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러스트 1 오늘의 일러스트 1
김윤경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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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정말 다양한 개성들이 모였네요. 제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어떤건 기피하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좋구요. 젊은 작가들의 일러스트를 실컷 보고 나니, 중견 작가, 노장 고수들의 그림도 보고 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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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4-2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와중에 책도 많이 읽고 수영도 열심히 배우는 포핀스님~~~~~~ 봄맞이는 충분히 하셨어요?^^

잘잘라 2012-04-25 00:45   좋아요 0 | URL
봄맞이!!! 더 하고 싶은데 오늘 날씨 너무 더웠어요. 순식간에 여름된 느낌이예요. 기상예보에, 내일 비 많이 오고 도로 ‘찬 봄’된다는 말이 나와서 반가워요^^ 아무리 생각해도 ‘더운 봄’은 말이 안되요. 차라리 찬 봄이 낫지.. 히히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공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공부고 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진단하고 또 사회를 바꾸어나가려는 노력이 바로 인문학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문학과 공부란 같은 것입니다. 또 산다는 것 자체가 공부고, 공부가 곧 사는 것이죠.

 

공부의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해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석과불식’이라는 금언이 있어요. 늦가을에 딱 한 개만 남아 있는 과실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외로운 상황입니다. 이 과실을 땅속에 묻어서 싹을 틔워내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어가는 것, 이게 사실은 인문학입니다. 이게 인문학이 지향해야 될 궁극적인 과제라고 봅니다. 이 한 알의 씨앗이 바로 인간이고, 인간적 가치고, 바로 인문학적 공부인 것이죠. 인간적 가치,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인간적 가능성이 극대화되어서 튼튼한 나무로 숲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인문학의 최고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 과정을 일관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바로 인문학적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영복 191-193p.)

 

 

공부란 망치로 하는 것

 

공부를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工夫. 갑골문의 문자적인 의미는 이런 겁니다. 사람이 연장을 옆에 놓고 있는 것. 위에 가로로 그은 획하고 아래에 그은 획을 각각 천(天)과 지(地)로 보고 그 천과 지를 세로로 그은 획으로 잇는 것. 천과 지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공부인 거죠. ‘부’ 자를 보면 아시겠지만 사람 인(人) 자로 연결되어 있죠. 사람이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인식하는 것. 그게 공부의 의미이고, 사람이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연장을 들고 살아가는 것, 실천하는 것, 실천의 경험을 이론화해서 쌓아 나가는 것, 그게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 가치를 이러저러한 인간적 실천에 의해서 튼튼하게 키워서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숲으로 만들어내는 공부, 그게 인문학적 공부의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 과정을 저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과실에서 나무를 거쳐 숲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부란 머리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긴 여행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평생에 걸쳐 하는 여행 중에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입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 하는 여행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여행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머리란 사실 합리적인 이성이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포획되어 있는 거죠.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사회의 주로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있는 겁ㄴ디ㅏ. 이걸 비판적으로 깨트리지 않으면 올바른 인식이나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공부의 첫 번째는 갇혀 있는 우리의 생각을 꺠트리는 것입니다. 머릿소겡 주입된 생각을 깨트리고 가슴으로 가는 것. 가슴으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 이 과정이 바로 공부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가슴에서 발로 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지식보다는 가슴의 애정으로 자기를 키우는데, 그게 한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더불어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고 삶의 현실에서 숲으로 만들어내는 노력, 실천적 노력을 발이라는 말로 표현한 거죠. 여기까지가 공부의 먼 여정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고 숲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서 발로 가는 삶이고, 삶 그 자체가 여행이고 공부인 것입니다. 그 여정은 머릿속의 생각을 깨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공부는, 특히 인문학적인 공부는 그렇습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란 책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서의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망치로 우리가 갇혀 있는 견고한 문맥을 깨트리는 것이죠.

 

여러분이나 저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맥에 갇혀 있습니다. 메자로스Meszaros라는 경제학자는 노동자들도 똑같은 문맥에 갇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회를 인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집단인 노동계급이 자본가와 똑같은 문맥에 갇혀 있다는 거죠. 욕망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비인간적인 구조가 더 완고하게 자기 조직성을 강화해 간다는 거죠.

 

심지어는 집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집이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공간이잖아요. 그런제 집마저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자본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집값이 올라야 돼요. 자본이란 자기를 증식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본으로 인식해요. 학벌도 소득이라든가 사회적 지위를 키우는 데 봉사하는 자본이 돼야 해요.

 

이처럼 견고한 우리의 생각을 깨트려야 합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고자 하는 인문학적 과제에서는 바로 우리가 갇혀 있는 이런 완고한 문맥 사고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는 망치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신영복 193-196p.)

