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묘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흑묘관의 살인』 독서감상 보고서 ― 관의 트릭에 감탄하고, 살인의 이유에 실망하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흑묘관의 살인』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관을 찾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흑묘관을 찾는다. 기억을 잃은 노인 아유타 도마가 남긴 수기를 바탕으로 시시야 가도미와 가와미나미 다카아키는 과거 사건이 벌어진 저택을 찾아 홋카이도 아칸의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관을 찾아낸다.

그런데 그곳은 흑묘관이 아니다.

백묘관(白兎館, 흰 토끼의 관)이다.

그렇다면 수기에 기록된 살인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흑묘관(黒猫館, 검은 고양이의 관)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 소설에서 내가 끝까지 풀지 못했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누가 죽였는가’보다 ‘어디에서 죽였는가’였다.


1. 나는 끝까지 홋카이도 아칸에서 헤맸다

아야츠지는 처음부터 독자를 홋카이도 아칸으로 몰고 간다.

아유타의 수기에는 항구도시, 안개, 감옥 터, 늑대, 호수의 거대생물, 토착민, 곰처럼 홋카이도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아모 다츠야 박사가 구시로 부근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니 수기 속 사건 역시 당연히 홋카이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완전히 그렇게 믿었다.

더구나 시시야 일행이 실제로 구시로를 거쳐 아칸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 관을 찾아내는 과정까지 이어진다. 여기까지 읽고서 수기 속 사건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속았다.

특히 내 머릿속에 ‘홋카이도의 여름’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박아버린 장면이 있었다.

아유타가 한 손에는 비닐봉지, 다른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해가 진 캄캄한 정원을 지나 소각로로 향하는 장면이다. 날씨는 거센 폭풍이 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험악해지고, 우산은 거의 쓸모가 없으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에 푹푹 빠진다.

기노우치가 앞뜰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장면에서도 모두 옷이 흠뻑 젖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름철 폭우를 떠올렸다.

사실 그 어디에도 ‘비가 온다’라는 말은 없다. 바람이 거세며 땅이 질척거린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8월이라는 날짜와 홋카이도라는 선입견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으니 나는 스스로 나머지를 채워버렸다.

여기에 결정타가 하나 더 있었다.

“에어컨 온도 좀 낮춰줘.”

이 말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냉방을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에어컨은 냉방만을 뜻하지 않는다. 난방을 하고 있는 방이 너무 더워 설정온도를 낮추는 것도 가능하다. 작가는 냉방이라고 쓰지 않았다. 독자인 내가 냉방이라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완전히 넘어갔다.

8월, 폭풍, 흠뻑 젖는다, 에어컨.

이 네 가지를 내 머릿속에서 연결해 ‘여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8월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지만 남반구에서는 겨울이다.

돌이켜보면 오후 5시 반 무렵 이미 어두워지는 것, 난방 때문에 창문에 김이 서리는 것, 정오에 북향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까지 모두 단서였다.

작가는 계절을 속이지 않았다.

장소를 숨겨놓고 독자가 계절까지 스스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2. 사람의 정체는 알아챘는데, 관의 정체는 몰랐다

반대로 아유타 도마의 정체는 비교적 일찍 의심했다.

수기를 읽으면서 아유타와 아모 다츠야 박사가 동일인일 가능성을 생각했고, 아모 박사의 양녀 리사코의 죽음에도 아유타가 직접 관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후반부에 밝혀지는 아유타의 정체 자체는 나에게 가장 큰 반전이 아니었다.

진짜 뒤통수를 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장소였다.

시시야 일행이 힘들게 찾아낸 아칸의 관이 수기 속 살인사건이 벌어진 관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 관은 백묘관이었다.

진짜 흑묘관은 일본에조차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타스마니아에 있었다.

