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제일 인상깊은건 다들 애니에서 들어알고 있는

역시로군=사스가다나, 를 한자로 표기한 부분이다

流石 혹은 遉라고 쓰고 さすが라고 읽는다

들어서 입말로 알고 있는 표현이 한자로 표시될 때 그 시각적 임팩트에 깜짝 놀라게될 때가 있다

비슷하면서 조금 더 강한 예시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국한문혼용체다. 그냥 한자도 아니고 한문한문스러운 문체를 한자로 읽을 때와 한글로 읽을 때 느낌이 천양지차다

예컨대

噫라舊來의抑鬱을宣暢하려하면時下의苦痛을擺脫하려하면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아아新天地가眼前에展開되도다威力의時代가去하고道義의時代가來하도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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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사제들이 강론을 GPT로 쓰는 것을 금지한 교황님


"음 요즘 신부님 말씀이 참 좋은데?" 했던 잠깐의 허니문이 일장춘몽처럼 끝났다. 교황님 말씀을 안 들을 수는 없으니까. 그 발언의 저의는 강론 준비라는 자기수행 과정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슈를 통해 100% 노동집약적 준비 vs 인공지능을 통해 시간절약 후 더 중요한 우선순위에 한정된 재화를 분배라는 두 양립불가능한 태도의 충돌을 읽을 수 있다. 종교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직자도 다른 관리자(대위, 수간호사, 매니저 등 팀장직급)와 마찬가지로 담당영역에서 상담, 행정, 봉사, 의례 등 수많은 하루 일과를 쳐내야한다.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일. 밤에 촛불을 키고 성경을 뒤적이며 전달할 글을 펜촉으로 쓰던 시대의 정신이 있었다. 돌볼 사람도 많았지만 그만큼 도와줄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기술발전에 따라 예전엔 인력이 해주던 마차 대신 GPS 차량, 연락리에종 담당 시종 대신 핸드폰, 필경사와 제본업자 대신 컴퓨터와 인쇄기기가 있다. 나아가 새로 등장한 다양한 AI에이전트가 절차적 과정을 생략해준다. 대신 조직의 허리가 부족해 시니어급은 과로에 시달린다. 그러니 넓은 지역의 교구사목에 한정된 시간과 체력을 기울이기 위해 반복적인 작업을 AI에 외주해 나보다 더 좋은 강론을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활용한다.


교황님의 말씀은 강론 전달을 통한 결과적 찬사보다는, 준비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성직자 자신의 마음가짐을 갈고 닦는데 그 본질이 있다는 뜻 같다.


예컨대 음식을 팔아 이윤을 남기고자 하는 요리사가 인건비 절약 및 워라벨을 위해 냉동음식이나 공장에서 음식을 떼어와서 파는 경우와 상반되는, 모든 음식을 뒷마당에서 무농약으로 재배하는 유기농 농부와 같은 태도. 가톨릭의 추구미다.


그러나 소규모 까페 운영자가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반죽해서 베이커리를 매번 준비하기엔 비현실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 중간업체를 이용하는 합리적 이유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관리자에게 과거 10명이 해야할 강도의 노동이 집중되고 있다. 가끔 생각하는 것이지만, 전달자는 자기에게 전달하는 바가 결여되어 있다. 미용사는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고, 심리상담사는 자기 마음을 돌보지 못하며, 교육자는 자기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한다. 종교인도 영적지도와 수행에 전념하기 어렵다. 박영진이 외쳤다.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 그것처럼, 모두 수도원에 가면 양떼는 누가 돌보나?



모두가 절에 들어가 면벽 수행하고 모두가 공부만 하는 학승이 되면 절은 누가 돌볼지. 주지 스님이 없다면 산에서 다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같은 예시다.


성직자의 GPT의 사용 이슈에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왜 교황님은 금지했을까

생성형 인공지능이 자료 조사와 초안 작성 등 로펌 주니어, 신입 개발자, 버역가, 대학원생, 비서 등이 해주었던 화이트 칼라의 하급노동을 자동화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는데

종교인마저 강론을 생성한다고 여겨지게 되면

강론의 신비가 탈각된다. 신부님도 GPT쓴다면서요? 그럼 왜 강론 왜 들어요 라는 낙인이 싫은 것이다. 


마치 필적에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글에 쓴 사람의 맛이 드러난다. 이 구수하고 인간적인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GPT 특유의 표현이 싫다. 영양가 없는 레토르트 제품 먹는 것 같다. 예컨대 not only but also를 번역한 결국 아니다. 구조 설계. 너무 많은 쉼표 등등. AI가 쓴 글 마저도 쓴 이의 지문이 묻는다.


성직자도 광의에서는 철학자와 같다. 성경의 단어에 대한 문헌학적이고 철학적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금욕적이고 방향성 있는 삶의 태도도 비슷하다. 