 

 

우리 동네 아파트에 보면 어린이 놀이터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자주 보실 텐데 거기 보면 그네가 있고 또 소라같이 돌아 나오는 터널이 있습니다. 애들이 위로 들어가서 라인을 따라서 아래로 쏙쏙 나와요. 그걸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틀에 박혀 길들여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학교에 가서 하는 교과 공부도 똑같이 생긴 놀이터의 놀이 기구나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는 수능 시험도 결국 똑같은 놀이 기구를 반복해서 타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아이들은 그렇게 길들여져 가는 거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당하고 포획되는 과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공부는 모름지기 책상 위에 올라서는 저항과 비판 정신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굳은 머리를 깨트리고 가슴으로 가자는 거죠.

 

저는 오래 전부터 가슴이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머리가 생각한다고 알고 계시죠? 그런데 아무도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고 하죠. 시제로 《인간에 대하여》라는 책에 보면 유명한 철학자와 의사 두 분이 심야 정담을 하면서 "생각은 가슴이 한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이 강도에게 칼을 맞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당시 사회의 상류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가죠. 그런데 그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쓰러져 있는 행인을 구해줍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쓰러진 행인을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입니다. 그게 생각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거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생각은 그런 겁니다.

 

머리로 하는 생각. 뇌파가 그쪽의 기억 소자들을 네트워킹해서 어떤 상을 만들어내는 그런 생각이란 그야말로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기계적인 반응입니다. 생각은 대상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건 가슴이 판단하는 것이죠. 그래서 머리로부터 가슴으로의 여행은 굉장히 먼 여행이기도 합니다. 결국 가슴으로 옮아가는 것이 진정한 공부가 되는 겁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운동 시간에 나이 많은 목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목수는 땅바닥에 앉아서 자기가 옛날에 집 짓던 얘기를 하면서 집을 그려 보이는데, 주춧돌부터 집을 그렸어요. 주춧돌을 그리고 그다음에 기둥과 마루를 그리고, 제일 나중에 지붕을 그리더군요. 그런 순서로 집을 그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는 지붕부터 그렸거든요. 아마 여기 계신 분들도 대부분 지붕부터 집을 그릴 겁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집 그리는 순서는 집 짓는 순서하고 같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죠. 책상 앞에서 공부한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굉장히 반성했어요. 가슴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지만 그냥 이해와 공존의 선에서 끝났을 뿐, 나 자신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진 않았어요.(신영복 197-199p.)

 

 

진정한 변화는 인간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 안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공부가 아닙니다. 그걸 계기로 해서 자기가 변화해야 합니다. 목수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릴게요. 이렇게 당신과 내가 평화롭게 공존합시다. 이건 공존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존은 자기 자신의 변화해야 합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에서 자신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 그게 진정한 공부입니다.

 

저는 감옥에 있는 동안에 참 많은 사람들은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만남을 통해 제가 이전에는 키우지 못했던 따뜻한 가슴을 누구보다도 뜨겁게 키워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끝난다면 공부의 의미가 절반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공부의 계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만남을 통해서 내가 변해야 되겠다는 충격을 받은 일을 한 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감옥에서 제가 책 30~40권을 ‘이동 문고’로 보유하고 있었어요. 감옥에서는 세 권 이상 소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세 권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근데 제가 30~40권 정도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열독 허가증이 없는 책, 적발되면 처벌받거나 당장 압수될 만한 책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었어요. 더구나 저는 요시찰 대상이었어요. 수시로 내가 자는 방에 들어와서 무슨 책을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곤 했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책이 한 권도 없어요. 전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나한테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많으니까 반납하기에 아까운 책들을 빌려주려고 한 권 두 권 모으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죠. 물론 저는 한 권도 소지하지 않고 분산해 놨어요. 누가 무슨 책을 갖고 있는지 내가 거의 기억하고 있죠. 누가 어느 책 다 읽으면 받아서 누구한테 주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책은 받아서 누구한테 주고, 이렇게 계획이 서 있었어요. 그 계획대로 전달하고 숨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제가 굉장한 인맥을 만들었지요.(웃음)

 

사실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왕따였어요. 정말 인간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그런 사실을 처음에는 깨닫지도 못했죠. 특별한 마찰도 없고 특별히 문제될 게 없으니까. 또 다른 사람이 물으면 대답도 잘 해주고 작업도 열심히 하고 친절하게 하니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주 인간적으로 가까운 자리까지는 허용하지 않는 거였어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람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하게 돼요. 그 이후에 제가 왕따를 면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책을 숨겨놓거나 전달하거나 운반하는 일을 각자 맡아서 일사불란하게 하는 거죠.