이 순간 앞서 별다른 의문 없이 지나쳤던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젊은이들이 도로 표지판과 가게 간판을 큰 소리로 읽었던 이유, ‘이쪽 사투리’라는 표현, 8월의 이른 일몰, 북향 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긴급전화번호 000, 빨강과 파랑의 경찰차 불빛, 곰이 없는 숲, 유대류에 관한 표현까지 모두 타스마니아라는 한마디로 설명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거의 문제 삼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넘어갔다.

나중에 시시야가 하나씩 짚어줄 때도 “아, 그랬던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 작가가 단서를 숨긴 것이 아니라, 단서를 눈앞에 내놓았는데도 내가 그것을 단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셈이다.

감옥 터 역시 홋카이도의 유적이 아니라 포트 아서였다.

아유타가 누구인지는 의심하면서도 아유타가 어디에 있는지는 끝까지 의심하지 못했다.

『흑묘관의 살인』에서 내가 완전히 패배한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3. 북반구와 남반구, 적도를 거울로 삼은 두 개의 관

그리고 밝혀지는 백묘관과 흑묘관의 관계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아모 다츠야 박사는 나카무라 세이지에게 두 채의 저택을 의뢰했다.

한 채는 자신의 생가가 있던 홋카이도 구시로 부근, 다른 한 채는 젊은 시절 유학했던 오스트레일리아 타스마니아.

두 저택은 적도 위에 거대한 거울을 세운 것처럼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서로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다.

백묘관과 흑묘관.

흰 토끼와 검은 고양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

북반구와 남반구.

여름과 겨울.

실체와 거울에 비친 그림자.

이건 정말 끝내주는 설정이다.

단순히 마지막에 “사실은 외국이었습니다”라고 장소만 뒤집는 트릭이 아니다. 처음부터 두 개의 관을 지구 규모의 거울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차이에서 생기는 계절과 태양, 동물, 언어, 생활문화까지 수기 속에 단서로 흩뿌려놓았다.

살인범의 알리바이를 깨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서 있는 세계 자체를 뒤집는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서 살인사건보다 관을 찾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다.

진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4. 그런데 살인의 이유가 밝혀지자 맥이 빠졌다

문제는 이렇게 훌륭한 관 안에 집어넣은 살인사건이다.

관의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는 감탄했는데,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가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맥이 빠졌다.

특히 아모 다츠야에게 붙여놓은 설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모는 자신의 조카이자 양녀인 리사코에게 집착한다. 그것도 아이가 성장해 여성이 되어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롤리타 콤플렉스와 소아성애를 연상시키는 뒤틀린 욕망이다. 결국 그는 성장해가는 리사코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흑묘관 지하에 시신을 숨긴다.

대학교수까지 지낸 인물의 어두운 과거를 결국 이런 성적 집착으로 끌고 가야 했을까 싶었다.

레나는 이 사건과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녀는 여행 중이던 여성으로, 젊은이들이 여행 중 만나 흑묘관으로 데려온 사람이다. 그날 밤 술과 약물이 뒤섞인 난잡한 시간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죽은 채 발견된다.

그런데 레나는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아유타는 레나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할 경우 자신의 과거와 흑묘관의 비밀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레나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이 다시 진짜 살인으로 이어진다.

히카와는 자신을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약물에 취해 이성을 잃었던 자신이 혹시 레나를 죽인 것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아사오 겐지로에게 레나를 죽인 범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한다.

이 대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이성적으로 생각한 끝에 실제 살인을 저지른다?

그게 과연 이성적인 해결인가.

아모의 리사코 살해와 히카와의 아사오 겐지로 살해 모두 동기는 어줍잖지만 설명은 된다.

하지만 설명된다는 것과 납득된다는 것은 다르다.

북반구와 남반구를 뒤집고 태양의 방향과 계절까지 계산한 작가가 살인의 이유에 와서는 왜 이렇게 억지스러워지는지 모르겠다.

관의 트릭에 쏟은 정교함과 살인사건을 만드는 데 들인 정교함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


5. 죽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피해자들이다.

