.
그런데 길이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교황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다니고, 수레가 다니고, 물건이 이동하고, 장사가 이루어진다.
권력을 위해 만든 길도 결국 시민이 이용한다.
6. 길을 생각하다 톤유쿡이 떠올랐다
도로 이야기를 읽다가 돌궐의 톤유쿡이 생각났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한다”는 말이 흔히 톤유쿡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원문은 아니다. 다만 그가 돌궐의 힘은 정착과 성곽이 아니라 이동성에 있다고 보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톤유쿡에게 이동은 군사력이었다.
식스토 5세에게 이동은 종교와 도시를 조직하는 힘이었다.
시대도 장소도 목적도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움직임이 힘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벽은 막지만 길은 연결한다.
건축물은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사람이 움직여야 한다.
종교도 결국 길이 있어야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7. 금서와 화형, 감시와 검열
그러나 가톨릭이 미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사실만 보고 이 시대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는 없다.
교회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 후원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동시에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그릴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력이기도 했다.
금서목록이 있었고 종교재판이 있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1600년 로마에서 화형당했고 갈릴레오는 1633년 재판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베로네세의 그림은 종교재판소의 심문을 받았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나체에는 훗날 천이 덧그려졌다.
예술을 키운 손과 예술의 경계를 그은 손이 같은 손이었다.
그래서 바로크의 찬란함만 보고 있으면 한쪽을 놓치게 된다.
그 화려함 뒤에는 금서와 화형, 감시와 검열도 있었다.
8. 천지창조의 암흑버전,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그림을 처음 보면서 내가 떠올린 말은 이것이었다.
천지창조의 암흑버전.
화면 대부분이 어둡다. 그런데 결정적인 부분에 빛이 들어온다.
「성 마태오의 순교」에서는 살인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매장」에서는 죽은 그리스도의 육체에 빛이 떨어진다.
어둠의 배경, 빛의 사건.
한마디로 하면 『어둠 속의 사건』이다.
발자크의 소설 제목인데, 카라바조의 그림에도 제법 잘 어울린다.
그의 빛은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빛이 들어오는 순간 사건이 시작된다.
9. 카라바조, 그림은 천재, 삶은 파국
카라바조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성인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성인과 사도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상적인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주름지고 지친 얼굴, 더러운 발, 거리에서 만날 법한 사람의 몸을 하고 있다.
성 마태오의 순교도 성스럽고 장엄한 순교라기보다 로마 뒷골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처럼 보인다.
나는 이 점이 카라바조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인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얼굴 속에서 성스러움을 찾았다.
미술사적으로 왜 위대한지는 알겠다.
그러나 솔직히 그의 그림에 정이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너무 어둡고 거칠다. 빛은 강렬하지만 그 빛이 비추는 세계가 편하지 않다.
감탄은 하지만 내 곁에 두고 보고 싶은 그림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 카라바조의 삶까지 알고 나면 더욱 그렇다.
싸움을 일삼았고 결국 사람까지 죽였다. 살인 이후 로마를 떠나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전전했고, 교황의 사면을 기대하며 로마로 돌아오던 길에 1610년 생을 마쳤다.
그림에서는 전에 없던 세계를 열었지만 그의 삶은 끝까지 거칠었다.
그림은 천재, 삶은 파국.
그리고 카라바조의 빛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루벤스가 그 빛을 받아들였고, 네덜란드의 카라바조 추종 화가들을 거쳐 렘브란트에게도 이어졌다.
다만 빛의 성격은 달라졌다.
카라바조의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빛이라면, 렘브란트의 빛은 사람의 얼굴과 내면을 비추는 빛에 가깝다.
카라바조, 어둠의 배경, 빛의 사건.
렘브란트, 어둠의 배경, 빛의 인간.
10. 카라치는 신화를 그려도 종교화처럼 보였다
안니발레 카라치는 카라바조와 거의 같은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했지만 방향은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가 거리의 현실을 화면 안으로 끌고 왔다면 카라치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전적 아름다움을 다시 구성했다.
수많은 드로잉을 통해 인체와 구도를 연구했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파르네세 갤러리의 신화화를 보면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로마 신들의 사랑 이야기인데도 꼭 종교화처럼 보인다.