 

자기 변화는 궁극적으로 인간관계로서 결실을 맺어야 돼요. 자기 개인만 변해서는 진정한 변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튼튼하게 서로 연대될 때 변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한 공부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까지 갔던 공부의 작은 예로서 이동 문고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한 것입니다.(신영복 199-201p.)

 

 

관계있는 사람과 관계없는 사람의 차이

 

맹자가 인자한 임금으로 소문난 제나라의 선왕한테 찾아가서 질문을 합니다. "제가 이런 소문을 들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소문이냐 하면, 신하가 소를 끌고 지나가는 걸 임금이 보고, 그 소 어디로 끌고 가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신하가 흔종하러 간다고 대답해요. 흔종은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제사 의식에에요. 결국 소가 사지로 끌려가는 거죠. 임금이 신하에게 소를 놓아주라고 말합니다. 그래 신하가 "그러면 흔종을 폐할까요?" 하고 물으니까 임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흔종이야 어떻게 폐할 수가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지내라." 맹자가 선왕에게 "그런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그런 적이 있었따고 말합니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자기를 인색한 임금이라고 백성들이 욕하는 소문이 나도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이죠. 맹자가 왜 소를 양으로 바꾸었냐고 물으니까 왕은 불쌍해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맹자가 또 묻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선왕은 "양도 불쌍하지......"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맹자가 선왕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소와 양을 바꾼 이유를 설명합니다. 소는 봤고 양은 못 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는 봤잖아요. 그 소가 죽는 것은 참을 수가 없고, 보지 못한 양이 죽는 건 좀 덜 가슴 아픈 거죠. 이 이야기는 만남의 엄청난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만남,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입니다.

 

관계가 있는 사람과 관계가 없는 사람의 차이가 있어요. 소와 양이 만나고 만나지 못한 차이 때문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잖아요.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 우리가 건설하려는 숲, 인간적인 관계가 어느 수준인가 냉정하게 봐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회의 인문학적 수준입니다.

 

길에서 부딪히거나 전철에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 지수가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서울대학교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뢰 지수가 10점 만점에 4.0 정도입니다. 4.0이면 불신이 약간 더 큰 거죠. 반신반의하는 게 5.0 정도잖아요. 그것보다 낮은 것이 4.0 정도죠. 불행하게도 4.0 이상 되는 사회 집단은 거의 없다는 거죠. 정치인들은 3점 몇이에요. 좀 나은 사람들이 시민단체 관계자나 교사들인데 그래도 5.0을 넘지 못해요. 우리 사회 인간관계의 인문학적 수준이 그 정도로 심각한 거죠. (신영복 201-203p.)

 

 

도시의 효율성,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회의 본질이 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되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보고 서로 안 보는 관계는 사회적 관계가 아닙니다. 제가 감옥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감각이 대단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딱 보면 저 사람이 죄명이 뭔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 형기가 얼마인지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힙니다.

 

출소 뒤에는 지하철에서 자리 잡을 때 그 민감한 감각을 많이 활용 했습니다. 딱 보면 누가 어느 역에서 내릴지 거의 알아맞힙니다. 제가 앉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앉을 수 있습니다. 물론 승객이 너무 많아 곧 내릴 사람 앞에 서지도 못할 정도가 되면 저도 자리 잡기 힘들죠. 한번은 영등포역에서 인천으로 가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지만 그날은 피곤해서 10분 정도 졸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쭉 일별하고 다음 역인 신도림에서 내릴 사람 앞에 딱 섰어요. 신도림에 정차하니까 그 사람이 일어섰죠. 제가 그 자리에 대한 연고권이 분명히 있는데도 옆에 있던 여자 분이 턱 하니 앉더라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제가 곰곰이 생각해봣어요.

 

그 여자 분하고 나하고 물론 그 이전에 만난 일도 없고요, 그 이후에 만날 일도 없습니다. 우리 노동대학에서 지하철 노조 간부들이 수업을 많이 듣는데, 그분들께 제가 물어봤어요. 서울 시민의 지하철 평균 탑승 시간이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까 열 정거장, 즉 20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여자 분하고 나하고는 20분만 있으면 헤어지고 마는 관계잖아요. 우리가 언제 다시 볼 거야?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불법적으로 남의 자리를 뺏는 거죠. 만약 그 여자 분하고 내가 전철 안에서 같이 밥해 먹고 공부하면서 한 3년 같이 산다면 그렇게 못할 거 아니에요. 만남이 그만큼 허약하기 때문에 그런 비 인문학적인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웃음)

 

제가 그 얘기를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에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응해요. 서울의 인간관계의 현주소가 소위 말하는 도시의 과밀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이유가 되기는 한다고 봐야죠.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를 더 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고민을 한다면 질문이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과밀한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 그거 우리가 질문해야 돼요.