죽는 사람들이 살인자에게 죽을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복수를 당할 만큼 살인자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건에 휘말리고, 범인의 계획에 걸려들고, 하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

말 그대로 재수 옴붙어서 죽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은 『흑묘관의 살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관 시리즈를 계속 읽으면서 반복해서 느꼈다.

『십각관의 살인』에서는 그나마 범인의 원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할 만한 과거가 있다. 그렇다고 그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복수의 인과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인형관의 살인』의 히류 역시 살인을 저지르는 쪽이지만, 그가 가진 사정이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수차관의 살인』과 『시계관의 살인』에서도 피해자들이 범인의 목적과 사정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특히 『미로관의 살인』은 읽고 나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거의 ‘미로관에 초대받은 죄로 사형에 처한다’는 수준이다.

살인자에게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피해자가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6. 그리고 또, 살인자에게는 왜 이렇게 관대한가?

그리고 또,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야츠지가 살인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관 시리즈에서는 사람을 죽인 범인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지는 모습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죽거나, 사라지거나,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살인자에게도 묘하게 선택권을 남겨준다.

특히 시시야가 그렇다.

『미로관의 살인』에서도, 『시계관의 살인』에서도, 이번 『흑묘관의 살인』에서도 시시야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누가 사람을 죽였는지까지 알아낸다.

그런데 그 다음이 희한하다.

자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살인자에게 맡긴다.

한 번이면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반복된다.

범인을 밝혀내는 데에는 그렇게 집요한 사람이 정작 범인을 밝혀낸 뒤에는 “자수할지는 당신이 결정하시오”라는 식으로 물러난다.

도대체 시시야에게 살인사건의 해결이란 무엇인가.

누가 죽였는지만 알아맞히면 끝나는 것인가.

법적으로 일반인이 살인범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범인은닉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불편한 것은 법조문보다 시시야의 태도다.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살인자에게는 자신의 범죄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까지 주어진다.

나는 바로 이 불균형이 불편하다.


7. 아야츠지는 왜 살인자의 사정에 더 가까이 서는가

처음에는 그저 아야츠지가 살인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것 아닌가 하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관 시리즈를 여러 작품 읽고 비슷한 결말을 반복해서 만나고 나니, 작가가 왜 이런 방식을 선택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아야츠지의 관은 대개 일상적인 사회에서 떨어져 있다.

섬, 외딴 저택, 폐쇄된 건축물처럼 바깥 세계와 단절된 공간 안에서 오래된 기억과 원한, 욕망과 죄책감이 뒤엉키고 살인이 벌어진다.

그곳에서는 경찰이나 법원 등 사법권력이 사건을 중심에서 해결하기보다 개인이 개인에게 죄를 묻고, 복수하고, 진실을 밝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것이 아야츠지가 관이라는 폐쇄공간에서 살인사건을 만드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법과 제도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원한과 죄의식, 욕망과 광기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왜 살인자의 사정이 그렇게 자세히 설명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아야츠지는 ‘살인의 사회적 책임’보다 ‘살인의 개인적 사정’에 방점을 찍는 작가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범인의 내면은 선명해지지만, 피해자의 억울함과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은 상대적으로 흐릿해진다.

나는 아야츠지가 왜 그런 서사를 선택하는지는 이해해보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불균형까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8. 그렇다면 어떻게 썼어야 했을까

그렇다고 모든 추리소설의 마지막에 경찰이 나타나 범인에게 수갑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범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고통과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것도 문학의 역할이다.

살인자를 인간으로 이해하려는 시선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살인자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그가 저지른 살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

특히 시시야의 태도는 조금 달랐어도 좋았을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모두 밝힌 뒤 범인을 이해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까지 살인자에게 맡길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당신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선 정도는 그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반드시 경찰에 넘기는 장면이나 재판 결과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다.