소재는 신화인데 그림의 언어가 르네상스와 교회미술의 장엄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라치는 신화를 그려도 성당 천장처럼 보이고, 카라바조는 성인을 그려도 로마 뒷골목처럼 보인다.
두 화가의 차이가 이보다 선명할 수 있을까.
11. 천장이 사라졌다
안드레아 포초의 천장화에 이르자 바로크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림을 그렸는데 천장이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실제 건축의 기둥과 그림 속의 기둥이 이어지고, 그 위에 다시 건축이 솟아오르다가 천장이 열리며 하늘이 나타난다.
실제 건축, 그림 속 건축, 열린 하늘, 천상의 세계.
고개를 들고 보면 천장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정해진 위치에서 바라보면 원근법이 정확하게 맞아 실제 건축과 그림의 경계가 사라진다.
카라치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면 포초는 천장 자체를 없애버렸다.
17세기의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12. 신들의 사랑이라지만, 여성에게는 사랑이 아니었다
베르니니의 「페르세포네의 납치」와 「아폴론과 다프네」는 기술만 보면 경이롭다.
대리석에 손가락이 들어가 살이 눌리는 것처럼 보이고, 다프네의 손끝에서는 잎이 돋아난다.
그런데 이야기를 알고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강제로 데려간다. 아폴론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다프네를 계속 쫓아간다. 다프네는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버리고 나무가 되어야 한다.
신들의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보다 권력과 폭력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제우스, 하데스, 포세이돈, 아폴론 같은 남성 신들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눈으로 읽으면 참 써글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물론 고대의 신들에게 오늘의 도덕을 그대로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오늘의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남성 신의 욕망이 사건을 시작하고, 여성은 납치되거나 도망치거나 변신해야 끝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베르니니의 조각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다.
13. 베르니니, 대리석은 뜻대로 했지만 땅은 뜻대로 하지 못했다
베르니니는 분명 천재다.
「페르세포네의 납치」에서 대리석을 살처럼 만들었고, 「아폴론과 다프네」에서는 딱딱한 돌을 잎과 나뭇가지로 바꾸었다.
「성 테레사의 황홀」에서는 조각 하나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제단을 무대로 만들고, 조각을 배우처럼 배치하고, 코르나로 가문의 사람들을 극장의 관객처럼 양쪽 벽면에 앉혔다. 위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까지 이용해 하나의 장면을 만들었다.
조각, 건축, 빛, 관람자까지 모두 계산한 공간 연출이었다.
그런 베르니니에게도 뼈아픈 실패가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탑이다.
기존 종탑 기초는 선임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가 마련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위에 베르니니가 자신이 설계한 거대한 종탑을 올리면서 발생했다.
기존 기초와 지반에 이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베르니니의 책임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 위에 새로운 구조물을 올리기로 했다면 기존 기초가 추가 하중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더구나 마데르노가 종탑용 기초를 만들던 단계에서 이미 파사드에 균열이 나타났다면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
17세기에 오늘날 같은 지반조사와 구조해석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 구조물의 상태와 새로 추가되는 하중을 살펴야 한다는 생각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탑과 성당 파사드에 균열이 나타나자 1645년 여러 건축가에게 원인과 대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미 베르니니와 결별해 독립 건축가가 된 보로미니도 여기에 참여해 종탑의 안정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냈고, 철거를 주장했다. 반면 보강을 통해 살릴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인노첸시오 10세는 1646년 종탑 철거를 결정했다.
베르니니에게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기초 자체의 선행 문제도 있었지만, 그 기초 위에 자기 종탑을 올린 최종 설계자로서 베르니니의 책임 역시 크다.
그래서 토목쟁이인 나는 이 대목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재 건축가도 기초를 우습게 보면 망한다.
조각에서는 대리석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 건축에서는 땅과 기초가 허용하는 한계를 잘못 판단했다.
대리석은 뜻대로 했지만 땅은 뜻대로 하지 못했다.
14. 좁은 땅에서 자기 건축을 만든 보로미니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와 전혀 다른 종류의 천재였다.
처음에는 베르니니 밑에서 일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발다키노 작업에서도 베르니니를 도왔다.