 

누가 만들었어요? 한 번고 고민해본 적 없어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겁니다. 그 이전에는 도시 사회가 아니죠. 중세 때는 지방분건적인 사회 구조였죠. 물론 고대 노예제 사회에도 도시가 있긴 했지만 그때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지금 같진 않았죠. 지금 도시는 자본의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물리적 공간입니다. 마치 노동자 합숙소처럼 다 모아놓고 경영하면 비용이 굉장히 절감됩니다. 물류나 여러 가지 비용으 줄이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게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사회 역사적 형식이 도시입니다. 도시 과밀에서 끝날 게 아니라 이 과밀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되는 거죠.(신영복 203-206p.)

 

 

만남이 없는 사회는 잔혹하다

 

우리가 지금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하고 무슨 관계냐, 이것도 사실은 상품 사회의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자와 얼굴 없는 소비자가 상품의 판매와 구매라는 형식으로 맺는 인간관계, 이게 상품 사회 인간관계의 본질입니다. 소비자를 안 보니까 음식에 유해 색소나 유해한 성분 넣어서 상품화해서 팔잖아요. 얼굴을 보면 그렇게 못하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러니까 20세기를 통틀어서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전쟁으로 사망합니다. 문화와 물질적 수준이 발전한 시대에 왜 이토록 엄청난 살육이 일어날까요? 안 보고 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죽이는 거예요. 만약 칼로 싸우면 여러분들 몇 사람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얼굴 쳐다보고 전쟁하면 몇 사람 못 죽인다고 합니다. 활로 죽이면 조금 더 많이 죽일 수 있고, 총으로 싸우면 더 많이 죽일 수 있고, 그렇답니다. 지금은 장거리포로 죽이기도 하고 전폭기에서 모차르트 음악 들으면서 포탄 쏘아서 죽이기도 하고 그러죠. 서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죽이기 때문에 대량 살육이 일어납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 엄밀하게 말하면 사회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모스크바에서의 경험이 연상됩니다. 모스크바는 지하철이 지하 150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선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가 얼마나 길겠어요. 속도도 서울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가 4~5배 정도 빠릅니다. 모스크바 여행을 할 때 자주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젊은 사람들이 탑승구 쪽을 주시하고 있다가 노인들이 탑승하면 모시고 와서 자리에 앉혀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 제가 안내하는 분한테 물어봤어요. 늘 이렇게 하냐고 물으니까 "당연하죠" 하고 대답해요.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어요. 저 노인들이 이 지하철을 건설했대요. 젊은 시절에 청춘을 바쳐서 혁명적 정열로 지하철을 건설했따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사람이 당연히 노인들을 앉힌다는 거예요. 맞잖아요.

 

그래서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질문했어요. 노인들이 지하철을 건설했고, 너희들은 한 일도 없는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애들이 아주 칼같이 대답해요. 노인들이 건설한 건 맞지만 자기들 월급 받으려고 한 거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관계가 없는 거예요. 동시대의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관계도 신뢰가 없습니다. 똑같은 사실 관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러시아 젊은이들은 예의 바르고 우리나라 아이들은 예의가 없어서? 그렇게 질문이 끝나면 안되는 거죠. 서울의 인간관계가 황폐한 것이 도시의 과밀 때문이라는 것에서 질문이 끝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머리에서부터 가슴을 거쳐서 발을 만들어내고, 그 발이 바로 우리 삶의 숲을 인간적인 관계로 만들어내는 게 인문학적인 과제입니다. (신영복 206-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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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본기 2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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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엔 ‘비싼 책’, 읽고 나니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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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뒤집어 보는 재미 - 우리가 미처 몰랐던 뜻밖의 자연생태이야기
박병권 지음 / 이너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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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자연, 뒤집어 보는 재미’. 내용은 ‘자연, 뒤집어 보니 충격!’... 봄! 한창 꽃구경 황홀경에 취한 나에겐 첫장 꽃과 꼬추 이야기가 재미를 넘어 충격이었음. 크하하. 이런 충격이라면 언제나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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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대장 할머니 지지 시리즈 2
시마다 요시치 지음, 홍성민 옮김 / 예원미디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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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대장 할머니! 제가 뭐 할머니 인생관에 백 프로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요, 위풍당당 할머니, 따를 자 없는 생활력에는 완전 홀딱 반했습니다요! 오래 오래 살아주셔서, 그리고 저를 웃기고 울려주셔서 감사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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