살인에는 개인적인 원한과 고통만으로 끝낼 수 없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남겼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살인자의 내면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이 살인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인상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 관의 트릭에 감탄하고, 살인의 이유에 실망하다

그래서 『흑묘관의 살인』에 대한 내 평가는 분명하게 갈린다.

관의 트릭은 일류다.

나는 완전히 속았다.

홋카이도 아칸이라는 장소를 믿었고, 8월이라는 날짜를 여름이라고 믿었고,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을 여름 폭풍우라고 생각했으며, “에어컨 온도 좀 낮춰줘”라는 말을 냉방이라고 받아들였다.

작가는 여름이라고 하지 않았다.

냉방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백묘관과 흑묘관이라는 두 개의 관을 적도를 사이에 놓인 거울상으로 보여주면서 그동안의 단서들을 한꺼번에 뒤집는다.

이 트릭에는 감탄했다.

반면 살인사건은 실망스럽다.

성장하는 양녀를 받아들이지 못해 죽였다는 아모의 뒤틀린 욕망과, 자신이 레나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아사오 겐지로를 실제로 죽여버리는 히카와의 논리는 관의 트릭만큼 정교하게 설득되지 않았다.

트릭은 일류인데, 사건은 삼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흑묘관의 살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관이다.

나는 흑묘관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며 홋카이도 아칸의 숲속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찾아낸 것은 백묘관이었다.

진짜 흑묘관을 찾으려면 일본을 떠나 적도를 넘어 타스마니아까지 가야 했다.

살인사건의 동기에는 실망했지만, 독자를 지구 반대편까지 끌고 가는 관의 트릭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야츠지는 살인사건보다 관을 더 잘 지었다.


10. 흑묘관… 아니 백묘관을 찾아 다시 홋카이도로

이렇게 『흑묘관의 살인』을 덮고 나니 또 하나의 여행지가 생겼다.

구시로다.

나는 2018년 12월 30일부터 2019년 1월 3일까지 닷새 동안 삿포로에 머물며 홋카이도의 겨울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오타루, 노보리베츠, 비에이를 돌아다녔다.

오타루에서는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며 눈 덮인 거리를 걸었다.

삿포로에서는 아이누와 홋카이도 개척시대의 흔적을 생각하며 도시를 거닐었다.

비에이에서는 하늘이 열린 듯 눈이 펑펑 쏟아졌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눈을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금세 어깨와 머리 위에 눈이 내려앉았고, 눈앞의 들판과 길과 집들은 순식간에 흰빛 속으로 묻혀갔다. 눈을 피하기보다 그대로 맞으며 걷고 싶었다. 그때 비로소 ‘홋카이도의 겨울’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홋카이도는 내가 이전까지 알던 일본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여행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그리고 내년에는 다시 홋카이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빙을 보러 아바시리로 갈 계획이다.

그런데 『흑묘관의 살인』을 읽고 나니 홋카이도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더 늘었다.

구시로와 아칸이다.

처음에는 흑묘관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알고 있다.

홋카이도에 있는 것은 흑묘관이 아니다.

백묘관이다.

물론 백묘관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저택이다. 실제 구시로와 아칸의 숲속을 아무리 뒤져도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흰 토끼의 관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보고 싶다.

구시로에서 출발해 아칸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 보고, 국도에서 벗어나 깊은 숲으로 이어지는 풍경도 직접 보고 싶다.

시시야와 가와미나미가 아유타의 수기를 들고 관의 흔적을 찾아 헤맸던 그 공간을 현실의 풍경으로 불러내오고 싶다.

2018년 겨울에는 『러브레터』를 떠올리며 오타루를 걸었다.

내년에는 유빙을 보러 아바시리로 갈 계획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흑묘관의 살인』을 들고 구시로와 아칸으로 가야겠다.

흑묘관을 찾아 홋카이도로.

아니,

백묘관을 찾아 홋카이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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