그러나 훗날에는 독립된 건축가가 되었다.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다. 보로미니가 베르니니의 조수였다는 이야기에 이어 종탑 문제에서 베르니니를 비판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자칫 종탑을 만들던 당시에도 보로미니가 베르니니의 조수였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종탑 공사가 본격화되었을 때는 이미 둘이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점을 책에서 한 문장이라도 분명하게 구분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보로미니의 진가는 산 카를리노 성당에서 더욱 잘 보인다.
그가 받은 땅은 넉넉하지 않았다. 작은 부지 안에 성당과 예배공간, 수도사들의 생활공간까지 집어넣어야 했다.
그런데 보로미니는 좁은 부지를 핑계로 삼지 않았다.
타원과 오목한 면, 볼록한 면을 이용해 공간을 짜고, 흰색과 구조 자체만으로 내부에 움직임을 만들었다.
넓은 공간을 받아 크게 짓는 것보다 이런 조건에서 필요한 기능을 모두 넣고 아름다움까지 갖추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현실의 제약이 설계자의 능력을 드러낸 셈이다.
베르니니가 색과 조각과 빛을 끌어와 공간을 연출했다면, 보로미니는 선과 면, 구조 자체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이렇게 구분해 보고 싶다.
베르니니는 공간을 연출하는 천재이고,
보로미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천재였다.
15. 베르니니의 화려한 재기보다 보로미니 쪽에 더 마음이 갔다
두 사람의 경쟁에서 결국 더 화려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베르니니였다.
종탑 실패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코르나로 가문의 의뢰를 받아 「성 테레사의 황홀」을 만들며 자신의 능력을 다시 보여주었다.
나보나 광장의 콰트로 피우미 분수에서도 베르니니는 다시 교황의 마음을 얻었다.
보로미니는 이미 1647년 콰트로 피우미 분수 설계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베르니니가 별도로 만든 분수 모형을 본 교황은 결국 베르니니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다. 책에 실린 두 사람의 설계안과 모형을 비교해 보면 결과적으로 교황이 왜 베르니니의 안을 선택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보로미니의 안은 단순하고 정제되어 있는 반면, 베르니니의 모형은 오벨리스크 아래를 과감하게 비우고 거대한 바위와 조각을 배치해 훨씬 극적인 장면을 만든다.
그 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광장이라는 거대한 공간까지 만들어 로마 바로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보로미니의 삶은 달랐다.
그 역시 독창적인 작품을 계속 남겼지만 후원 관계와 공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고 성격도 베르니니와 달랐다.
둘은 불과 약 100미터 거리를 두고 각자의 성당을 만들기도 했다.
베르니니의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와 보로미니의 산 카를리노.
가까운 거리에서 두 천재가 서로 전혀 다른 건축을 만들고 있었다.
보로미니는 1667년 스스로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을 단순히 베르니니와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하나의 이유만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베르니니의 화려한 재기보다 보로미니 쪽에 더 마음이 갔다.
그는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건축양식을 분명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천재였다.
16. 화려함만으로는 로마 바로크를 설명할 수 없다
로마 바로크를 처음 보면 화려하다.
성당은 거대하고, 천장은 열리고, 조각은 움직이는 것 같고, 분수와 광장은 도시 전체를 무대로 만든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로마 바로크는 내게 화려함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 뒤에는 교황권이 있었고,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대응이 있었으며, 문화유산을 자기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사용한 권력이 있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었고, 금서와 종교재판도 있었다.
그리고 길과 수로가 있었다.
카라바조는 성인을 거리의 인간으로 그렸고, 카라치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구성했다. 포초는 천장을 없애버린 듯한 환상을 만들었고, 베르니니는 조각과 건축과 빛과 도시를 하나의 무대로 만들었다. 보로미니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자기만의 건축양식을 만들어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다.
천재도 실패했다.
예술을 사랑한 후원자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빼앗기도 했고, 화가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찬란한 예술을 후원한 교회가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과 표현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래서 로마 바로크는 내게 단순한 미술양식이 아니었다.
로마 바로크는 위대한 예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교황의 권력과 종교, 도시를 만든 기술,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의 노동이 함께 들어 있는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화려한 성당과 조각 사이에서 나는 자꾸 길을 보았다.
권력자가 만든 길이든 순례자를 위한 길이든, 길이 만들어지면 결국 사람이 걷는다.
로마 바로크를 읽으면서 미술을 보았지만, 그 미술을 가능하게 했던 도시와 사람도 함께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