이때 철학자의 학회에서 발표와 성직자의 강론은 닮아 보인다. 세속이냐 아니냐의 양태가 다를 뿐. 그런데 철학자들은 학회에서 자신의 이론을 이해해 줄 지식 수준이 되는 동료 철학자마저도 자기 발언을 듣지 않고 있어도 그 낭독 과정을 자기 전달과정으로 포함한다. 최근 번역된 대니얼 대닛의 자서전 생각이란 무엇인가에서 읽은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전에 이미 마음과 의식을 다루는 과학철학을 선구적으로 연구한 대니얼 대닛 같은 최상급 철학자도 학회가 너무 지루해 내용이 아니라 발언자가 내뱉는 단어의 a, b, c 알파벳 순서를 세면서 겨우 졸지 않게 버틴다고 했다. 이제 AI로 요약해서 논문을 빠르게 섭취하는 이공계 전공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인문학자의 발표방식은 말과 글의 전달이라는 결과론적 행위보다 그것을 행하는 수행성이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인식 에 기반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기가 써서 준비한 글을 신자들 앞에서 읽는 자체가 중요하다.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하고 자신을 조탁하는 여정으로서 글쓰기다. 설령 다들 안 들어도 자기가 듣고, 고난의 과정을 함께 하시 하느님이 듣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과거에도 정말 모두 100% 자기가 썼을지, 정말 큰 웨스트민트서 대성당 같은 abbey=주교좌성당에 주니어 사목사제와 수녀님들이 많았다면 초안 써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다. 이때도 경영자적 마인드가 있는 이들은 일부 업무를 아웃소싱했을 듯 하다. 이 이슈를 통해 GPT 사용유무의 현안보다는 현 미국교황님의 철학자적 면모가 드러났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m7mXppQ9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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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상수의 장편영화 34편를 보는 54시간 (이번 개봉 포함, 단편 3편 61분 제외)


보고 나서 관객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좋다 나쁘다, 맞다 아니다, 거북하다 불편하다, 예술적이다 아니다 등

어떤 의미에서 종교 지도자 같기도 하다.

영적이고 종교적인 게 아니라 그 앞에서 믿냐 안 믿냐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게끔 하고, 지향과 파벌에 따라 홍해처럼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작품의 해석을 경유해, 드러나게 된다.

이전에 한국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어떤 한 집합에 대한 소셜 코멘터리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공간의 이동, 과묵한 카메라 응시, 뚝딱거리는 대화 같은 연출스타일이 짐 자무시와 같은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혹은 그런 인디영화적 연출의 한국판으로서 해외에서 수상하는지도.



2.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지브리스튜디오와 이를 잇는(다고 명명되었던) 신카이 마코토와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는 이제 명맥이 끊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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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메시지 연출에서 특색있는 스타일을 확립한 영화감독이 있다 예컨대

란티모스 웨스앤더슨 놀란 클로이자오 마틴스콜시지 스필버그 제임스카메론 샘멘데스 토드필립스 리들리스콧 드니블뇌브 히치콕 쿠아론 트뤼포 로메르 고다르 코폴라 알리체로르와커 PTA 데미언샤젤 코신스키 오종 뤽베송 맨골드 맥케이 라스폰트리에 아리에스터 페촐드 베르톨루치 펠리니 가이리치 과다니노 팀버튼 델토로 빔밴더스 라이카르트 켄로치 멜빌

더불어 이런 예술가도 같은 맥락에서 이름과 스타일이 정확히 매칭된다.
위아래 시간을 들여 공부해 스스로 느끼고 이해해야

얀반에이크 조토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 다빈치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티치아노 뒤러 한스홀바인 카라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페르메이르 부셰 자크루이다비드 고야 들라크루아 프리드리히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세잔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 파울클레 에곤실레 막스에른스트 컨스터블 살바도르달리 프랜시스베이컨 루치오폰타나 게르하르트리히터 안젤름키퍼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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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감히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글을 쓰고 싶고
그런 지문같은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면 삶이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대략 죽는게 낫다는 말인데 구체적이고 극단적인 실행계획은 없어서 순화해서 표현했다.

황석영 작가처럼 사고하는 중간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최종결과물과 스타일링은 나의 것이다. 결과물을 출력해달라 하지 않는다. 채색도움같은 윤문과 검토도 안 받는다.

내 글에 읽고 본 사람만 아는 디테일이 드러나 실제로 경험했다는걸 역으로 증명하길 바란다. 티켓이나 인증샷같은 외적표현이 아니라 실속으로.

나는 보통 고유명사가 아니라 장면의 디테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아래 캡쳐 1번처럼 AI에게 정보를 역추적하는 질문을 한다.

캡쳐1번처럼 채선생이 실패했기 때문에 구글에 물어봐 답을 찾는다. 다중에이전트가 필요한 이유다. 캡쳐3처럼 횡설수설하다가 못 찾는 경우도 있다. MMCA 아시아영화에서 본 독립영화였다. 이 쿼리를 보면 장면묘사로 기억하고 있다.

이게 끝이 아니고 한비자 내저설을 실제로 읽으러간다. 원문도 본다 생각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인간만의 것.
그래서 독서 시청 감상에 시간이 많이 든다 그 각고의 노력 끝에 정말 퀄리티 높은 정치한 글을 생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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